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0)

콧소리가 절로 나온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몸을 쳐다봤다. 흔히들 말하는 근육돼지는 아니더라도 배가 뽈록 튀어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마른정도?

178cm의 평균 이상의 키에 65kg의 몸무게. 어디가서 기죽을만한 몸은 아닌것같다.

남자의 심벌에도 자신감이 있다. 친구들 끼리 목욕탕을 갔었지만 나보다 큰 녀석은 못봤다.

샤워를 끝낸 나는 구석구석 물기를 제거했다. 면도까지 깔끔하게 마친 나는 옷까지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음, 이정도면 생긴것 같긴 하군.

지금 시각 여섯시 이십분. 이제 슬슬 연락이 올때가 됐는데...

막상 준비를 다했지만 진용에게 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티비를 켜놓고 기다리고 있자 드디어 연락이 왔다.

일곱시 까지라.

위치는 나도 몇번 가본곳이다. 이곳에서 이십분 가량 떨어진 곳으로 호프집이다.

누나에게 연락을 할까. 라고 잠깐 고민했지만 안하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집에 올것같으니.

티비를 끄고 시계를 찬 뒤 지갑과 열쇠를 챙겼다.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더라?

지갑을 열어보니 이만원이 전부다. 집에 돈이 있던가? 이리저리 뒤져봤지만 잔돈 몇푼이 나올뿐.

나가는 길에 돈이나 뽑아가야겠다.

집을 나선 나는 오분거리에 있는 은행으로 향했다. 한 오만원만 더 뽑아야겠다 생각한 나는 들뜬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있을지도 모를 이상야릇한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상상에 뼈가되고 살이붙기 시작하니 그 상상은 음란하게 변질되었다.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모텔비 까지 뽑아가야하나 생각까지 했다가 너무 오버하는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그러한 일이 벌여진다면 카드로 긁어야 하나? 아니 누나가 보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할 수 없을것이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오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의 일까지 생각하고 있는 날 보니 나도 속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도 음란한 생각에 정신팔린 나를 깨워준것은 다름아닌 한 여자였다.

퍽!

"앗."

"어."

충돌한 어깨. 누군가 했더니 여자다. 그것도 꽤 예쁜. 아니 많이 예쁘다. 나보다 동갑이거나 어려보이는 인상인데 제법 놀아본 티가난다.

섹시하다면 섹시한 눈매. 표독스러워 보이는 표정. 이 정도면 남자들이 제법 따를만도 보였다.

"사과안해요?"

"네?"

뭔 소리지?

"사과하라구요. 그쪽이 부딪혔잖아요."

화가 잔뜩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는데 그 모습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나는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웠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지?

"아니 그쪽도 한눈팔다가 저랑 부딪힌것 같은데요."

"아닌데요?"

순간 할말을 잊었다. 저렇게 당당하게 아니라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하란말인지. 하지만 여기서 당황할 내가 아니다.

"아 그렇다 칩시다. 근데 제가 가만히 서 있는 그쪽한데 가서 박은것도 아니고 스쳐지나가다가 박은건데 이런상황엔 서로 사과하고 끝내면 되는데 왜 저만사과를 해야하는게 정상 아닌가요?"

이게 놀아본 애들의 특징이다. 모든것이 자기중심적 사고다. 나는 이러한 사고가 매우 맘에안든다. 진짜 부모에게 못배워 먹은 티가 난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나는 식당같은데서 어린 꼬마아이가 설치고 다니는데 부모가 방관하는 꼴을 보면 화가 난다.

그런 부모가 아이를 자기중심적이게 만들고 그게 커서도 이어지는거겠지.

이 여자도 그러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지금 표정에 잔뜩 불만이 쌓인게 여차하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다. 참자는 표정. 세상에 자기가 뭘 잘했다고.

"가세요."

"네?"

"가라구요."

"...."

순간 당황한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여자가 짜증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씨발. 내가 간다 내가 가."

