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조교 2일차 (4)
내일부터 커뮤니티를 둘러보겠노라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이길 수차례.
혜지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엎드려 있었던 까닭에 팔꿈치와 무릎이 저릿했다.
게다가 현우의 일어나라는 명령에 다급히 몸을 일으킨 탓인지 조금 어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빠가... 오빠가 좀처럼 웃질 않는다. 분명 잘못을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여느 때와 같이 웃어주기는 커녕 무심히 바라보기만 한다.
어찌 보면 아직 화를 내는 듯한 싸늘한 얼굴. 혜지는 그 얼굴에서 풍기는 차가운 냉기에 몸을 떨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이 다시금 온몸을 엄습해온다. 가슴 위에 무거운 돌을 얹은 것 마냥 숨이 콱 막힌다.
그녀는 지금의 침묵을 깨뜨릴 무언가가 절박했지만 한 번 얼어붙은 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만 꼼지락거린다. 안면 근육을 삐그덕대며 간신히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낸 채 현우의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이 없어지자,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아까까지의 소란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느닷없는 고요함이 공간을 잠식했다.
그리고 방 안에 스며든 고요함은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칼이 되어 혜지의 가슴을 저며왔다.
용서한다고 말하고는 왜 아무런 말이 없을까.
커뮤니티를 꼭 구경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것일까.
그럼 어떤 다른 말을 꺼내야 하지.
아니 그전에... 명령없이 입을 열어도 되는 걸까.
혜지의 머릿속이 산만하게 치솟는 생각들로 순식간에 혼탁해졌다. 아까의 어지러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두통이 머리를 뒤흔들어놓았다.
결국 남아 있던 희미한 웃음마저 얼마 못가 부서지고 만다. 처음의 해맑은 웃음은 온데간데 없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다.
핏기가 전혀 없는 혹은 혈색이 좋지 않은 등의 말이 딱 들어맞는 얼굴.
현우는 그녀의 안색이 실시간으로 창백해지는 과정을 구경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저 아무런 말도 않고 싸늘히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것이 마법을 불러일으켰다. 눈앞에서 삽시간에 시들어가는 생기를 보고 있자니 마법이라는 말이 꽤 어울렸다.
사실 처음에는 이제껏 그랬듯 미소로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모든 서운함이 풀렸다는 듯 적당히 웃어주고, 대충 토닥여주고, 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기대하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끝내는.
여태까지의 화해가 항상 그런 식이었기에 현우의 웃음은 혜지가 지은 죄를 사하여준다는 일종의 면죄부가 되어버렸고, 모든 갈등은 그 웃음이 있은 뒤에야 종결되었으니까.
지금껏 그래왔던 데에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혜지를 처음 만난 날, 그녀가 싸늘한 표정에 유독 민감히 반응하는 것을 눈치 채고 그동안 적절히 이용했을 뿐이다.
정액 핥아먹기를 가르친 날도 마찬가지. 그녀의 사과에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응수해주니 그녀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금기를 내어놓았다. 당연히 현우는 그제서야 환하게 미소지어 주었고.
아마 폭력적인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그만 짜증에도 불안해하는 성격으로 자라난걸 테지. 현우로서는 지난 한 달의 조교에 알차게 써먹었던 만큼 고맙기만 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원래부터가 싸늘한 표정에 안절부절 못하는 여자였던 만큼 현우는 궁금해졌을 뿐이다.
갖은 공을 들인 끝에 만들어 낸 그녀의 불안 장애 증세.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무표정에 어떤 반응을 보여올까.
미친듯이 불안해할까. 아니면 어쩔 줄 몰라 울음을 터뜨리려나.
체벌을 애원하며 몸을 맡겨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흥분이 치솟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마음 속의 흡족함을 뒤로 하고 애써 표정을 굳히며 침묵을 고수했다.
물론 처음에는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사귄 지 이틀 된 남자친구를 위해 온갖 변태성욕이 범람하는 커뮤니티를 공부하겠다는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웃겼으니까.
그래도 용케 잘 참은 덕분에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를 얻어냈다.
생기가 빨려나간 앳된 얼굴에는 미소의 그림자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가늠할 수 없는 불안이 차지했다.
