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조교 2일차 (14) (46/87)



〈 46화 〉조교 2일차 (14)

“자기야, 괜찮으면 우리 대화좀 할까?”

“응...”


현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내자 혜지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한다니 유감이네. 근데... 어쩌다 그렇게 된거냐고 말하면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운데?”


툭 말을 던져놓고 차분히 그녀를 살핀다. 혹시라도 이 말에 반발한다면 전략을 바꾸어야 하겠지만, 그녀를 지탱하는 사랑은 여전히 단단해보였다. 그리고 사랑에 묶인 그녀는 자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말한 사람도, 뭐든지  해줄 수 있다고 무릎 꿇은 사람도 자기였으면서... 근데 지금 와서 이러면, 나만 너무 못난 사람 같잖아.  그냥 자길 믿었을 뿐인데... 자길 믿은 내가 뭐가 돼...”

교묘히 사실을 왜곡한다. 혼란을 주는 말로 혼란을 부추긴다. 그녀의 여린 마음을 자극하며 동정심과 책임감을 자극한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감정적 판단을 유도할 표정을 만들어냈다. 잔뜩 의기소침한 티를 내며 중얼거리는 현우의 얼굴이 몹시도 처량하다.


슬픔에 빠진 미녀를 외면할  있는 남자는 드문 법이고 그건 남녀를 바꿔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가 이제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현우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오빠. 아니야. 나 진짜 그런거 아니야. 그냥... 그냥...”


“그냥 뭐? 왜 그러는거야 도대체...”


“그냥... 기운이 없어서 그랬어. 절대로... 절대로 이상하다고 생각 안하니까 그러지마, 응? 내가 무슨 갑자기 말 바꿔버리는 그런 사람인가? 오빠도 내가 얼마나 약속  지키는지 알잖아.”

물론 잘 알다마다. 그녀가 지닌 기이할 정도의 부채의식과 약속에 대한 강박관념은 제법 유용하게 써먹었다.


혜지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역으로 결백을 주장한다. 스스로의 혼란을 내팽개치고 현우를 달래기에만 급급하다.

“확실해? 정말 그렇다고 믿어도 돼? 그럼 나 사랑한다고 말해줘. 지금 나 너무 불안하단 말이야, 혜지야.”

“사…”

혜지는 반사적으로 사랑을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분명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하긴 했지만... 엉겁결에 오줌까지 받아 마시다니.


자괴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거짓이다. 모멸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또한 거짓이다. 그러나 오빠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참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것도 결국 스스로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닌가. 오빠도 오줌을 마셔달라는 말은 없었으니,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스스로가 결심한 일이다.


눈 한 번 깜빡거릴 찰나같은 시간. 그녀의 무의식이 합리화를 마쳤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망설이던 그녀가 갈등을 끝냈다.

사랑을 부정할 수 없는 그녀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유일했다.

“…랑해, 오빠. 난... 평생 오빠꺼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마. 내가... 내가 미안해.”

“후우... 고마워, 솔직히 말해줘서. 나도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그래, 자신은 오빠를 사랑한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미소 짓고 있던 와중에 기다리던 피자가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현우는 배달원으로부터 피자를 건네받고 문을 닫았다. 오늘의 메뉴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포테이토 피자. 하는 김에 치즈 추가와 토핑 추가도 해줬다.


그러고보니 피자는 그녀에게 제법 소중한 음식이라고 했던가.

돌아가신 할머니와 종종 즐겼다던 추억이 담긴 음식.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 피자 한 판은 크나큰 사치였고 기쁨이었겠지.

현우는 바닥에 피자를 내려놓으며 꽤나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넋이 나간 그녀를 울려버릴 말. 그녀의 영혼을 사랑으로 집어삼킬 말.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보다, 역시 스토리가 좋겠지. 지금은 그녀의 의문을 종식시킬 한 방이 필요했다. 연극으로 따지면 절정 혹은 하이라이트에 해당할 만한.


“자기야. 피자 먹을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했었지? 할머니랑 피자 먹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며.”


하다하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현우는 침대에 앉은 그녀를 눈에 눌러담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뜸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현우.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을 할머니를 들먹이며 감정선을 건드린다.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에 허우적대도록 유혹한다.

그녀의 닳아버린 이성은 뻔히 보이는 수작을 조금도 저지하지 못했다.


“아... 할머니. 응. 할머니랑 먹었었지.”

혜지의 머릿속에 할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식당 일로 힘겹게 버신 돈으로, 가끔 피자를 시켜주곤 하셨었던 할머니. 그건 그녀의 생애에서 몇  되는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때 그렇게 행복했어?”

“응... 행복했어. 진짜진짜... 행복했어. 피자가 대체 뭐라고. 맨날 사달라고 떼쓰고 그랬었는데...”

현우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떨림을 감지했다. 원래가 눈물이 많은 여자다. 거기에 이런 상황에서 할머니를 들먹여주면, 그녀가 눈물을 쏟아내는건 보나마나 기정사실이었다.


아무리 말 같잖은 개소리라도 상관없다. 설득력은 잘 생긴 얼굴이 알아서 부여해주기 마련이다. 빛 좋은 개살구가 됐든, 뜬구름 잡는 개소리가 됐든, 그녀를 제대로 뒤흔들 말장난이 필요했다.


