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7)

[창작] 때늦은 염복

 나른한 오후의 햇빛이 나무 잎사귀를 투명하게 통과하고 서늘한 바람이 붉

은 단풍잎을 살랑인다. 지금쯤이면 메뚜기가 제철이겠지. 세상이 충만함으

로 가득찬 이 가을에 의외로 짙은 공허감이 배어 있음을 아는가. 가을이 가

진 배반적인 이중성은 자연이 준 것인가.아니면 인간이 자연에서 느끼는 감

상에 불과한 것인가.

 철준에게 가을은 항상 넉넉함만은 아니었다. 사고를 하고부터, 그러니까 사

물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을 가지게 된 후부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가

을은 항상 공허와 쓸쓸함을 더 많이 안겨주고 초가을의 햇볕이 그를 따뜻하

게 해 주어도 가슴 한켠에는 서늘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

다. 그냥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매정하게 하지 않아도,섭섭하게 대

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짙은 공허감은 어디론가 그를 떠나고 싶게 만들지만

 생활이 그를 놓아주지 않아 그것도 여의치 못하고 맘속의 바램으로만 남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 다 그렇지. 월급 받아 먹으며 사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서른 셋의 나이에 아직 대리를 달고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나마 이게 어디냐 싶어 만족하고 살려는 철준이다.

 동창회라도 할라치면 군대를 갖다 오지 않은 녀석들은 벌써 과장을 달고 서

른 셋의 나이에 과장이 어디냐는 식으로 동기들 앞에서 목소리에 힘이라도

 주고 호기있게 술잔을 권할때는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 회사에서 쫒겨나지 않고 버틴 것만도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든다. 경

기가 좋아진다고 하지만 그건 남의 일이다. 얼마나 좋아졌는지 몰라도 주변

을 돌아보면 다 어려운 사람밖에 없다. 그나마 이렇게 직장에 붙어 있고 적

으나마 월급이라도 꼬박꼬박 나오고 알뜰한 아내는 아껴 써 생활은 그럭저

럭 유지되니까 큰 걱정없이 사는게 아닌가.

 철준은 얼마전에 할부로 산 차에 앉아 담배를 피워문다. '차는 잘 샀어' 모

양도 이쁘고 중형이 아니고 소형이지만 생활에 부담을 주지 않을정도의 가

격에 성능도 괜찮은 편이라 내심 만족해한다. 차를 사고 난 후부터 철준의

 생활이 조금씩 바뀌었다.걸어다닐 때야 마냥 바빴다. 힘이 들기도 하지만

 타의로 주어진 시간에 그가 맞추어 간다는게 여간 피곤하지 않았다. 차가

 있으니 내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도 갈수 있고 거리도 짧아져 생활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 기름값이 올라 부담은 되지만 차가 주는 편리함은 철준에

게는 만족이었다.

 ' 자 어디로 간다?'

 토요일의 오후라 퇴근은 했고 시간은 남으나 아내한테는 친구모임이 있다고

얘기하고는 시간을 비워 둔 상태이다. 이런 가을 오후. 그냥 집에 들어가기

는 싫다. 빈 잔을 두고 무엇을 마실까 고민하는 듯 하지만 그에게는 가지고

있는 쥬스가 없다. 학교 다닐때 여기저기 많이 돌아 다녔으면 단골 장소도

 생기련만 그렇지도 않고...

 ' 가면서 생각하자'

차에 시동을 걸고는 회사주차장을 벗어나 한강쪽으로 몰아간다.

 '이럴때 몰래 숨겨 놓은 여자라도 있었으면..'

 친구들이야 예전에는 자주 만났지만 가정을 가지고 생활에 바쁘다 보니 쉽

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내에게서 허전함을 달래는 것도 한계는 있다

. 이럴때 외로움을 함께하고 말동무라도 하여 허전함을 나눌 여자라도 하나

있었으면... 어떤 여자라도 괜찮아.. 유부녀든, 처녀든 , 다만 너무 어리지

않고 비슷한 연배의 같은 세월을 지내온 여자라면 좋겠지...