툭 건드리면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 같은 눈. 그 안에 자리잡은 새카만 동공이 초점을 잃고 표류한다.
잘근잘근 짓씹는 아랫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볼 아래로 차마 얼굴이 담아내지 못한 불안이 뚝뚝 흘러넘친다.
아마도 그 불안이 손마저 적신 모양인지 자그마한 손가락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산만하게 꼬아댄다.
방금까진 말 몇 마디로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는데, 이젠 심지어 침묵만으로도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런게 노자(老子)가 말한 무위의 도일까. 수십 마디의 말로도 지워내지 못한 미소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난도질 했다. 그리고 바스러진 미소만큼이나 그녀의 정신도 망신창이가 되어있을게 분명했다.
현우는 이번에도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되진 않았다. 진심 어린 사과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면, 도리어 사과하는 쪽이 화를 내는게 비교적 상식적인 반응 아닌가.
아니, 그전에 사람의 기분이란게 이처럼 휙휙 변할 수 있는걸까.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달콤한 꿈에 젖어있던 얼굴이 지금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얼굴로 변해있었다.
역시, 정신병자에게게 일반적인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는건 무리인듯 보였다. 뭐, 이런 비상식적인 반응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지고 노는 맛이 있는 것이기도 했고.
현우는 자신의 침묵이 조금씩 그녀를 옥죄는 것을 음미하며 입을 열 타이밍을 가늠했다.
적당히 숙성된 듯 싶으니 이제 슬슬 한 입씩 뜯어먹어야 하나, 아니면 좀더 기다려야할까.
물론 이대로 놔두면 그녀의 불안이 어디까지 치닫을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혜지가 불안에 허우적댈수록 오늘밤이 즐거워지리란 사실은 잘 알았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그녀의 불안을 더 키울 수 있을까만을 골똘히 생각한다.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는 지금의 침묵을 이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저히 서운함이 풀리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며 체벌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잘못을 용서한다는 말을 내뱉었기에 체벌로 이어가기에는 매끄럽지 않았다.
하려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으나, 체벌은 일관성이 뒷받침될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지식을 전공 수업에서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침묵이 무의미한가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 착실히 쌓은 불안 스택을 잘 킵 해두었다가, 다음의 스택과 합쳐서 더 크게 터뜨리면 될 뿐이다.
결국 지금의 침묵을 이어가야겠다고 현우가 마음의 가닥을 잡아가던 찰나, 방금 혜지가 입에 올린 창녀라는 말이 현우의 뇌리를 스쳤다.
체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을 것 같은 장난이 현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가 먼저 몸을 엎드려오길래 별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창녀라는 말도 꽤나 흥미롭긴 했다.
"창녀."
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길었던 침묵을 깨뜨렸다. 흔들리던 혜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귓가를 때린 탓이다.
"네?"
"네가 네 입으로 창녀라고 했었지, 방금?"
"네, 창녀요. 창녀 맞아요."
혜지는 사막을 떠돌다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결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재밌네."
현우는 말과는 달리 조금도 웃음을 보이진 않았다. 단지 그 말을 들은 혜지만이 몹시도 어색한 웃음을 쥐어짜내며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럼 넌 얼마짜리야? 창녀면 가격이 있을거 아니야."
"아..."
혜지는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얼마짜리라고 해야하지.
스스로의 몸을 두고 가격을 매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당장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우는 그녀의 오른쪽 유두를 가볍게 움켜쥐곤 위로 휙 비틀어올렸다.
"으으윽..."
"정신 차려. 손님이 가격을 물으면 대답을 해야할거 아니야. 창녀라며."
혜지는 젖꼭지에서 피어오르는 찌르르한 고통에 이 사이로 작은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십 만원? 이십 만원? 그녀가 창녀의 적정 화대를 알고 있을리 만무했다.
"모르... 모르겠어요."
"하... 내가 설마 진짜 가격을 물어본 것 같아? 제발 생각좀 하자. 어떤 말을 하면 내가 좋아할지, 어떤 행동을 하면 흥분할지 떠올려보란 말이야."
