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왔다. 장례식 동안 청소를 하지 못해서 인지 먼지가 수북하다.
거실 가운데에 멈칫섰다. 몇일전의 일인데도 수화기 속의 그 말은 내 심장을 다시한번 관통했다.
“안타깝습니다. 가족분들 께서…….”
“아……아아아!”
목이 메여온다. 이 고통. 이 분노. 이 슬픔. 머릿속이 천둥이 울리는것 처럼 쾅쾅 울린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전신거울을 깨어부수고 티비를 넘어뜨렸다. 분이 풀리지 않자 내방으로 가 컴퓨터는 물론 책상 위 스탠드 까지 박살내어 버렸다.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것만 같기에.
힘이 빠지자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침대위에 몸을 묻었다. 그제서야 주먹으로부터 찌르르 고통이 느껴졌다.
이대로. 세상이 끝나버렸으면.
눈하얀세상. 온통 하얀 세상이다.
누가 날 이런 방에다가 옮겨다 놓았는지. 문을 찾기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문이라고 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발견한 것은.
나무 한 그루.
“....?”
이 비현실적인 공간은 대체 어디일까. 하얀방에 덩그러니 놓여진 나무.
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과나무인가?
새빨간게 식욕을 자극하는 듯 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그런지 선뜻 손이가지 않았다.
나무를 중심으로 한바퀴 빙글 돌아보았다.
善惡果
나무앞에 박혀있는 팻말. 기본적인 한자 실력은 되는지라 자연스럽게 읽어내렸다.
“선악과.”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모든건 아담과 이브에게 주었지만 단 하나 주어지지 않은 것.
선악과.
어째서 선악과가 내 앞에 나타났는가.
아니 이제 내가 아는 선악과가 맞긴 맞는것인가.
팻말을 다시 내려다 보았을 때. 팻말의 내용은 선악과가 아닌 다른내용이 적혀있었다.
되돌리고 싶거늘 먹어라.
되돌리고 싶다?
되돌리고 싶다.
되돌리고 싶다!
팻말에 적힌 문구가 점점 옅어지더니 다른 문구가 새겨지듯 나타났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먹어라.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또 다시 팻말의 내용이 바뀌었다.
너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되돌릴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기적이게 행동할테니.
손을 뻗었다. 뚝! 하고 선악과를 땄다.
티끝하나 없는 새빨간 열매.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댄 나는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댔다.
세상엔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당신에게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눈을 떳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이끌고 거실로 기어나왔다.
"와서 밥먹어."
"밥?"
놀란 나머지 되묻자 누나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해갔다. '뭐 새삼스럽게 그러냐'는듯한 표정이였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평소에 요리에 관심없다며 도맡아 하던 아침준비를 누나가 할 줄아야. 누나가 요리를 아예 못하는건 아니지만 요리폭이 굉장히 좁다. 역시나 아침은 계란에 콩나물국이다.
"내가 밥 내놓으라고 너 깨울려다가 너무 잘자길래 냅뒀다 고맙지?"
"고맙네요."
누나의 말에 대답을 한 나는 식탁에 앉았다. 과일을 깎는 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내 코끝이 찡 하고 아려오더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
뭐지? 당황한 나는 재빨리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과일을 다 깎은 누나는 몸을 돌려 그릇을 식탁위에 올려놓다가 내 눈을 보더니 놀란듯 물었다.
"너 왜그래? 왜 울어?"
"운거 아냐."
내 대답에 누나가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다큰 사내놈이... 어디 땀이라고 하시지?"
"운거 아니라니까."
창피한 나머지 말을 돌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누나가 왠일로 나보다 일찍 일어났대?"
"그런일이 있어 후후."
뭐지? 의아했지만 더 묻기도 뭐하고 해서 더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침겸 점심을 먹은 나는 쇼파에 누워 티비 채널을 돌렸다. 역시나 주말엔 볼게 없긴 없구나.
