소설리스트

170화 (170/256)

이대로 두면 또 미소와 싸울 것 같아서 나는 미소에게 눈짓해 그만두게 했다.

“자자, 에이도 그만해.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목소릴 높이고 그래?”

“흥.”

다행히 세아 씨가 나서서 진화해주었다.

에이도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이건 나에 대한 기선제압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저거보다 훨씬 까칠한 사람을 알고 있어서 그럴까?

그래도 예전 같으면 안절부절못했을 텐데. 나도 멘탈이 굵어지긴 했나 보다.

“오랜만이에요, 선후 오빠!”

“응. 오랜만이네.”

진이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매달려왔다.

살벌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뻔뻔함은 배우고 싶다.

“오빠, 저 어때요? 치명적이지 않아요?”

산타 걸 코스튬을 입은 진이가 나름대로 섹시 포즈를 지어 보인다.

왠지 배경 자막으로 섹시도발이라는 글자가 나올 것 같았다.

“응. 예쁘네.”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이 무리해서 성인용 코스튬을 입은 거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오자마자 에이한테 혼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스프링 멤버 4명 모두 산타 코스튬을 입고 있었다.

산타복에 산타 모자, 목이 긴 빨간 부츠까지.

섹시함보단 전체적으로 귀여움을 강조한 코스튬으로 보였다.

치마만은 좀 짧았지만 뭐, 이 정도는 요즘 아이돌한테 아무것도 아니겠지.

항상 바지만 입는 것 같았던 에이도 오늘만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던 건가?

“오빠도 이거로 갈아입고 와.”

“이게 뭐야? 산타복?”

미소가 건넨 쇼핑백 안에는 웬 누런 담요 같은 게 들어있었다.

“오빤 루돌프야!”

“……루돌프? 내 거라고?”

아뿔싸.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이라면 나한테도 코스튬을 입힐 가능성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까지 이런 옷 입을 필요 있어? 어차피 다들 스프링 보러 오는 건데.”

“무슨 소리야? 우리 채널 구독자의 절반은 오빠 팬인데.” 

어떻게든 저항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자자, 빨리 갈아입고 와.”

“어어…….”

미소에게 등 떠밀린 나는 휑한 탈의실에 어색하게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갈아입어야 할 것 같다.

스프링 멤버들도 다 입었는데 나만 뺄 수는 없겠지.

쇼핑백 내용물을 꺼내본다.

사슴뿔 후드가 달린 인형 잠옷이었다.

나름 귀엽기도 하고 따뜻해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덤으로 빨간색 루돌프 코도 들어있다는 것.

피에로가 코에 붙이고 나오는 그거였다.

“……이것도 해야 해?”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것도 끼기로 했다.

꼴에 이미지 관리한다고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으니까.

에이의 태도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책잡힐 가능성이 있는 건 피해야 했다.

그나저나 에이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싫어하는 것 같네.

초면에 그렇게까지 공격하다니.

그나마 다른 멤버들이 내 편 들어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눈물 날 뻔했다.

그래도 가능하면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데.

미소랑 같은 그룹 멤버이기도 하고, 나랑은 동갑이기도 하고.

하지만 싫다는 사람이랑 사이 좋아지는 건 어렵겠지.

같이 있는 동안은 되도록 엮이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다.

“푸하! 오빠! 그게 뭐야!”

“뭐가? 이거 입고 오라며.”

루돌프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미소가 나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옷 말고 코! 코는 안 해도 돼! 그건 그냥 옷 사면 같이 주는 거란 말이야!”

미소뿐만 아니라 세아와 진이도 웃고 있었다.

에이만큼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별로 마음에 위안은 되지 않았다.

“아, 그랬어……?”

나는 뻘쭘하게 루돌프 코를 뺐다.

그러자 이번엔 웃음을 참고 있던 에이가 터졌다.

“풉!”

내가 쳐다보자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야. 근엄한 척하더니.

그렇게 웃을 거면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했다.

“아하하! 오빠 코 빨개졌어!”

“진짜?”

세아 씨가 웃으면서 손거울을 건넸다.

거울을 받아 보니 잘생긴 내 코가 진짜 루돌프 코가 되어 있었다. 윽.