 조심스레 차를 몰고 한강변에 다다르자 '강변에 갈까' 주저하는데 뒤에서

 뭐하냐고 경적을 울려대자 '에라 모르겠다' 운전대를 잡고는 잠실대교에 들

어섰다. 밖으로 보이는 무심한 강변을 보고는 ' 안가길 잘했네'.

 차가 밀려, 고개를 내밀고 보니 백화점 세일 기간인가 보다. 밀려드는 차에

치이다 그는 얼떨결에 백화점 입구로 들어서고 말았다. 가을 기분 내 볼려

고 출발한 철준의 차는 엉뚱하게 백화점으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그래. 마땅하게 갈데도 없었는데 우선 백화점 구경이나 하자'

 약간은 자신에게 짜증도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

으로 가 고개를 빼고 들여다 보니 염가의류 할인 판매전이란다. 틈을 빠져

 나와 여러층의 백화점을 빠르게 둘러보아도 딱히 살 것도 없어 1층으로 가

는데 한 매장이 눈에 띈다. 가을색 스카프가 이쁘다. 잠시 멈추어 섰다가

 뭔가를 생각하고는 직원에게 다가가자 " 원하시는 물건 있으세요?"

 " 원하는 물건이 있기보다는... 와이프한테 스카프나 하나 사 줬으면 싶어

서요."

곧 말을 받아 " 좋은 물건 많이 있어요. 보세요. 부인께서 대개 좋아하시겠

다. 여성분들 스카프 선물 해드리면 아주 좋아하세요. 이런 것 어떠세요?"

 종알종알... 백화점 직원은 계속 말하고 설명하면서 물건을 내 보이고는 철

준의 얼굴을 보며 동의를 구한다.

 철준은 ' 뭘 알아야지' 내보이는 물건이 다 그게 그것 같고 잘 몰라 멍하게

대답도 부정도 못하고 물건만 보고있는데 다른 직원이 "어서오세요" 하며

 인사하자 한 명의 여성이 매장에 들어섬을 느끼나 철준은 여러 물건에서 눈

길을 떼지 못한다.

 ' 참내. 뭘 알아야지. 힘들구만. 와이프가 어떤 걸 좋아할지...이것은 아니

고... 이걸 사가지고 가면 욕은 안 먹을까'

 괴롭다. 그렇게 뒤척이며 보고 있는데 " 어머, 안녕하세요?" 누군가 한 여

성이 인사하자 순간 의아함에 철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와이프 친구가 서

 있다.

이름은 ' 손 현아'

"안녕하세요"

철준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 어쩐 일이세요?. 어머 스카프 보고 계셨구나. 누구 사 주실려고?..."

 "네. 지나가다 들어와 봤는데 마침 스카프 매장이 보이길래... 와이프 하나

사줄려고요."

"어머.그러세요. 혜정이는 좋겠네"

" 무슨 일로?"

"저도 할인해서 쇼핑하러 왔다가 스카프하나 사려고요"

 " 잘됐네요. 지금 고르는 중인데 못고르겠어요. 그게 그것 같고... 고르시

는 김에 하나 골라 주세요"

" 혜정이가 쓸건데 제가 고르면?... 그러세요 제가 하나 골라 드릴께요."

 하면서 현아씨는 이것 저것 스카프를 보고 고르는데 참 야무지게 한다. 귀

 밑에 흘러내린 몇가닥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직원에게 묻고 보고

 하더니만 그 중 한개를 가져와 철준에게 보이며 " 이게 괜찮은 것 같아요.

 색깔도 혜정이가 좋아하는 색깔이고..."

" 그렇게 합시다, 아가씨, 이것으로 하죠."

" 포장해 드릴까요?"

