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기발랄 8
"......"
박우리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멀뚱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도 없다. 뭐 저리 당당하지?
한숨을 푹 내쉰 성현아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중얼거린다.
"...니가 지금 뭐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은데,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깐 얘기좀 할려고 들른거야."
"무슨 이야기씩이나 하길래 모텔을 들어오는데?"
"새벽에 박우리 그렇게 나가고나서 여기로 방잡고 잤데. 아침에 문자온거 보니까 잠깐 들르라고, 할 이야기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가 나온 거야."
"그거 지금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냐?"
내가 계속 저기압으로 나가니까 성현아가 옆에 있던 박우리를 쳐다본다.
박우리는 지금도 아까랑 표정이 똑같다.
"...진짜야. 내가 어제 술마시고 좀 오버한거 같아서 풀어줄려고 불렀어. 그래도 뭐... 일단은 니 여친인데 내가 그러고 나갔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면 어색할꺼 아니냐? 현아는 맨날 너랑 같이 붙어있으니까 따로 불러내서 이야기하려면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불렀어. 그냥 진짜로 이야기만 조금 했다. 너랑 십 몇년동안 친구먹은거 걸고 맹세한다."
"......"
박우리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저놈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
뭔가 들키거나 당황하게 되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녀석인데, 지금의 박우리는 나랑 마주쳤을 때부터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다. 아마 찔리는게 없으니 당당하다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친구 여친을 모텔로 불러다가 이야기 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지나가는 사람 잡고 얘기 해봐라. 그걸 누가 믿냐?"
"처음엔 당연히 밖에서 볼려고 했어. 근데 현아가 귀찮게 밖에서 볼꺼 없이 그냥 여기로 오겠다고 한 거야. 얘 성격이 원래 좀 털털하잖아? 자기가 그럴 맘 없고 나도 그럴 맘 없는거 알고 있으니까 모텔이든 어디든 상관없단 거지. 물론 니가 보면 좀 거시기한 상황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설마 니가 이렇게 민짜 달고 모텔 올 줄 누가 알았겠냐?"
"......"
이거 뭔가, 갑자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저 둘은 어떻게 입을 맞춘건지 아니면 진짜인건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요 사과머리 꼬맹이랑 모텔에 들어온 걸 해명해야 할 차례가 됐다.
저 둘이야 어제 그런 일이 있었고 안좋게 끝나서 박우리가 뛰쳐나갔으니 그거 풀어주려고 잠깐 만났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다.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저런 알리바이라도 댈 수 있다는 소리다.
근데 나는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다. 뭐라고 둘러대지?
그때까지 내 옆에서 가만히 있던 사과머리, 아니 정소연이 은근슬쩍 성현아의 옆으로 가는게 보였다. 뭔가 냄새를 킁킁 맡는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날 돌아본다.
"뭐야. 이 두사람 좀 전까지 하다가 나왔네. 이 언니 옷에서 좆물냄새 나는데요?"
"......"
성현아가 어이없는 눈초리로 정소연을 내려다 본다.
그리고 나는 성현아가 입고 있는 옷에 시선을 보냈다.
어제랑 똑같은 옷이다.
뭐 나한테는 집에가서 옷 갈아입고 온다고 했는데, 정작 간 곳은 집이 아니라 박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모텔이었으니 옷이 바뀌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어제 입고 있던 옷 그대로라면 정액냄새가 베어있는 것도 당연하다. 어제 박우리는 내리 세 번을 성현아의 옷에다가 싸재꼈으니까. 네 번째도 입으로 받긴 했지만 성현아가 못삼키고 토했으니 그것도 옷에 떨어졌겠지.
저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당연히 정소연이 알 리가 없다. 얘는 나름 핵심을 찍어서 말했다고 의기양양 하는 것 같은데...
정소연의 한마디에 좆물냄새 풍기고 다니는 여자가 되어버린 성현아가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얘는 뭐냐고?"
"...그냥 뭐... 아는 동..."
"나요? 을이오빠랑 떡치러 왔는데요?"
......