현우는 그녀의 비어있는 반대편 유두로도 손을 뻗어가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래도 공포로 굳어버린 그녀의 머리는 융통성을 발휘하기에 한계가 있어보여 넌지시 정답을 알려주었다.
"아... 공짜요! 주인님이 원하면... 무료로 써도 되는 창녀에요. 흐으윽..."
그래도 영 바보는 아닌 모양인지 던져주는 힌트를 잘 받아먹는다.
현우는 그녀의 신음소리가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반대쪽 젖꼭지도 비틀어올렸다가 놓아주었다.
봉긋한 가슴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젖꼭지에 매달린 채 딸려올라오는게, 그녀가 신음을 지르지 않더라도 제법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좋네. 근데 그걸 그렇게 인상쓰면서 말을 하면 듣는 손님이 기분 나쁘잖아. 웃으면서 예쁘게 말해야지."
그리고는 태연히 이어지는 잔인한 주문. 혜지는 그 말에 곧장 입을 열려다가 본능적인 거부감에 말을 망설였다.
방금은 유두를 꼬집히는 바람에 엉겁결에 창녀라 떠들어대긴 했지만 미소를 머금고 말하기엔 무언가 꺼림칙한 말이었다.
분명 오빠를 기쁘게 해주려고 시작한 역할극이었는데... 어찌해서 갑자기 창녀가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못 하겠어? 창녀는 그래도 사람이잖아. 정액변기니 오나홀이니 잘만 하다가 갑자기 왜 그래."
"아... 어, 할 수 있어요... 음..."
혜지는 현우의 채근에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고 뒷말을 흐렸다.
정액변기나 오나홀 같은 말들은 그저 오빠의 취향이라는 생각이 들어 별 거부감이 없었다. 애초에 딱히 현실감이 없는 말이기도 했고.
그러나 창녀는 조금 달랐다. 엄연히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이다. 스스로를 두고 창녀라 말하려니 무의식 한 켠에 웅크려 있던 콩알만한 자존감이 필사적으로 만류한다.
비록 산산조각난 자존감일지언정 그녀가 최후의 보루를 넘지 못하도록 공포를 딛고 분전했다.
아마 마지막 신념까지 내려놓는 순간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걸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두고볼 현우가 아니었다. 그녀의 무의식이 저항한다면, 한 번 더 찍어누르면 그만.
그깟 어설픈 저항따위, 장렬한 전사도 아닌 비참한 개죽음으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나보고 말은 그냥 말일뿐이라고 했던 사람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냥 연기잖아. 말 몇 마디 한다고 진짜 창녀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현우는 우선 그녀의 의식부터 설득했다. 무의식의 격렬한 저항을 단숨에 예민함으로 치부해버리도록 만든다.
별 것 아닌 연기라 속삭이며 무의식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도록 교묘히 선동한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반쯤 넘어왔음이 확실했다.
마지막까지 반발한다면 장난이 과했노라 사과하고 적당히 끝낼 생각이었지만, 지금처럼 그녀가 자신이 만들어놓은 트랙 위에 기꺼이 몸을 올린다면...
"네가 그러니깐 나까지 무안해지네."
그녀가 그 트랙을 질주하게끔 한 발의 총성을 쏘아올리면 그만이었다.
현우가 정색하며 힐난하는 어조로 중얼거리자 혜지는 지금까지의 모든 고민을 제쳐두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주인님, 그런게 아니라... 멘트를... 멘트를 생각한다고 그랬어요. 죄송해요. 다시 할게요."
현우에게 허겁지겁 사과하며 입꼬리를 올려보이는 혜지. 그녀가 처음에 지어보이던 환한 미소가 창백한 얼굴에 다시 자리잡았다.
움푹 패인 볼 보조개와 싱그러운 눈웃음이 시선을 잡아끌지만.
그건 더이상 순수한 소녀의 미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이 한순간에 손님을 접대하는 창부의 미소로 전락했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지독히도 참혹한 말들을 입에 담았다.
"저, 아니... 정액변기년은... 주인님이 언제든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창녀...에요. 주인님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전용 창녀에요."
그렇게 그녀의 신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