"네"

아가씨가 포장하는 동안 현아도 물건을 선택하고는 지불을 했다. 둘이 매장

을 나서면서 " 참 자상하시네요. 와이프한테 가을이라고 선물도 해 주고 "

 철준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 아뇨. 별 말씀은..." 어디 드라이브라도 갈려

고 나섰다가 얼떨결에 백화점에 들어와 사게 되었다고 말하기는 좀 난처해

서 그냥 대답한 것이다. 현아와 철준이 입구에 나왔다. 현아는 볼일을 다

 봤다고 하자 철준도 딱히 할 일이 없던터이고 보니 현아를 보며 " 오늘 고

마웠어요. 물건 고르기가 힘든데 도와 주셔서"

 "뭘요.. 아무것도 아닌걸..."

둘이 잠시 말도 없이 몇걸음을 옮겨 놓았을 때 철준이 "어때요?. 시간 괜찮

으시면 제가 커피라도 한잔 대접할까 하는데..."라며 현아의 얼굴을 보자

 현아는 "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러지 마시고 잠시 커피 한잔만 마시고 가세요"

철준이 거듭 말하자 현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

준은 여기서 현아씨를 그냥 보내는게 몹시 아쉬워서이다. 둘은 가까운 커피

숖을 찾아 두잔을 주문했다.

 " 정혜는 왜 안 데리고 나오셨어요? 같이 나오면 정혜도 좋아 할텐데.."

 조용조용히 현아가 말하자 철준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만두고 잠시의 침

묵후 백화점에 오게 된 동기를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 아하.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던데.. 가을 타시는 모양이죠?"

" 무슨... 남자의 계절하고 저하고는 별 상관이 없지만 기분이 좀 그래요"

 둘은 가을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변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철준이 현아

를 본다. 사실 철준은 가슴속에 하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

내의 친구인 현아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친구들이 여러명 있지만 그중 유달리 철준의 눈에 들어오고 괜찮아

 보인다는 여자는 현아 하나이다. 아내의 성격과는 반대로 여성스럽고 다소

곳 하며 옷입는것하며 화장하는 것이 차분하고 지적으로 보인다. 철준이 내

심 좋아하는 성격의 여자인 것이다.

 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났지만 그냥 헤어지기는 서운하고 해서 커피를 마신

다는 핑계로 이렇게 현아를 붙잡아 두었는데 볼수록 점차 이끌리는 마음이

 더하다. 키도 아내보다 약간 작지만 그것이 철준에게는 아담하고 이뻐 보이

는 것이다. 현아도 철준에의 느낌은 괜찮은 편이다. 남자다움도 있으면서

 말이 별로 없는 철준에 대한 인상이 우호적이고 자신의 남편에 비해 깊어

 보이는 눈이 현아를 이끌리게 하는 것이다.

 ' 저런 남자는 직장생활이 안 어울리는데..'

 내심 생각해오던 터이고 보니 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나 커피를 마시는 것이

현아에게는 이탈된 즐거움이라고 할까. 아무튼 예상 못한 일이 현아를 일상

의 감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준 것이다.

 둘이 이야기를 계속하자 현아는 철준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했다. 항상 조용

하고 근엄해 보이기까지 한 그에게 의외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풍부한 유

머감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야기 할수록 재미 있어지고 둘은 처음

에 했던 외양적인 인사말 대신 서로의 감정의 문을 조금씩 열어 보이면서

 개인적인 문제 같은 것도 가볍게 얘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철준과 현아가

 대화의 즐거움을 더해 갈때 창으로 가을 햇빛이 드리워지자 둘은 일어섰고

 굳이 혼자 가겠다는 현아의 고집을 꺾고 철준은 현아의 집 근처에까지 데려

다 주었다.