여자는 나를 한번 쏘아보더니 이내 제갈길을 가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뭐 저런여자가 다 있지? 나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시계를 확인하고 난 뒤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ATM기기에 도착한 나는 오만원을 뽑았다. 오만원을 뽑고 몇걸음 앞에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이동. 약속장소에 약속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섯명이 모여 있었다. 그중 네명은 내가 익히 알고있는 얼굴이였고 나머지 둘은 처음보는 얼굴이였다.

"아 인하야 왔냐. 니가 꼴지다."

나를 가장 발견한건 진용이였다. 진용이 날 발견하자 손을 흔들어줬다.

"뭐? 약속시간에 딱 맞춰왔는데?"

진용은 내가 앉으라고 자리를 내줬다. 이게 우연인지, 아니면 녀석의 농간이지는 모르겠는데 내 옆에는 한서희가 앉아있었다.

"아, 여기는 한서희랑 조윤정. 여기는 이인하. 서로 대충 얼굴들은 알지?"

어느정도 안면이 있어 몇번 본듯한 여자아이의 소개를 받은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인사를 했다.

한서희는 나에 대해서 아예 존재자체를 모를것만 같았는데 그게 아니였다. 물론 나는 유명인사인 한서희를 몰라볼 이유가 없었다.

"아, 응. 안녕."

"안녕."

"안녕~"

윤정같은 경우엔 서희보다 활발해 보였다. 나쁘게 말하면 헤프게 보인다고 해야할까. 남자가 많아보인다는게 첫인상이였다.

서희와 윤정을 제외한 나머지 애들에게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너희 누나 뒷바라지 한다고 고생이 많다 정말."

진용은 내 사정을 알고있는 몇안되는 사람 중 한명이였다.

"그게 무슨소리야?"

관심을 보인것은 서희였다.

"얘 누나가 임용고시 보는데 뒷바라지를 얘가한다."

서희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에 집안일을 떠벌리는것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 둘 다 외국에 계시거든.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누나 도와주는거고. 뒷바라지 정도는 아니야."

사실 아니라곤 했지만 뒷바라지가 따로없다.

누나는 새벽에 공부가 더 잘된다며 밤늦게 까지 공부하다가 늦게 일어나는 타입이였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했고 누나를 깨워 같이 식사를 하거나 한 뒤 나는 학교로, 누나는 침대로. 이러한 패턴이였다.

누나가 대학생활을 할때는 나보다 일찍나가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아침을 거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나나 나나 밖에서 떼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을때는 누나가 밥을 해먹질 않으니 내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와, 되게 가정적인 남자네?"

윤정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가정적인 남자는 아니고. 그냥 누나보다 요리잘하고 청소잘하고 빨래잘하고. 그것밖에 없어."

사실 이게 정답이다. 내가 가정적이기 보다는 나는 평범한데 누나가 가정적이지 못한거다.

윤정이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서희 이상형이 딱 그런 남잔데."

착각인지 몰라도 서희의 얼굴이 달아오른것 처럼 보였다.

"이상한 소리하지마."

"맞잖아. 입에 달고다니면서 내숭은."

딱히 할말이 없어서 태연한 척 표정을 유지했지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꿈틀꿈틀 거리는게 느껴졌다.

그 때 안주와 맥주가 한가득 테이블을 채웠다. 아,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는데 빈속에 먹는게 치맥이라니.

왁자지껄한 호프집 안에서 우리는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이미지 게임하자 이미지게임."

술기운과 분위기에 휩쓸린 친구 하나가 흥분한듯 말했다.

"좋지. 하자하자."

진용을 비롯한 다른애들도 좋다며 동조했고 나 역시 재미있을것 같았다.

"음. 시게방향으로 오케이?"

"시작해 얼른."

처음으로 지목된 여자아이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제일 동성한데 인기가 많을것 같은사람."

이건 다분히 누군가를 향한 질문이였다. 역시나 서희의 몰표에 서희의 표정이 울상이되었다.

"아 나 맥주 맛없는데."

그 때 진용이 옆에서 외쳤다.

"흑기사! 흑기사!"

흑기사로 여론을 몰고가자 나와 서희를 제외한 모두가 흑기사를 외쳐댔다. 왠지 대략의 시나리오가 내 눈앞에 그려지자 나는 거기에 동조하며 외칠수가 없었다.