의미없이 티비채널만 휘휘 돌리는데 누나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외출하는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느낌이다. 기합이 더 들어갔다고 해야할까.
"어디가?"
"아, 응. 오늘 약속있어서."
약속이라... 뭐 한동안 임용고시 때문에 방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는것 보도 안타까웠는데 막상 합격하고 팽팽 쏘다니는거 보니 좀 그렇긴 하네.
"늦게와?"
내 물음에 누나는 나를 쳐다도 보지도 않고 화장을 하며 대답했다.
"몰라. 돈 있지? 밥은 그걸로 사먹던가 해."
물론 돈은 있다. 근데 중요한건 그게아니다. 대답을 회피하며 넘어가려는게 묘하게 짜증이 났다.
"안들어올려고?"
누나의 얼굴엔 귀찮은 기색이 짙어지며 화장하는 것을 멈추고 나를보며 대답했다.
"모른다니까. 안들어와도 먼저 자."
누나의 반응에 나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동생으로써 걱정해주는건데 그게 귀찮다는 듯 받아드리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누나 남편도 아닌데 왜 기다려. 그리고 외박은 하지마라."
내가 세살베기 꼬마도 아니고 누나가 대놓고 외박하겠다는데 좋다고 할수도 없다. 동생으로써 누나의 문란한 생활이 달가울리가 없었다.
설사 지금 남자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다 하더라도 요즘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여자혼자 밤늦게 방치한단 말인가?
부모님이 집에 없는 이상 나라도 신경써야겠다는 생각에 던진 말이지만 누나의 대답이 가관이였다.
"내가 니 마누라도 아닌데 왜 간섭이야."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나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금같은 주말에 열내면서 시작할 필요는 없지. 저런 반응이라면 내가 백날 떠들어 봐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것이 뻔한데 왜 입아프게 말을 해야할까.
"맘대로 해. 대신 술에 찌려서 나한데 데리러 오라고는 하지마라."
"안해."
"웃기고 있네."
그런적이 한두번인가.
누나는 예쁘다. 그것도 정말로 예쁘다.
누나는 어렸을 적 부터 인기가 많았다.
누나는 나보다 일곱살이나 많다. 열살 전에 누나에 대한 기억은 잘 없지만 그 이후에 기억에 따르면 누나는 인기가 엄청 많았다.
고등학교 때 였을꺼다. 어떤 남학생이 우리집 앞까지 찾아와 누나한데 프로포즈를 했다. 근데 아쉽게도 보기좋게 차였다. 어느날엔 아파트 주차장에서 촛불켜놓고 (지금 생각해보면 가관이다) 수연아 사랑해! 나의 사랑을 받아줘! 라며 공개 구애를 했지만 누나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외에도 빼빼로데이나 화이트 데이 때 정말 어마어마하게 받았다. 어렸을 때 나는 아무생각도 없이 좋다고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기립박수를 쳐주고싶을 정도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머리가 어느정도 커지자 누나에 대한 걱정이 솟아났다. 이성에 대해 눈을 뜬 나는 누나같은 미인 주위엔 언제나 남자가 득시글 거린다는것을 알아버렸고 그 남자는 모조리 늑대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남자친구도 두명정도 있었다. 남자친구라면 섹스를 하는것 쯤은 속이 쓰리지만 당연하다는것도 알았고 남자친구도 아닌것들이 달라붙는 경우를 나는 수차례 봐왔다.
술먹이고 어떻게 개수작을 부리려 했지만 다행히 누나는 그전에 집에 전화를 해서 데리러 오라고 했고 그 때 마다 나가서 누나를 인수하는것은 나였다. 내가 또래에 비해 체격이 좋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조달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누나가 술에 취해도 자기 몸 간수하나는 끝내주게 잘했다. 이것도 자기관리의 일부분인데 의식과 무의식 경계에 섰을 때 제일먼저 하는일이 내게 전화하는 일이였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전화를 한 뒤에 쓰러졌다.
그런 생활이 수년째다 보니 지긋지긋하다.