 내릴때쯤 철준이 메모지를 꺼내 뭔가를 적어주면서 " 오늘 즐거웠어요. 대

화도 즐거웠고요. 이건..제 핸드폰 번호인데 혹시 다음에 마음이 답답하시

던가 친구가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서로 잘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그

렇다고 다른 불순한 마음을 갖는건 아니예요. 친구로 생각하시고... 참. 오

늘일은 와이프한테 말하지 마세요. 괜한 오해를 살 필요가.." 라고 하자 현

아는 순간 받아야 될지 망설이다가 마침내 받아 손에 쥐고는 웃음을 띄고는

" 오늘 즐거웠어요. 안녕히 조심해서 가세요"하며 인사하고는 뒤돌아서 걸

어간다.

 철준은 잠시 걸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출발했다. 오늘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

의 사람을 만나 기분이 좋았다. 다시 일상사로 돌아온 철준은 바쁜 하루하

루를 보냈다. 4/4분기에 접어들어 할일이 많기 때문이었는데 토요일의 그일

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가끔 생각나기도 하지만 생각에서 지워버리고 일에

열중했다.

'어차피 할것 빨리 해버려야지. 원.. 짜증나서...'

20대의 꿈을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모르겠다. 한해한해 지나오다보니 학창

 시절의 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 이렇게 바쁜 월급쟁이가 되어 버린 것

이다. 현아는 집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아침 드라마를 보다가 불현듯 토요일

날 보았던 철준의 깊고 깊은 눈동자가 떠 올랐다.

 마치 뭔가 비밀을 간직한듯, 아니면 남에게 줄수 없는 공허함을 담은듯 깊

은 눈이 현아에게 맹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처음 혜정이가 결혼한다고 선포

하고 철준을 친구들에게 소개했을 때 특별한 점 없는, 인상 좋은 평범한 사

람이었다. 그런데 그후 조금씩 인상이 바뀌어져 갔는데, 보면 볼수록 더 혼

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철준이 전해준 메모지를 버릴까 하다가 지금 보고

있는 책속에 넣어 두었다. 괜히 가지고 있으면 혜정이에게 죄를 진것 같고

 마치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마음이 들까봐서였는데 버리지는 않았다.

 현아는 요즘 속상한 일이 많아졌다. 얼마전까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

안에 들어 있자 처음에는 별 말이 없던 남편은 몇달이 흐르자 조금씩 짜증

을 내기 시작하였다. 사소한 일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아는 그것이 자신

이 직장을 그만두므로 인해 생활비를 보탤수 없어 남편이 신경질을 부림을

 알고 있다. 요즈음에야 맞벌이 하는 여자를 찾는게 남자들의 세태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생활은 남자가 으례히 책임지는 것이었는데 바뀌기도 많이

 바뀌었다.

 현아의 살림은 넉넉한 편이 아니라 직장을 그만둔 것이 당장에 표시가 나서

인데 남편 역시 맞벌이를 선호하는 신세대라 현아의 사직을 달가워하지 않

는다. 현아는 남편과의 문제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자니 자꾸만 다른 사람에

게 뒤쳐지는것 같기도 하고 옷차림도 점점 '아줌마화' 되어 가는 것 같아

 일종의 심리적 공황상태에 있다. 오늘 아침에도 아무런 일도 아닌것에 남편

이 짜증을 부리고 나가자 볼이 부어 있는 상태이다.

섹스를 해 본지도 제법 된 것 같다. 결혼초에는 불같이 달려들던 남편도 요

즘은 일 때문에 피곤하네.뭐네 하면서 꺼리고 현아도 굳이 섹스가 남들이

 말하듯 환상적 쾌감을 가져다 주는것도 아니어서 뜸해지게 된 것이다. 남들

처럼 뼈가 내려녹을 정도로 진한 섹스를 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남편

의 섹스 스타일은 천편일률적이라 다른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그

저 소설이나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로 대리만족만 할뿐, 그렇다고 카바레같

은 곳에 나가 바람 피울수는 없는 일 아닌가.