"흑기사 해도되?"

그,그걸 왜 나한데 묻니?

"해도 되. 자, 얼짱 한서희의 흑기사는 누구?"

두구두구! 테이블을 치며 난리를 부리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난 인하 흑기사 쓸래."

"이야~ 이인하. 출세했다 출세했어!"

모두들 과도한 리액션을 취하며 흥분한 듯 소리쳤다.

"안해줄거야?"

"안해주면 두잔!"

진용이 손가락 두개를 펼치며 소리쳤다.

어떻게 거절하리오. 나는 쿨한척 받아들였다.

"누가 안한대? 줘 서희야."

나는 맥주를 잡아들도 한숨에 들이켰다. 목을 톡톡쓰며 맥주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 배가 터질것같아.

"자, 그럼 내차례!"

이번엔 진용의 차례였다.

"여기서.. 음... 가장 착할것 같은 친구는?"

하나 둘 셋!

나는 서희를, 나를 제외한 모두는 나를 꼽았다.

뭐야 이거! 사기잖아! 대놓고 엿먹이는거 아냐?

"뭐야 이거 짠거아냐? 그리고 나 안착해!"

내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항의한다고 번복될 일도 없었지만.

"짠거아냐. 그러니까 마셔라1 마셔라!"

아, 진짜 배 터질것 같은데. 나는 억지로 꿀떡꿀떡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의 특성상 술은 취하지않는데 배가 터질것만 같다. 이번엔 한숨에 다 마시진 못하고 몇번에 나누어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이 윤정의 차례였다.

"여기서 제일 이성친구가 많을것 같은 친구!"

진용의 표정이 흠칫하고 굳어졌다.

"하나 둘 셋!"

이번엔 네표로 진용이 나머지 세표는 다른 여자애가 선택되었고 당첨된 진용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나 여자애들 잘 몰라!"

푸훕. 퍽이나.

이번엔 내가 직접 술잔을 내밀어주었다. 진용은 겉보기와 달리 술을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라 얼굴이 어느정도 붉어져 있었다.

진용은 꿀꺽 침을 삼키더니 냅다 맥주를 들이켰다.

"으아아 죽겠다."

"자 이젠 서희차례!"

서희의 차례로 돌아갔다. 서희는 이런 자리에 익숙치 않은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역시나 무슨 주제를 꺼낼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여기서 제일 바람기가 많을것 같은 사람은?"

"안돼에!"

진용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진행. 진용은 또 한번의 맥주를 들이키게 되었다.

이번엔 내 차례. 나는 무슨질문을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첫인상이 제일 좋았던 사람은?"

"하나 둘 셋!"

내가 두표 서희가 세표 진용이 한표 다른 남자애가 한표.

근데 여기서 중요한점은 서희가 나를. 내가 서희를 지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식으로 얼굴을 마주한건 오늘이 처음이였다.

다른녀석들은 서희가 걸렸다는게 중요한지 별 신경 안쓰는듯 보였다. 왠지 나만 신경쓰는것 같았다. 서희는 무슨 생각을 했으려나?

"서희야 흑기사 한번 더?"

다른 남자의 말에 서희는 아무말 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그 사이에 서희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웃고 떠들다 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그 이후에 나도 몇잔의 술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취기가 적당히 달아오르자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다. 정말 오랜만에 크게 웃고 떠들었다.

안타깝게도 서희와는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없었다. 딱히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무슨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힐끔힐끔 서희를 쳐다보았지만 눈이 마주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서희가 정말 내게 관심이 있긴 한걸까?

"야, 이제 여기 정리하고 노래방가자."

"노래방?"

아쉽게도 나는 노래를 잘부르지 못한다. 진용이 녀석이 노래를 꽤 잘부르는데 노래부르는 것을 꽤 좋아해서 같이 놀다보니 노래방 갈일이 많았다.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으려고?"

뭐 그건 아니긴 하지만...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일어난 나는 계산을 위해 돈을 건냈다.

