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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22화 (2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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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지쳐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창밖이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아. 분명 아까 그 상태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은데, 어느새 소희는 슬립 드레스가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입술도 연고가 발렸었는지 씁쓸한 약내가 났다. 여기저기 끈적이는 정액과 애액으로 뒤덮였던 몸 또한 찝찝하지 않고 깨끗한 게 아마도 그가 수건으로….

싫어.

지겸이 다시 자신을 만졌을 걸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음식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둘러보니 탁자 위 은 트레이에 음식이 담긴 듯한 사기그릇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흰 죽이었다.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먹어. 혹시 너무 식었으면 얘기해 줘. 다시 데워달라고 할게.]

배는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겸의 쪽지를 박박 찢어 버렸다.

그때 침실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위트룸은 별도의 침실과 서재, 거실, 미니바로 이뤄져 있었다. 아무래도 지겸이 거실에서 통화 중인 것 같았다. 누구와 통화 중인 거지. 소희가 문에 살짝 귀를 대어봤더니 간간이 통화내용이 들렸다.

“아니요, 아버지. 제가 분명 여러 차례 말씀드렸…. 무시하신 건 아버지였죠. 아니요.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네. 했어요. 각인, 했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대화 내용으로 보아하니 그는 구 회장, 자신의 아버지와 통화 중인 것 같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치고 너무나 사무적으로 들렸다. 싸우는 듯 거센 음성이 계속 오갔다.

“퀵으로 도착한 서류 먼저 검토해 보시고, 연락 주시죠. 그리고 참고로 같은 서류, 유현이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그 신유현이요. 그러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아는 이름이 나오자 소희가 흠칫 놀랐다. 유현 오빠라면 유정의 오빠 얘긴가?

유정이…. 그녀를 생각하자 소희의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 유정이는 분명 지겸 오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했다. 그에겐 요일마다 여자가 있고, 그녀가 아기를 가진 것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그, 그런 남자와 며칠 동안 수없이 관계를 맺었다. 게다가 그는 소희에게 각인했다. 그뿐 아니라 노팅까지….

“욱, 우욱.”

순간 참을 수 없는 헛구역질이 몰려와 소희는 침실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결국 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해냈다.

보통 가임기의 베타 여성이 배란일에 맞춰 베타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임신 확률은 30%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오메가 여성이 발정기에 알파 남성과 관계를 맺고 알파가 노팅까지 했을 경우 임신 확률은 50%. 심지어 그 오메가와 알파가 우성일 경우, 임신 확률은 거의 70%에 육박한다는 연구 결과를 본 기억이 났다.

“말도 안 돼.”

구지겸, 그 남자는 소희 몸속에 노팅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했다. 그냥 사정도 족히 열 번은 넘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물세수로 열기를 달랜 소희가 거울 속에 제 얼굴을 비춰봤다. 눈은 퉁퉁 붓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 목엔 아직도 지겸이 각인한 자국이 흐리게 남아 있었다. 그가 생각날 때마다 직접 연고를 발라줘서 그런가. 이젠 쓰라리지도 않았고 상처도 없었다. 섹스할 때의 그는 거칠고 집요하고 짓궂었지만 그럼에도 지극히 다정했다. 목덜미의 상처를 신경 쓰고 아래가 심하게 붓진 않았는지 계속 확인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속삭이고 그녀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 달콤한 키스를 퍼붓곤 했다.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이렇게나 가슴 뻐근한 충만감을 준다는 것을 소희는 처음 알았다. 이렇게 그와 평생을 살아간다면 참 좋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함께 여행 온 지훈이 평상시의 그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소희도 눈치채고 있었다. 느껴지는 페로몬도 많이 달랐음은 물론이다. 바보같이 속고 말았다. 그 순간이 주는 행복이 너무 달콤해서.

‘허상이었어. 거짓말이었어. 그는 날 속였고.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속았어.’

거울을 노려보며 소희가 입 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배신감.

우습게도 소희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그가 지훈이 아니라 지겸인 것을 알았을 때 처음 느꼈던 것은 배신감이었다. 분노도 원망도 아닌,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고 내팽개쳐진 것 같은 기분.

그 사람을 얼마나 알았다고, 얼마나 믿었다고 그런 감정이 먼저 고개를 쳐들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첫 경험이 그리 대단한 거였을까. 각인의 영향일까. 다정한 밀어와 격정적인 섹스 몇 번에 몸과 마음을 온통 줘버렸던 것 같아서. 그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그녀를 더 괴롭혔다.

