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여덟 번째 과외 - 미치게 보고싶은 3
라디오 부스의 분위기는 시크하신 수정이 덕분에 거침없이 숙연해졌다. 모두 고개를 떨구고 그녀의 드립에 경의를 표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는 양손으로 가위질하는 제스쳐를 했다. 피디누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무렇지 않은 듯 새롭게 연기를 하면 되겠지.
"수정아, 흥분하지마."
"그래도! 우리 오빠한테 저렇게 반말 찍찍하며넛 꺼지라고? 나한테 누나라고 할 정도면 진짜 어린거잖아, 오빠 욕하면 가만 안 둘거야. 씨잉."
아이고, 골이야. 공식 석상(방송상)에서 막말하는 청취자들이 잘못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인가. 심심타파 하차를 하루 앞 두고 기념하는 몰래카메라인가. 결론이 어찌 되었든간에 나는 머리가 아팠다. 혹시 몰라서 페로몬 주사까지 다 맞았는데. ㅎ아, 머리야.
"수정아, 방송이잖아. 화내지 말자."
"씨이, 내가 민식이 오빠랑 진리 때문에 참는다."
수정이는 열이 받긴 받았는지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열심히 화를 냈던 수정이는 떨궜던 헤드폰을 다시 줍고는 귀에 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청취자에게 통화 연결을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언니드으으을!]
경쾌한 여학생의 목소리였다. 이 정도의 풋풋함이라면 내가 끼어들어도 전혀 상관없이 물 흐르듯 진행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아까의 신선했던 충격을 잊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 이 징그러운 목소리는 뭐야…우웨에에엑."
일부러 토하는 듯한 여학생의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심히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기분 하나 째지네. 겨우 참고 재치있는 생각을 하려던 순간에 진리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목격했다. 설마…
"설리씨?"
"니 목소리는 역겹거든!?"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나는 팔로 X자를 만들며 방송중단을 요청했다. 방송이 강제로 종료되자마자 나는 손으로 눈과 코를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왜 이렇게 힘드냐,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진리도 자기가 한 말에 깜작 놀랐는지 당황해하다가 디제이인 나한테 '미안해, 오빠'라고 말했다. 진리를 타이를 순 없으니 속으로 삭히는 수 밖에 없다.
"피디누나, 그냥 통화연결 인맥이랑 전화하는 걸로 바꿔요."
나의 제안에 피디누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랑 통화할까, 라고 생각하다가 한 여자가 떠올랐다. 나는 통화하기에 앞서 사전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곧바로 답장을 했다.
[오키.]
다행이었다. 방송이 펑크나면 어쩌나, 했는데. 안심하며 라디오 진행을 하려고 할 때 메세지 하나가 더 날아왔다.
[너 오늘 나랑 같이 시상식 진행하는 거 알지?]
[아 맞다. 좀 있다가 거기서 봐.]
[히히.]
나는 라디오 부스 밖을 향해 엄지와 검지를 말아 오케이 제스처를 취했다. 피디 누나는 부스 밖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오늘 방송은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어서 누가 통화를 거는 지도 모른다. 나는 라디오 방송용 핸드폰을 들고서 내 핸드폰으로 미영이 전화번호를 찍었다. 늘 그렇듯 컬러링으로 소녀시대 노래가 들려왔다.
[여보세요오?]
"언니!"
[어, 수뎡아!]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로 전화를 받은 미영이는 내 인사 대신 수정이의 인사를 받았다. 수정이도 친한 언니와 통화를 하게 되서 기분이 좋은지 말 걸면서도 신나하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티파니씨."
[어, 시그 디제이네, 하이하이.]
"…그렇게 부르면 안 오글거려요?"
[히히, 네에!]
항상 해맑아서 좋은 미영이였다. 우울한 모습은 미영이의 어머니 기일 때 납골당 갔던 것을 빼면 없는 걸로 보였다. 언제 미영이랑 단 둘이서 밀월여행을 가볼까. 소녀시대 애들이 지금은 열심히 활동 중이니 나중에 기회를 봐야겠다.
미영이 덕분에 두 청취자와 두 연예인이 펑크낸 분량을 채울 수 있었다. 나는 라디오가 끝나고 다음 스케쥴 떄문에 먼저 간 에프엑스와 안녕,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헤드폰을 벗고 라디오 부스를 둘러보았다. 내일이면 마지막이니까.
천천히 라디오부스 밖으로 걸어나왔다. 피디누나가 서운한 얼굴로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후임은 찾았어요?"
"…어. 대타로 초롱이 쓰려고."
"풉…그렇게 25주 연속으로 승리하다가 성시경씨한테 지더니. 초롱이도 한은 풀었네."
"초롱이 혼자 하기는 좀 그런 것 같아서 같은 그룹 멤버 하나 더 쓸 것 같아. 이름이 뭐였지? 아, 맞다. 은지."
"정은지? 걔가 요즘 드립이 되긴 하지."