"진짜 이번에도 그러면 길바닥에 갖다버릴테니까."
"베에."
혀를 내미는 누나. 어휴 한숨을 내쉬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전원을 올린 뒤 생각했다.
저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교편을 잡은 누나 아래 배우게 될 학생은 무슨 죄인가.
뭐 이러니 저러니해도 좋아죽겠지. 내가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잘 안다. 저 정도 외모라면 그 여파가 어마어마할테다. 여고에 발령받는다 해도 말이지.
누나는 한참이나 옷에 시간을 투자했다. 이리저리 옷을 맞춰보더니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저,저 지금이 어느땐데 저렇게 입고 나가? 저러다 감기걸릴라.
컴퓨터를 하는척 했지만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있는 전신거울에 몸을 비춰보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눈요기가 되는건 확실하다. 확실히 옷 맵시가 좋단말이지.
누나는 어디로 부터 걸려온 전화에 핸드폰으로 총총걸음으로 뛰어갔다. 대체 누구길래 저런반응을 보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아, 준비 다 끝났어요. 곧 내려갈게요."
존댓말이다. 친구 상대로 존댓말을 할리는 없으니 친구는 아닐테고 목소리에 위화감이 잔뜩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남자인것 같다.
어휴 저 내숭.
남자면서 친구는 아니다. 남자친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존댓말인걸 봐서는 남자친구도 아닌것같다.
뭐 워낙에 인기가 많다보니 주위에 남자가 많고 그 중 한명이겠지. 남의 연애사에 내가 관심을 둬서 뭐하겠어?
"인하야, 누나 갔다올께! 집 잘보고 있어. 뭐 먹고싶은거 있어?"
"늦게 들어온다며. 그냥 들어와."
"늦게 들어온단 소리는 안했다!"
"퍽이나."
내 대답이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도어락이 열리고 문이 닫기는 소리까지 순식간에 들려왔다.
"에휴."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에서 일어나 누나의 방에 들어갔다.
화장대 위에 뒹굴고 있는 헤어 드라이거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침대위에 널부러져 있는 옷들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속옷들을 한데에 모아 뭉쳤다.
여자란 족속들은 참으로 요망하다. 밖에선 그렇게 깨끗한척 다하지만 정작 집안에서는 이모양 이꼴이다. 뭐 티비에서 보니까 공중화장실에서도 변기에다가 휴지를 깐다지?
집에서나 잘할것이지.
제법 도발적인 색의 브래지어지는 내게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한다. 피가 섞인 누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면역이 된 탓이겠지.
이 빨랫거리를 세탁기 안에 쑤셔박고 이불정리 부터 시작했다. 입다가 안맞는지 정체성을 잃은 옷들역시 깨끗하게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걸어놨다.
이상하게도 집안일은 내가 누나보다 훨씬 나았다. 누나가 대입을 하고 엄마가 아빠를 따라 외국으로 날라가버린 뒤 단 둘이 살게되었을 때 부터 집안일은 내가 거의 도맡아 했다.
사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누나가 이제 대학생이다 보니 어느정도 집안살림을 할줄 알았겠지만 그 부담이 고스란히 내게 넘어올줄은 몰랐겠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방정리를 끝낸 나는 냉동고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을 입에물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 주말인데 누구한데 연락오거나 하진 않으려나. 누나가 임용고시 공부한다고 고등학생이던 내가 뒷바라지를 해야한 과거를 떠올리니 내 삶은 왜이리 불행한지 헛웃음만 나온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편한 마음으로 게임을 하니 네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점심은 대충 집에있는걸로 떼웠다. 누나는 사먹으라고 했지만 혼자 나가서 뭘 사먹어? 그렇다고 일인분을 배달해달라고 하나?
기지개를 피니 뚜두둑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와 몸 뻐근한것좀 봐. 대체 열두시간씩 게임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건지.