호프집을 나온 우리는 근처에 있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여자애 중 한명이 살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모~"

그 여자애가 그곳 단골이라 주인과 친하다며 이곳으로 오자했는데 그게 사실인것 같았다. 뭐 딱히 학생이 노래방 주인과 친한게 딱히 자랑도 아닐텐데.

안내를 받아 룸안으로 들어가서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술에 취할대로 취한지라 분위기는 띄울필요도 없이 서로서로 마이크를 잡겠다고 난리를 피우는것을 구경했다.

나야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 구경만 하다가 중간중간에 몇곡만 부를 생각이였다.

서희도 노래부르는 것을 그다지 안좋아 하는듯 나와같이 멀찍히 앉아서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다.

가서 말이라도 붙혀볼까 했지만 반대편 자리에 앉았는데 굳이 옆까지 가서 말걸면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 관뒀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주인모를 비타민 워터를 입을 대고 한모금을 들이킨 뒤 의자에 몸을 묻었다.

비타민 워터가 여자꺼면 어때? 별 문제될것도 아닌데.

핸드폰을 열어 누나에게 연락온게 있나 확인해보니 없다. 오늘 안들어올 생각인가.

"인하야 너도 노래좀 불러봐."

윤정이 내게 리모컨을 떠밀며 제촉하자 썩 내키진 않았지만 노래를 예약했다.

우와아아악!

비명소리 섞인 노래에 웃음만 나온다. 노래방에서 저렇게 소리질러보지 언제 질러보겠어.

담배와 술냄새가 가득섞인 룸안. 공기가 탁한게 불쾌하기만 하다.

진짜 담배피는 애들이 이해가 안되는데 왜 피는건지 알 수가 없다. 인생이 힘든가? 내가 보기엔 천하태평한게 신선놀음이 따로없는것 같더만.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고있는 여자애에게 닿았다. 그 여자애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애가 담배갑을 흔들며 필래? 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술 정도야 친구들끼리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거지만 담배는 아닌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하는 사이에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나는 뻘쭘하게 마이크를 쥐어잡았다.

아 쪽팔리네 진짜.

보이진 않지만 틀림없이 억지스러워 보일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불렀다.

잔잔한 발라드를 좋아하는 나는 분위기에 맞지않는 노래를 불렀지만 반응이 나쁜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열된 분위기를 적당히 냉각시켜주는 정도?

내심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것 같아 다행이다.

노래를 다 부르고 만족스럽게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노래 잘부르네?"

누군가 해서 봤더니 서희였다.

"잘 못부르는거야. 노래는 진용이가 잘불러."

"아, 걔도 좀 잘부르더라."

노래로는 비교가 안되지.

노래를 불렀더니 갈증이 나길래 아까 마셨던 비타민워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누구꺼야?"

"아, 그거 내껀데?"

입대고 마셨는데... 하마터면 입밖으로 낼뻔한 소리를 눌러담으며 말했다.

"좀 마셔도 되?"

아까는 주인모르고 마셨다지만 주인 눈앞에서 아무말없이 까먹을 만큼 철판도 아니여서 물었더니 서희가 맘껏 마시라고 대답해줬다.

차마 이번에는 입을 대고 마시지 못하고 떼고 마셨다. 아, 그렇게 되면 간접키스가 되는건가?

유치하기 짝이없는 생각을 하며 물을 삼켰다.

쿵쾅쿵쾅!

바운스 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린다. 아. 갑자기 속이 확 뒤집어지네.

담배냄새와 술냄새. 시끄러운 바운스 소리와 어지러운 비러볼.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낼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열었다. 다들 노느라 정신도 없겠지.

문을 열자 비교적 깨끗한 공기가 느껴진다. 하아. 노래방 공기가 달콤하게 느껴질 줄이야.

바깥공기를 쐐고싶어서 노래방 밖으로 나가니 얼어붙을것만 같은 찬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이제야 좀 속이 진정되는 느낌이구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서희였다.

"여기서 뭐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서희.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아, 안이 좀 답답해서."

"나도 그래. 담배냄새하고 섞여가지고 답답하더라."

서희도 거북한건 매한가지였나보다.