아까부터 폭탄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드디어 터트렸구나.
이젠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다. 어떡하냐.
"응? 거기 언니, 을이오빠랑 애인인거 같은데 그 옆에 오빠랑 재미보고 나왔잖아요? 우린 그럼 안돼요?"
"......"
아마 얘는 성현아랑 박우리가 쳐대다가 나오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니들도 그랬는데 우리라고 안될꺼 있냐'라는 말로 합리화 시키는 거지. 쌤쌤이니까 꿀릴꺼 없다 라고 생각해서 저리 당당한 건가?
그렇게 말한 정소연은 마치 '나 잘했죠?' 라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 그래. 잘했다. 이 개년아.
너야 그냥 그러고 사라지면 끝이지만 난 이제 어떡하냐고?
* * *
밖으로 나왔다.
의외로 성현아는 내가 정소연이랑 모텔 온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아무리 자기한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고 박우리랑 아무 일 없었다고 자신한다고 해도, 모텔에서 박우리랑 같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별로 떳떳하지 못하니 접고 들어가는 모양이다. 게다가 어제는 내가 자고 있는 틈을 타서 진짜로 박우리랑 하기도 했으니까. 사실 성현아도 그리 할 말은 없을꺼다.
박우리도 당연히 아무 질책도 없다. 오히려 나에게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다' 라는 말로 사과를 할 뿐. 어제 성현아랑 한 것은 솔직히 내가 사주한 거니까 그걸 사과할 필요는 없고, 오늘 성현아와 모텔에서 같이 나왔다는 사실을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저 둘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모텔에서 '이야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뭐? 이런 천하의 개병신을 봤냐고? 맞다. 난 좆병신일 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정말로 아무 일 없었던 것 같다.
일단 내가 아는 성현아라면 했으면 했다고 하지 발뺌하진 않는다.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한 것 자체를 숨기는 성격은 아니란 소리다.
그리고 박우리의 말에도 진실성이 있었다.
내가 녀석과 알고 지낸지도 십 년이 넘었다. 박우리의 말투나 행동, 표정변화 하나까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는 레벨이다. 녀석 특유의 호들갑도 없고, 그저 무덤덤하게 말을 뱉어낼 때에는 정말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여자문제로 녀석과 싸우기도 싫다.
성현아를 잃는 것은 감수할 수 있지만, 박우리를 잃는 것은 싫다.
악우라고는 해도 십년지기 친구니까.
뭐, 나는 그렇다.
시간이 어정쩡해져서 성현아는 집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더 노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집에 가도 좀있다가 다시 올텐데, 왕복하는 시간만 세 시간이 걸리니 아까울 수 밖에.
그렇게 더 있기로 하고 나서 처음으로 간 곳은 의류점이었다.
정액냄새가 확 풍기는 옷을 계속 입고 다니기는 뭐하잖아? 박우리 저놈은 도대체 정력이 얼마나 좋길래 이렇게 냄새가 배길 정도로 싸재꼈는지 모르겠다.
옷값은 박우리가 지불했다. 아무리 성현아한테 돈쓰는걸 아까워하는 나라지만 지금만큼은 내가 사주는게 맞는 것 같은데. 근데 녀석은 '옷이 이모양이 된 건 내 탓이니 내가 사준다' 라는 말로 내 의견을 묵살했다. 뭐 나야 돈 굳었으니 땡큐다.
성현아의 옷을 골라주는 박우리의 모습은... 그냥 친구같다.
뭔가 끈적한 분위기나 그윽한 눈빛도 없고, 처음 술집에서 만났을 때의 그 성현아와 박우리다. 가끔 장난도 치고 하면서 옷을 골라주는 모습에 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불신감마저도 훌훌 털어버렸다.
"완전 애인이네. 대놓고 연애질하는데 남친이란 사람이 그냥 보고 있어요?"
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소연이다.
얘는 아직도 저 둘이 수상한 사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왜 아직도 내 옆에 붙어있는 거냐. 너랑 떡치는건 물 건너 갔단 말이다. 집에 안가냐?