나는 심심타파 스태프가 된 것처럼 후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초롱이는 평소에 DJ를 하고 싶었다고 노래와 노래를 불렀으니 그렇다 치는데 진행력이 좀 부족해서 노심초사했었다. 근데 같은 멤버인 은지와 함께 더블 디제이를 하면 같은 팀이라서 협력도 되고 어찌 되었든간에 진행이 안정적으로 흘러갈 듯 했다.
"너는 영화 곧 크랭크 인 한다며?"
"네. 시사회 할 때 초대 할게요."
"그래, 그 때 되면 라디오 출연 해라, 누나 얼굴 봐서라도."
"풋, 당연하죠."
나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피디 누나에게 너스레를 떨며 재치있게 대답했다. 피디 누나도 내가 우울해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답해주니까 기분이 좋은가보다. 곧 있으면 라디오 꽁트를 제외한 내 인생의 첫 연기 도전인데, 욕 먹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긴장이 되었다. 2012년 1월에 크랭크인 한다고 했으니까 몇 일 안 남았다. 아오, 떨리네.
"아, 맞다. 너 MBC 연예대상 신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됐더라?"
"…예? 제가요? 제가 뭘 했다고…"
"맞아, 한 게 없는데 왜 노미네이트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농담도 참."
"진담인데?"
나는 피디 누나의 어깨를 툭 치며 왜 이러냐고 아양을 떨었지만, 피디 누나는 자신의 어깨에 올라간 내 손을 툭 쳐서 떨어뜨리면서 장난같은 정색을 빨았다. 근데 표정 봐서는 진담인데? 젠장.
+
[연예대상 MC 대기실]
"휴, 여기인가. 생방이라서 무지하게 떨리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의 매니저 형하고 코디네이터 누나들이 없어서 준비하느라 꽤나 고생했어을텐데 요즘은 집에서 편하게 나오면 알아서 내 머리와 코디를 정해주니까 걱정이 없었다. 한 5년은 젊어진 느낌이랄까. 근데 5년 젊어지면 고2다.
"오, 민식이다. 우리한테 저녁 서포트 왔는데, 너도 먹을래?"
"내 팬은 뭐하나, 나를 위한 서포트를 안 해주고."
"소원(S♥NE)이 우리 것만 준비한게 아니라 다른 MC 것도 준비해놨는데? 자, 먹어. 이건 니꺼. 열어보니까 스테이크더라. 우린 샐러드랑 떡갈비인데. 누구 팬인지 모르겠다."
유리는 마치 자기가 준비해서 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유리의 하소연대로 열어보니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있었다. 이건 필시 아웃X 혹은 빕x 같은 곳에서 포장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유리 건너편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티파니가 없었다.
"유리야, 미영이는?"
"배탈나서 화장실 갔어. 그러게, 내가 아이스크림 많이 먹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추운데도 깝치면서 먹다가 그 꼴 난거지."
유리의 말에 미영이가 어떻게 행동 했을지 대충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유리야, 나 배 아파아아아아…' 라며 배를 움켜쥔 채로 인상을 찌푸렸겠지. 유리는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얼른 갔다와.' 하면서 온갖 잔소리를 미영이에게 쏟아부었을게 분명했다. 미영이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얼른 대기실을 빠져나갔을테고. 소녀시대를 2년 가까이 보게 되면 안 봐도 비디오다. 아니다, 지금은 2011년이니까. 비디오 보단 .avi 혹은 .mp4 파일이 옳은 표현일 듯했다.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 도시락을 반 쯤 비우고 있을 무렵 나지막한 소리로 문이 열렸다. 배탈 난 미영이의 등장이었다.
"어, 배탈 난 미영이 안녕."
"히잉, 민식이 너까지 놀릴래!"
미영이는 오면서 때찌, 거리며 나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이게 때찌냐. 펀치지.
"…유리야, 나 오늘 전치 2주로 연예대상 펑크낼 것 같다."
"오바 떠네. 대본이나 외워."
"…그르까?"
나는 뻘줌한 마음에 재빨리 대본이나 집었다. 나의 등짝에 구멍을 낼 뻔한 미영이는 재빨리 내 옆으로 앉았다. 나는 미영이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미영이가 반응했다.
"…왜애?"
"절로 가, 유리도 건너편에 있잖아."
"…히잉."
미영이는 입술을 돌출형 구강구조처럼 내밀면서 징징거렸지만, 유리도 잘 참고 있는데 미영이가 옆에 앉아서 다정하게 떠들다가 스캔들이 뜨면 그것만큼 곤란한 건 없었다. 회사 측에서는 최근 뉴스거리가 없기 때문에 스캔들이 뜨면 여자 측은 강하게 인정할테고, 남자 측은 마지 못해 인정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럼 이득을 보는 건 여자 측이고, 막대한 손상을 입는 건 남자 측이겠지. 뭔가 뻔한 결말이랄까.
그 때, 문이 스르륵 열렸다.
"생방송 준비해주세요. 10분 뒤에요."
시간 참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