"저기, 추운데 따뜻한거 마실래?"

잘못들은게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어?"

"따뜻한거 마시고 싶어서. 갈래?"

여기서 거절하면 남자가 아닐거다.

"그러자. 저기 편의점이 있네."

바로 근처에 편의점이 보이길래 그곳을 턱짓하며 말했다.

우리둘은 나란히 서서 편의점을 향했다. 15m 가량을 걸어가며 무슨말을 꺼낼까 고민하다가 정신차리고 보니 편의점 앞이였다.

딸랑 딸랑!

편의점을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음료코너 근처에 가서 온장기 안에 커피를 꺼냈다.

"아, 내것도 꺼내줘?"

"응."

나머지 서희것도 꺼낸 나는 자기가 사겠다는 서희를 뒤로하고 내 돈으로 계산했다. 이런거 정도는 내가 해야지 점수를 따지.

나와 서희는 편의점 내에 배치되어 있는 테이블에 가서 마주앉았다.

아, 이제 무슨얘기를 한담? 딱히 할 얘기가 없는데.

"여긴 되게 따뜻하네."

다행히 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이런날엔 집구석에 박혀서 이불덮고 있는게 최곤데."

커피를 만지작 거리며 온기를 느끼면서 서희가 대답했다.

"근데 넌 이런날에도 축구 잘만하던데?"

"응?"

"수요일 4교시. 너희반 체육이잖아?"

뭐야. 그런것 까지 알고 있었어? 순간 당황한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건 분명히 술기운일거야.

"우리 수요일 4교시가 윤리시간이거든. 내 자리가 창가자리인데 그 시간에 자주 밖을 쳐다봐."

"...."

"그러면 축구하고 있는 너희반이 보인다? 그리고 그 중에 네가 제일 빛나. 제일 잘하는것 같애."

네가 제일 빛난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하... 창피하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깐 나는 그것을 한모금 들이켰다. 그 때 서희가 정말 끔직하게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축구 되게 잘하더라?"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 달콤한 느낌을 방해받기 싫었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어. 음. 인하 넌 어때?"

"응?"

"날 알고는 있었어?"

"음... 그야 물론 알고는 있었지."

그 미모에 대한 풍문이 자자한데 같은 학교는 내가 어찌 모를까.

"정말?"

"응. 정말."

서희 자신에 대해서 가장 무지한 사람이 자기 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에 길에서 너 본거 알아?"

"응?"

왜 몰랐을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서희를 본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희를 봤다면 바로바로 기억에 떠올랐겠지만..

"한 이주전이였나. 길거릴 지나가는데 되게 예쁜 여자랑 같이 우산쓰고 지나가더라고... 여자친구야?"

되게 예쁜여자라... 내 주위에 그런사람이 없는데... 나는 반신반의 하며 물었다.

"글쎄? 나 제대로 본거 맞아? 여자친구는 없고 되게 우산을 같이 쓸만큼 친하고 되게 예쁜여자도 없는것 같은데."

"아냐아냐. 너는 그 여자분이랑 대화한다고 날 못봤을지는 몰라도 나는 똑똑히 봤는걸. 나이도 좀 있어보이던데."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주전에 비가 왔었나...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

"...?"

"기억났어."

나랑 우산을 같이 쓸 정도로 친한 여자. 그리고 되게 예쁜여자. 게다가 나이도 좀 있다.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은 단 한명이다.

"그거 우리 누나야."

"뭐?"

뜻밖의 대답이라는 듯 되묻는 그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누나라고 그 여자. 이주전에 베스킨 라빈스 먹고싶다며 집에있는 날 비오는 날씨에 억지로 끌고갔던 기억이 나네. 아마도 그때 본거일걸?"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서희. 뭔가 생각하는듯한 눈치였다.

그 때 서희가 막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아, 근데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음. 생각해보니까 좀 그렇긴 하다. 갑자기 둘만 쏙 하고 사라졌으니.

"그러게. 걱정은 안할테지만..."

의심은 하겠지.

우우웅!

그 때 지갑과 함께 겹쳐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었다. 지속적으로 울리는 것을 보아 전화인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