금요일 오전, 현아는 방안에서 뒹굴다 무료하고 심심했다. 그러면서 외로운

감정도 일어나 외딴섬 홀로이 머무르는 것 같아 친구들에게 전화를 넣어 잡

담을 했는데 그게 그 이야기다. 수화기를 내려 놓고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손으로 가슴을 만져봤다. 이제 서른살이지만 탱탱한 젖가슴은 변함없고 쳐

지지도 않았다. 남편이 밤에 자주 만져 늘어질까도 걱정했지만 크기만 약간

커지고 탄력을 잃지 않아 만족감을 느끼고는 복부와 허벅지를 손으로 더듬

어 보자 군살이 아직 별로 없다.

'아직은 팽팽한데'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철준의 모습이 떠 올랐다. 친구 남편이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철준이 현아의 무료함속에ㅔ 떠 오르자 저번에 적어준 전

화 번호를 찾아 보았다. 여전히책속에 꽂혀 있었는데 메모지를 쥐고는 갈등

에 잡힌 현아는 ' 한번 연락해봐?. 아니야.. 친구 남편인데... 아니야..친

구 남편이면 어때? 친구 같은데..'

 전화를 넣을까 말가 고민에 휩싸인 현아는 그래도 철준을 만나 여러가지 이

야기를 나누면 자신의 공허감을 어느정도 채워줄 것같은 유혹에 전화에 손

을 대었다.

 '혹시 속으로 욕하지나 않을까?'

 망설이다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조금있다 저편에서 '여보세요' 하

는 묵직한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 안녕하세요.. 저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는데.. 혜정이 친구 현아인데.."

" 아..네.. 안녕하세요.. 알고 말고요.. 반갑네요."

 " 네.. 저도 전화를 드릴까 말까 하다가 드린거예요..저번에 커피도 감사

 드리고.."

" 잘하셨어요.. 안그래도 쓸쓸하던 참이었는데.. 저번에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현아씨하고 이야기하는게 왠지 편안하더군요.."

" 네.. 저도 재미있게 잘 보냈어요.. 시간이 나서 감사도 드릴겸.."

" 네~에. 무료하시죠?.. 집안에 계시기가 힘드실텐데.. 저도 예전에 집에만

있어 본 경험이 있어서 잘 알지요. 특히 일하다가 그만두면 더.."

 "네.약간요 .. 그래도 지금은 적응이 잘 되어서요.."

 " 네.. 무료하시면 나오세요. 저는 일이 별로 안바빠 시간이 생겼어요...

 그동안 엄청 바빴거던요.. 음 ..내일 토요일이니까 내일 한번 나오세요?"

 "글쎄요..."

" 고민하실 필요 없어요.. 친구 만나는건데..시간 있으시죠?"

 " 시간이야 있지만.. 사람들이 욕할가 봐서.. 혜정이 모르게 만나는 것도

.."

" 와이프 생각할 필요 없어요.. 죄 짓는 것도 아니고. 모르게 하면 되죠.."

생각해 보니 그렇다. 간단히 친구 만나 얘기 나누다가 들어오면..., 단지

 성가실까 봐서 모르게 하는건데.."........

 " 저.. 그럼.. 어디로.."

" 네. 거기서 멀지도 않고 ..에..또 제가 볼일도 좀 있고 해서 테크노마트

 어때요? 커피숖에서 보면..시간은 2시 정도로.."

"네. 그러면 괜찮겠네요.. 그럼 내일 뵙죠"

수화기를 내려 놓는 현아의 손길이 떨린다. 남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두

려운데 ,그것도 친구 남편을.. 현아의 가슴한켠에는 가벼운 설레임이 물결

치고 남편이 저녁에 들어 왔을때는 내일 여고 동창들을 만날거라고 얘기하

고는 뭘입고 가야하나 궁리를 밤이 짙도록 한다. 철준은 갑작스런 현아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뛰었다.