장식용 코가 불량이었는지 워낙 빡빡했던 탓에 코가 눌려서 빨개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하하하, 아, 웃겨. 나 눈물 났어.”

“흐흐. 선후 오빠, 사진 찍어도 돼요?”

“절대 안 돼.”

아. 부끄러워라.

하필이면 여자애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에이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서 나를 힘껏 외면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나 하나 희생해서 웃겼으니 됐나.

망가졌던 분위기도 좀 좋아졌고.

대신 내 이미지는 좀 망가졌지만, 이 정도는 싼 거겠지.

크리스마스 특별편 – 스프링 산타 걸스 2 

의외로 촬영은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무난히 잡담을 나누고, 질문을 받고, 노래를 한다.

에이도 프로이니만큼 촬영 중에도 시비를 걸진 않았다.

대본에 맞춰 내가 질문을 해도 에이는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휴우.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정말로.

촬영 중 유일한 문제는 내 복장에 있었다.

내가 입은 루돌프 잠옷은 손이 벙어리 장갑처럼 막혀있었던 것이다.

이런 옷 입고 어떻게 피아노 치라고? 대체 이런 걸 누가 준비한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칠 수 있었다.

진짜 어려운 곡이라면 불가능했겠지.

그래도 가요나 캐롤 같은 건 치기 쉬워서 가능했다.

피아노도 평소에 치던 클래식 피아노가 아니라 전자 피아노였지만, 루돌프 옷에 비하면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특등석에서 스프링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찍을 때와는 달리 공간도 넓으니 춤도 제대로 췄고.

에이도 성격은 나쁘지만 키도 크고 다리도 예뻐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성격만 좀 사근사근하면 훨씬 좋을 텐데.

네 소녀의 짧은 치마가 나란히 살랑살랑 흔들리는 광경은 몹시도 매혹적이었다.

안에 입은 게 팬티가 아니라 속바지여서 좀 아쉽긴 했지만.

겨우 피아노 반주 몇 곡 쳐주고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역시 배우길 잘했어.

나는 피아노를 배우게 해준 엄마에게 또 한 번 감사했다.

* * *

“찐린이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만나요! 안녕~~!”

“감사합니다.”

스프링 멤버들은 귀엽게 손을 흔들고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오늘도 무사히 녹화를 마쳤다.

미소가 카메라를 끄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녹화 끝! 그럼 오늘 밤 미소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 할 사람!”

“웬 크리스마스 파티?”

아직 크리스마스는 많이 남았는데.

오늘 촬영은 크리스마스날 올리기 위한 녹화분이지,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건 아니다.

“우린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못 노니까요.”

“아아.”

세아 씨가 설명해준다.

우리 같은 아이돌에게 크리스마스는 대목이나 마찬가지라서 놀 수가 없다고.

혹시나 크리스마스에 밖에서 사진 찍히면 난리가 나니까 스케쥴이 없어도 집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래서 파티도 이렇게 미리 한다고 했다.

“나 갈래!”

진이가 신나서 외친다.

평소엔 별로 못 노니까 이런 기회가 있으면 기쁜 거겠지.

“그럼 세아 언니는?”

“나는…….”

응? 왜 나를 봐요?

“……응. 갈게.”

세아 씨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이랑 세아 언니는 참가. 에이 언니는?”

“난 안 가.”

뭐, 그렇겠지.

촬영 때는 웃고 있었지만, 끝나고 나선 바로 인상 쓰고 있었고.

미소도 안 가겠다는 에이를 굳이 더 권하지 않았다.

“그럼 세아 언니, 사장님한테 허락받아줘. 우리 집에서 파티하고 간다고.”

미소의 말에 세아 씨는 왠지 또 나를 쳐다봤다.

응? 왜 나를 봐요?

“……후. 알았어.”

세아 씨는 조금 망설이더니 휴대폰을 들었다.

아이돌은 이런 것도 소속사 사장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구나.

피곤하겠네.