내 심정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정소연은 옷을 고르고 있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날 쳐다본다. '오빠 저거사줘' 라는 얼굴이다. 가끔 성현아도 내비치는 눈빛이다.
"...소연아. 일단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지금은 오빠가 좀 상황이... 아까 봐서 알잖아."
성현아한테 들리지 않게 소근소근 말했다. 그러자 이 꼬맹이 왈,
"응? 나 오빠랑 떡칠려고 나온 건데요? 우리 아직 한 번도 안했어요?"
......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분위기 파악 못하는 거야 둘째치고, 내가 여친이 있었고 그걸 들킨 상황인데도 어째서 빠지지 않고 계속 날 쫓아다니는 거냐고. 대충 이런 상황이 닥치면 여자쪽에서 '어우 재수없어' 라면서 돌아서지 않던가?
이것에 대해 묻자, 정소연은 잠깐 눈을 깜빡거리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도 남친 있는데요? 오빠도 여친 있으면서 나랑 할려고 불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 문제 없어요. 히히."
...참으로 바람직한 귀요미가 아닐 수 없다.
자기도 남친이 있고 나도 여친이 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냥 눈 맞아서 마음 통했으면 애인이 있든 없든 모텔 가는게 당연하다. 이게 정소연의 논리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근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지 않냐. 여친이란 년이 대놓고 저렇게 있는데 어떻게 너랑 같이 다니냐고, 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꼬맹아.
"웅... 근데 저 언니때문에 오늘 오빠랑 하는건 힘들겠고... 그럼 아쉬운대로 저 옆의 오빠랑 놀까요?"
이제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모양이다. 성현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저렇게 있는데 나랑 뭘 할 생각은 힘들지.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옆의 박우리랑 어울려 볼 생각인 것 같다만...
"그러고보니 저기 오빠도 은근 스타일 괜찮네? 저 오빠는 딱 남자다운게 왠지 이병헌 삘 나는데요? 가슴도 탄탄해 보이고."
...이병헌을 모욕하지 마라. 남자답게 생기면 다 이병헌이냐.
사실 박우리도 생긴것만 따지면 은근 먹고 들어가긴 한다만, 어디까지나 겉모습 한정이다. 녀석 특유의 유감스러움을 알게 되면 호감을 가졌던 여자도 다 떨어져 나가지. 그게 박우리가 여자 복이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정작 자신은 그걸 모른다는게 불행이랄까.
아무튼 요 꼬맹이는 타겟을 박우리로 돌린 모양인데, 안됐지만 그건 무리다.
성현아에 대한 박우리의 진심이 어디까지였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음이 아직 살아있든 접었든 지간에 녀석의 마음속에는 성현아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날짜 하나 지나갔다고 처음 보는 꼬맹이랑 어울릴 리가 없지. 유감스러운 녀석이긴 하지만, 박우리는 쉬운 남자가 아니다.
* * *
...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뭐야 저 둘.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잖아!?
"우리오빠, 아앙~"
"움움, 키햐! 이거 맛 죽이는데! 누가 먹여줘서 그런지 더 꿀맛이네?"
"......"
정소연이 애교섞인 목소리로 안주를 집어다 입에 넣어주면, 박우리는 요상한 리액션과 함께 이보다 더 맛있을 수는 없다면서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나와 성현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성현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쳐다본다.
뭐냐. 설마 나한테 저걸 하라고 시키는 건 아니겠지?
"...보고 뭐 느끼는거 없냐?"
...역시 성현아는 저짓거리가 부러운 모양이다. 근데 내가 미쳤냐, 저런 짓을 하게?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현아를 한번 쳐다본 후,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들어 안주를 집었다. 내 행동을 지켜보던 성현아가 대뜸 앙 하고 입을 벌린다. 안주를 들고 있던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내 입으로 쏙 가져다 넣었다.
"...개새끼야."
욕지거리를 내뱉은 성현아는 그 이후로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연거푸 술잔만 들이켰다.
뭐 임마. 내가 왜 너따위한테 안주를 먹여줘야 하냐?
니가 나한테 먹여주는 거면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