 현아의 목소리엔 진한 고독이 묻어나오는데 오히려 그것이 현아로 하여금

 철준에게 연락하게끔 만들었다 싶어 현아의 고독이 고마웠다. 설마 전화할

 줄은 기대도 못했었는데...

 토요일.. 담배를 피고 있는 철준의 앞에 현아가나타났다. 철준은 현아를 보

고는 "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길이 많이 막히죠?" 밝은색 옷을 곱게

 차려입은 현아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 안녕하세요.. "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자 커피를 주문하고 어색한 침묵

후에 철준이 조금씩 이야기를 하자 현아도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둘은 웃

으면서..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웃음이 둘을 감싸고 조금후

 철준이 " 날씨도 좋은데 여기 답답하게 있는게 별로 안좋네요. 어디 바람이

라도 쐽시다"라고 제안하자 현아는 머뭇거렸는데 철준이 거듭 얘기하자 고

개를 끄덕였다.

 둘이 차를 타고 한강변을 가로질러 팔당댐쪽으로 나갔다. 현아는 운전하는

 철준의 옆 얼굴을 몰래 훔쳐 보았다. 윤곽이 뚜렷한 입술, 쭉 내리뻗은 코,

시원스런 이마, 깊은 눈동자... 현아는 가슴이 몰래 뛴다. 남편 몰래 친구

 남편을 만나러 나와 마음이 찔렸지만 지금 이렇게 좁은 차속에 멋져 보이는

철준과 같이 있으니 그런건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팔당댐을 지나 한참을 가자 경치 좋은 강변이 보였다. 갈대가 바람에 잔잔

히 흔들리고 물결은 빛에 반짝인다. 철준은 현아를 데리고 강변을 거닐었다

. 둘다 가슴 설레임으로 묵묵하다.

 " 좋죠?..."

" 네. 시원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네요. 잘 나온 것 같에요"

 "네.. 한순간이라도 시름을 놓을 수 있고.. 저는 혼자 여기 자주 와요.. 힘

들고 외로울때면..."

" 네..에..."

둘은 잠시 언덕에 앉았다가 다시 거닌다.

 " 이렇게 거니니까.. 마치 연인 같죠?"

 " 네?.. 무슨 말씀을.."

순식간에 현아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러면서도 '정말 연인이었으면..'몰래

 바램이 생긴다.

 " 현아씨. 이왕 여기 온 것, 대신으로 잠시 동안만 연인하죠..남보기에도

 그렇고.."

현아가 둘러보니 여기저기 연인들이 팔짱을 껴고 거닌다. 뚝 떨어져서 거니

느건 그네들뿐이다. 철준이 팔을 내밀자 현아는 펄쩍 뛰다가 마지 못해 철

준의 팔에 그녀의 팔을 집어 넣는다. 나타내지 않으려 했으나 떨림이 역력

하다. 철준은 팔짱을 낀 현아의 부드러운 느낌이 닿자 기분이 묘해지고 뭉

클한 그녀의 젖가슴이 팔에 닿을때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체가 부

풀어 오르고 흥분이 엄습해 온다.

 현아도 철준의 팔짱을 끼고는 철준의 단단한 팔의 감각이 전해오자 일순간

 몽롱해지다가 깨어 났는데 철준이 알아챌까봐 오마조마하다. 현아는 비록

 친구의 남편이지만 이렇게 여유로움을 가지면서 한가하게 같이 거니니 예전

의 연애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설레인다. 소녀가 된 것 같은 기분

이랄까. 어느듯 강변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해가 걸리고 그림자가 드리우

자 현아는 돌아가자고 재촉하고 철준도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를 몰아 돌아오다가 팔당댐을 지나자 다 온 것 같아 주변에 있는 커피숖

으로 현아를 데리고 들어가 커피한잔에 작은 바램과 설레임을 띄우고 강을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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