“──네, 사장님. 네. 지금 끝났어요. 이제 가려구요. ……저, 사장님. 미소가 산타 옷 입은 김에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하자고 하는데. 네. 미소랑 진이랑 저랑요. 에이는 안 가고요. 네. 아마……1시 전에는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미소야. 난 먼저 옷 갈아입고 올게.”

생각해보면 내가 듣고 있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 집에서 한다고 해도 멤버들끼리 파티하는데 내가 거기 낄 것도 아니고.

“응. 오빤 갈아입고 먼저 가. 우린 매니저 차 타고 갈게.”

“어어. 그럼 집에서 봐. 에이 씨도 들어가세요.”

일부러 인사까지 했지만 에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칫.

* * *

“……그런데 왜, 다들 내 방에 있는 거야?”

집에 돌아온 나는 먼저 샤워부터 했다.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자 웬 산타복을 입은 세 명의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미소와 진이, 그리고 세아 씨였다.

“오빠 메리 크리스마스! 이건 미소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와~!”

미소가 말하고 세아 씨가 박수를 친다.

그리고 진이는 바퀴벌레처럼 날아와 내 허리춤에 두른 수건을 낚아채 갔다.

“앗!”

“오오~! 대물 발견!”

진이의 기습에 나는 반응할 새도 없이 수건을 뺏겨버렸다.

발기 전의 자지가 덜렁거린다.

여기서 굳이 가리는 것도 모양이 안 산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서 내버려 두었다.

“헤헤. 오빠, 놀랐지?”

“……어. 놀랐어.”

굳이 우리 집에서 한다는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짓을 할까? 싶은 생각도 반반이었다.

“그러니까 선물이란 건…… 그런 뜻이지?”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뜻 맞아.”

미소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적어도 아이돌이니까.

나도 팬의 한 사람으로서, 건전하게 활동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아까 촬영 중에도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외로운 솔로지만, 다음 크리스마스는 남자친구랑 보내고 싶어요!’ 같은 소리를 했으면서.

“세아 씨도요?”

“저, 저는 별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기…….”

안절부절 횡설수설.

그러면서도 눈만은 힐끔힐끔 내 다리 사이를 향했다.

아이돌이라.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이란 건 알고 있지만, 한세아만큼은 환상인 채로 남아주길 바랐는데.

천사 같은 아이돌이 사실 이렇게 문란하게 노는 걸 알면 팬들이 얼마나 슬퍼할까?

……뭐, 스프링의 처녀를 두 개나 빼앗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한 꺼풀 벗기면 어차피 다 똑같은 여자애란 거지.

“야, 저리 가.”

“아앙~.”

괜히 심술이 난 나는 발밑에서 자지를 쪼물딱거리고 있던 진이를 발로 밀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에이가 그나마 성실한 인간이었구나.

나를 싫어하게 된 이유도 아무 데나 박고 다녀서 그런 거니까.

나한테 까칠하게 군다고 나쁘게만 생각했었는데, 그 에이야말로 정상인이었다.

“세아 씨. 키스해주세요.”

“…….”

내 말에 세아 씨는 망설이면서도 휘청휘청 다가온다.

어차피 할 거면서 왜 빼는 척이람.

내 앞까지 와서 발돋움해 키스하려는 세아 씨를 멈춰 세운다.

“아뇨, 거기 말고요. 여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킨다.

“여기에 키스해주세요.”

세아 씨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본다.

전에도 펠라치오는 해봤으면서 왜 그런 표정일까.

“오빠! 제가 할까요?!”

진이가 눈을 빛내며 손을 든다.

“넌 저기 구석에 가서 앉아 있어. 심심하면 자위라도 하고 있든가.”

“힝.”

턱짓으로 돌려보내자 진이는 사고 친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세아 씨도 하기 싫으면 돌아가셔도 돼요.”

아직도 머뭇거리는 세아 씨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내가 세아 씨에게만 유치하게 군다는 자각은 있다.

내가 아이돌 한세아의 팬이라서?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하는 짓은 똑같으면서, 혼자만 깨끗한 척한다는 게 제일 역겨웠다.

키스는 안 한다든가, 펠라치오는 거북하다든가.

진심으로 좋아해서 사귀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 그 사람만 바라보고 살면 된다.

아이돌도 사람이니까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지. 누가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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