시계를 쳐다보니 다섯시. 슬슬 저녁을 고려해봐야 할 시간이다. 핸드폰을 열어서 같이 밥먹을 사람없나 뒤적거리고 있는데 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었다.
-뭐하냐?
유진용. 내 친한 친구 중 한명이 카카오톡으로 말을 걸어왔다.
놀줄도 알고 생긴것도 잘생겨서 그런지 친구가 꽤 많았다.
그 친구의 범주엔 여자도 들어가다 보니 아는 여자도 꽤 많았다. 덕분에 나도 건너건너 알게된 여자애들도 있다.
-그냥 혼자서 뒹구는데?
-나올래? 애들끼리 밥먹기로 했는데.
밥먹기로 했다. 달리 말하면 놀기로 했다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밥먹는걸로 끝나지 않는다는거다.
여기서 나는 잠시 고민하게 됐다. 누나는 어떡하지? 일찍 들어왔는데 내가 없으면 화낼텐데.
내가 누나보다 늦게 들어올 때 돌아오는 히스테리는 심각하다. 자기는 늦게와도 되지만 나는 안된다면서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는데 일장연설을 들을 때 마다 노이로제가 걸릴것만 같다.
-좀 그런데.
-왜?
-우리 누나가 외출해서 밤늦게 올것같은데 내가없으면 뭐라해서
-병신이냐?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없다.
-너 서희알지?
서희? 머릿속을 뒤질이유도 없이 한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우리학년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여자애 중 하나다.
예쁘게 생긴걸로 유명해 근처 학교 가릴것 없이 유명한 여자애다. 한주여고의 정유리가 예쁘냐? 한서희가 예쁘냐? 라는것은 남자들 사이에서 단골 안주거리다.
정유리는 본인의 말에 의하면 대형 기획사에서 연기자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는데 딴따라나 광대는 싫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소문이 났다는것 자체가 외모가 대단한거고 그 정유리 보다 이쁘네 마네하는게 한서희란 거다.
같은 학교고 같은층에서 지내다보니 얼굴을 볼 기회가 많은데 정말 왠만한 아이돌 보다는 확실히 예쁜것 같다.
-한서희가 왜?
-걔도 오늘 오기로 했다.
-어차피 봄방학 끝나고 학교가면 볼건데 뭐?
보기어려운 유명인사도 아니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문과지원인데 그러면 같은 반 될 가능성도 있겠다. 나에겐 딱히 신비감을 주지 못한다.
-아 진짜 이거 다른애들한데 말하면 안된다?
-먼소리야?
-들떠서 니입으로 소문내지 말라고.
-알았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한서희랑 친한 애 중에 나랑 친한애가 있는데.
역시 시작은 여자로 부터 시작이냐 나쁜자식. 여자많아서 부럽다 이놈아.
-걔가 갑자기 나보고 너 이인하라 베프지? 라고 하는거야.
-우리가 언제부터 베프였냐?
-아 말끊지말고 장난치지마. 하여튼 내 친구가 한서희랑 친한데 한서희가 너에 관한걸 물어봤나봐. 근데 걔는 너랑도 잘 모르는 사이고. 그래서 걔가 나한데 말해주더라. 너는 노는데 왜 안오냐고.
왜 안오긴. 누나때문에 못간거지.
아무래도 그건 좋고, 상당히 놀라웠다. 한서희가 나한데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너한데 관심 보이고 있는거잖냐. 그게 몇일전 일인데 오늘 서희가 노는데 올거래. 그러니까 와서 안면좀 트고 친해지라고. 버젓이 기회가 있는데 이것조차 귀찮다고 안오면 넌 평생 안생길걸?
안생기다니. 말을해도 꼭.
누나는 더이상 내 걸림돌이 아니다.
-진짜지? 구라면 죽여버린다 진짜.
-야 그럼 내가 널 억지로라도 끌고오겠냐.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거야 임마. 올꺼지?
빠르게 답장했다.
-가야지
-장소는 좀있다가 카톡으로 알려줄게 꼭와라.
왠지 예감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