“음... 자기야 할머니도 좋은데...”

현우는 뒷말을 끌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녀에게 날릴 한 방을 신중히 고른다.


“앞으로는 할머니말고 날 떠올려 줄 수 있어? 내가 할머니대신... 평생 자기 옆에 있어줄게. 내가 할머니만큼, 아니, 할머니보다 더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게.”


조금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신들린 연기. 남우주연상이 있다면 아마 따놓은 단상이 아닐까.

“앞으로는... 나랑 평생 행복하기만 하자. 사랑해, 정말. 제발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현우는 그녀를 펑펑 울릴 말만을 귀신 같이 골라냈다.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을 그녀가 한껏 감정적이 되도록 한 글자, 한 글자에 사랑을 담아 읊조렸다.

그리고 현우가 노래하는 뻔한 말은, 혜지의 영혼에 써내려가는  편의 시가 된다. 어느 정도 혼란이 가신 정신에 현우의 말들이 받아적힌다.


현우는 그렇게 혜지와 자신을 질긴 인연의 끈으로 다시 묶었다. 애초에 그녀가 달아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빠...”


혜지는 현우의 말을 듣자 피로로 몽롱한 가운데도 온갖 감정이 역류한다. 조금은 풀이 죽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녀의 이성은 결국 현우와의 대결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제 기능을 하는가 싶더니 마지막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흔적을 감춘다.

그 빈 자리를 채우는 수많은 합리화의 말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바람에 삶이 온통 고역이었다. 지금까지의 우여곡절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 삶에 찾아와준 소중한 사람. 세상에 완벽한 남자는 없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고, 현우 정도면 인생에 다시 없을 괜찮은 사람이다.

혜지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편집증 환자처럼 연신 사랑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흑... 나도 오빠 사랑해. 내가 흑... 정말정말 사랑해. 정말 사랑해... 사랑해...”

그 말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진심이 담긴다. 화장실에서의 사랑 고백이 정신 나간 상태에서 지껄였던 혼잣말에 불과했다면, 지금의 사랑 고백에는 절절함이 배여있었다.

이젠 방금의 상황에 의문을 느끼던 스스로가 이상해진다. 그래, 그건 연인 간의 유희였다. 조금 과격하고 특별한 유희. 오빠의 트라우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그리고 오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잔혹하게 짓이겨진 영혼은 다시금 사랑을 피워내고 만다. 아무리 영혼이 꺾어 버려도 현우를 향한 일편단심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사랑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혜지도 알고 있으니까. 모든 것을 잃고 사랑을 거머쥐었으니 그마저 부정해버리면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 오빠마저... 오빠마저 없으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줄 이가 한 명도 없다. 기댈 곳 없는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게 두렵다. 할머니처럼 소중한, 아니 할머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간절한 만큼, 오빠를 사랑한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흐으윽... 끄으으윽...”

그간 참아왔던 감정이 본격적으로 폭발하자 마치 자식을 잃은 어미처럼 애처롭게 몸을 떨어대는 혜지.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현우에 대한 사랑이 조금씩 뒤섞이더니 감정적 격앙 상태가 단숨에 최고조에 이른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 그러다 현우를 생각하면 그 심장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 속에서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혜지는 혼절이라도  기세로 흐느껴 울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기이하게 올라가있었다.

어젯밤 현우를 놀라게 했던 이상 현상이 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건 현우가 바라마지 않던 시그널이기도 했다.

피자는 내버려둔 채 침대로 올라가 그녀를 껴안는다. 혜지를 토닥이는 현우의 입가가 점점 뒤틀려 올라갔다.

“그래, 혜지야...  항상 네 편이야.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도 돼. 내가 어디 안 가고 항상 옆에 있을게.  자기 남자친구니까.”


오늘의 조교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히는 기분이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마치 성공적인 조교를 축하하는 박수갈채로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영혼이 침몰하기 전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비명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간에 고비를 넘긴건 분명해보였으니... 현우는 미련하리만치 순진한 그녀에게 마음껏 조소를 보냈다.


하여간 사람의 심리란게 신기해서, 원하는 말만 듣고 원하는 모습만 눈에 담는다. 한껏 악랄하게 굴다가도 지금처럼 잘해주면 역시 오빠는 착한 사람이야하고 생각하고 만다.


현우는 미친 사람처럼 울어제끼는 그녀를 다독여주다가 러브젤이 떠올랐다. 항문 조교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더 몰아붙이는 것은 분명히 역효과다.

생리가 보통 5일쯤 이어진다고 하던가. 오늘 하루는 충분히 알차게 보냈으니, 내일은 양(+)의 감정을 쌓는 데에 할애한다고 쳐도... 아직 3일이나 남았다.

3일이면 그녀의 뒷구멍 조교를 개시하기엔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다정한 남자친구 역할에만 집중한다. 당장 그녀를 더 핍박하기보다 그게 훨씬 더 값어치가 있었다.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자기를 사랑해.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사랑해. 우리 서로 더 이해해주고 더 사랑해주자.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 평생 함께 하자.”

어차피 사랑이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순간 자연스레 그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현우는 미래를 떠올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다사다난했던 두 번째 조교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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