한국에 있을 가족들과 유정을 떠올렸다. 아까 지훈과의 통화로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겠지. 결혼식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자신이 약혼자의 쌍둥이 동생과 함께 있다는 걸 모두 어떻게 받아들일까.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우선은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이 방을 나가자. 그런 다음에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도움을 청하자. 결심한 그녀는 자신이 지겸에게 왔을 때 가지고 온 작은 백을 떠올렸다. 그 안에 자신의 룸 키와 지갑이 있었다. 그건 어디 있지?

화장실에서 나와 침실을 둘러보니 다행히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그녀의 가방이 보였다. 안을 열어보니 지갑은 보이지 않고, 카드키만 들어 있었다. 그래, 지갑은 방에 두고 왔을 수도 있다. 그 날 소희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히트 사이클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기억을 잘 못 하는 걸 수도. 방에만 돌아가면 혹시 지갑이 없더라도 여행용 트렁크에 현금이 있으니, 그걸로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소희가 침실 문을 빼꼼 열어 밖을 살폈다. 서재 안쪽에서 그녀가 있는 방 쪽을 등진 채 여전히 통화 중인 지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응. 고마워. 그래. 아마 좀 더 있을… 몇 주 정….”

지겸은 통화에 집중 중이라 다행히 뒤에서 나는 소음은 미처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희는 발꿈치를 들고 최대한 조심해서 스위트룸을 빠져나왔다.

***

방으로 돌아와 급하게 찾아보았지만 지갑도, 여권도 없었다. 지갑은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아 가물가물했지만, 여권은 확실히 이 파우치 안에 뒀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했다. 통화는 벌써 끝났을 수도 있다. 지겸은 소희가 없어졌다는 걸 금방 눈치챌 거다.

다행히 비상금 봉투는 트렁크 안에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여권 카피본도 가지고 왔으니, 영사권에서 여권 분실 신고를 하면 되지 않을까. 일단은 이 호텔을 빠져나가는 게 중요했다.

소희는 후들거리는 몸으로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트렁크를 챙겨 문을 나섰다. 일부러 그의 룸이 있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희야…!”

아, 그였다. 구지겸. 복도 반대쪽에서 그녀를 향해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소희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갔다. 트렁크를 끌고 내달렸지만 너무 무거워 속도가 더뎌졌다. 결국 소희는 비상금봉투가 든 가방만 들고 뛰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엘리베이터가 그녀의 층에 서 있었다. 얼른 타고 로비 층을 눌렀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코앞까지 그녀를 쫓아왔지만 닫힘 버튼을 거듭 누르자,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꼭 터질 것만 같아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번이나 가슴께를 손으로 쓰다듬어 내렸다.

로비에 도착한 소희는 일단 서쪽 게이트에 택시 타는 쪽으로 뛰어갔다. 다만 이미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거기 서 있다간 곧 지겸이 따라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건너편에 지하철역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소희는 옆 사람에게 길을 물은 뒤 곧장 지하철역 방향으로 달렸다.

쏴아아아. 아. 하늘이 조금 흐린 것 같더니, 비가 오려고 그랬었나 보다. 마치 하늘이 뚫린 듯이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12월이 우기라고 했었지. 여기 온 이후로 매일 한두 차례씩 비가 쏟아지던 게 떠올랐다.

소희는 비를 맞으며 계속 뛰었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가 심장이 조금씩 뻐근해지며 조여들었다. 아, 아파. 소희가 길 중간에 우뚝 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양옆으로 몇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커다란 고목이 늘어서 초록이 가득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싱가포르는 신기한 곳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 숲 옆에 그보다 큰 나무들이 어우러진다. 흐리고, 축축하고, 온통 푸르렀다. 12월인데 이곳은 아직도 완연한 여름이다.

엉엉 울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래서 더 슬퍼졌다. 결혼을 앞두고 왔던 휴가였다. 달콤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으나,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오늘 아침까지. 매 순간이 너무 설렜다. 그녀를 한순간도 놓아주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의 그 뜨거운 품이 좋았다. 이곳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비가 오는지 햇볕이 화창한지도, 지금이 12월인지도, 그래서 곧 결혼식인지도. 소희가 그 모든 것을 상관하지 않고 있었을 정도로 그 남자와 함께라 행복, 했었다.

꿈을 꿨던 걸까. 단지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 바라는 건 그거 하나였을 뿐인데.

몸을 두드리는 빗물에 몸이 아플 정도로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이상하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빠른 심장박동 때문인지. 며칠을 무리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임소희!”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겠지, 구지겸. 소희는 다급한 외침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절박해서 조금은 뒤돌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것은 망쳐졌다.

이제 소희는 신랑 없는 신부, 알파 없는 오메가가 되었다.

깜빡깜빡. 눈앞이 점멸한다. 소희의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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