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0화 (261/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쉰 세 번째 과외 - 비가 오는 날엔 2

"음…어디 갈래?"

"우리 집 가볼래?"

"너네 집?"

바닷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떼마냥 바쁘게 움직이는 차들의 모습을 보며, 나와 수연이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어서 녹색 불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신호등이 적색일 동안, 행선지를 정하는 건 우리의 평범한 센스였다.

"응, 우리 집. 한 번도 안 가봤잖아."

"…가도 괜찮아?"

"난 맨날 자기 집 놀러가는데, 뭐 어때."

나는 부모님이 멀리 타지에 계시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제각기 방문해도 별로 터치를 안 한 것이였다. 그치만, 수연의 집에 가보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예전에 수정이가 해줬던 말을 듣기로는 부모님이랑 같이 산다고 하던데.

"그리고, 오늘 부모님 안 오셔. 해외여행 오늘 가셔서, 일주일 뒤에 오시거든, 헤헷."

"그래, 수정이는?"

"수정이도 해외 스케쥴 뛰러갔잖아, 빈 집이야, 빈 집."

수연이의 얼굴에 꽃이 만발했다. 자신을 터치할 사람도 없거니와, 모종의 속셈이 숨겨진 듯한 표정이었다. 달달함 속에 가려진 꿍꿍이가 불안했다.

"아, 맞다! 우리 집 앞에 아쿠아리움 있는 데 거기도 갔다오자!"

"아쿠아리움? 수족관?"

"응, 수정이랑 몇 년 전에 간 게 마지막이였단말야. 가자, 응? 가자아아앙-."

수연이는 자신의 발달된 특정 신체부위를 유용하게 이용했다. 팔에 닿은 신체부위의 감촉에 나는 최음제를 먹은 마냥 기분이 좋아져 흔쾌히 수락했다. 나란 남자, 스킨십에 허벌나게 약한 남자랑께. 

"알았어, 가자."

"히힛, 자기 최고! 일루 와봐, 수연이가 뽀뽀해주께!"

키가 작은 꼬마 숙녀는 까치발을 들고, 여리고 하얀 손으로 내 볼을 잡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상큼한 오렌지향이 느껴졌다.

"엥, 웬 오렌지 맛?"

"히힛, 립글로즈 오렌지향이지롱. 또 맛 볼래?"

사람이 뜸했기에 망정이지. 벌건 대낮에 인산인해인 곳에서 이런 짓을 했다간 사회면 헤드라인을 커다랗게 장식할 수 있을 뻔 했다. 가끔씩은 얼어있는 것도 좋은데, 지금 수연이는 완전 설탕물이잖아.

"택시 탈까?"

"오늘은 부릉부릉 안 가지고 왔어?"

"응. 왜?"

"히잉…가는 동안 민식이 등에 편안히 기대고 싶었눈데에…"

수연이는 양 검지손가락을 맞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밤도 아니니까 참아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중에, 나중에 타면 되지."

"그치? 그럼 오늘은 민식이랑 나란히 택시 뒷자석에 앉아서 알콩달콩 이야기하면서 가야지이~."

이런 그녀가 어딜 봐서 1989년 4월 18일생이라고 할까. 5년 정도는 늦춰서 수정이나 설리랑 동갑이라고 해도 믿겠다. 물론 보이는 나이가 아니라, 정신연령으로…라고 하면 싸맞으려나.

+

"대인 2매 주세요."

"대인 2매 말씀이십니까, 고객님. 대인은 명당 17,500원이시구요. 총 35000원 되겠습니다."

'더치페이?'라고 뻥긋거렸으나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 뜻을 파악한 나는 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수만옹에게 받는 주급들은 다른 통장에서 차곡차곡 쌓아놓아, 나중에 수도권 부근에 내 집이나 장만하는 데 일조하기로 하고, 지금 쓰는 카드 잔여금의 대부분은 스스로 버는 것에 나왔다. 35000원이라, 평범한 알바생의 8~9시간 정도의 급여아닌가. 

"안에서 끼니는?"

"가위바위보로!"

"노노, 끼니는 수연이가!"

언제까지 내가 돈을 써야되나, 수연이도 가끔씩은 경제관념이 있는 여자니까 재미있게 끼니 때우는 건 그녀가 부담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그녀의 눈치를 보며 먹을 걸 골라야 되니까 싸게싸게 고르면 될 듯 싶었다. 

"끼니는 내가…?"

"응, 그 대신 들어갈 땐 자유로울 수 있게 내가 초대권 구입은 하잖아."

"알았어, 언제까지 민식이만 돈 쓰게 만들면 내가 나쁜 년이지."

헐, 수연이가 스스로를 자책하다니. 그래도 옹골지게 개념은 찬 보기 드문 여자라서 다행이였다. 어디 보자, 근래 들어 지 돈 안 쓰고 내 돈 쓰게 만든 여자애들이 몇 명이더라. 아, 근래는 수연이가 처음이구나. 

"이제 가보자."

"응."

+

"우와아아아…"

"쩐다."

서울로 올라온 지, 이제야 4년. 빡센 대학 생활에 치여있느라 이런 곳에 와볼 기회가 있을 리 만무했다.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으로만 보던 수중터널의 위엄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저거 봐봐!"

"…우와."

수연이의 손가락이 향한 포인트로 시선을 옮기자 집 안에 있는 카펫의 서너 배 크기 정도 되는 듯한 가오리가 거대한 지느러미를 나풀거리며 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을 쳤다. 가오리로 인해 조명이 비치는 대도 불구하고 그늘이 잠깐 생겼다가 사라졌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의 역동적인 모습처럼 움직이는 가오리에 그녀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나는 그 옆을 유유히 지나가는 위풍당당한 자태의 상어 한 마리를 보았다. 수연이라면 재미있는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연아, 저거 봐! 우와…"

"어디? 어디? 어딨는데?"

"저거."

"저기 뭐가 있길래…꺄아아아악!!"

퀸쏘를 보고도 떨지 않는 수연이가 상어를 보고 떠는 건 귀여운 애교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내 안에 쏘옥 안긴 그녀를 껴안으면서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푸른 물에 닿은 빛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그렇다고 수연이가 아프다는 건 아니다.

"푸훕…그게 그렇게 깜짝 놀랄 정도였나?"

"맨날 티비로만 보다가…실제로 보니깐…히익!"

어머, 정수연 내숭 좀 보게. 깜짝 놀랐다면서 가슴팍으로 더 깊게 파고드는 모습이 꽤나 노련미가 돋보였다. 이제는 얼음, 해빙을 넘어서서 자연스레 정여우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내가 크게 당하는 건 아니련 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하호호 해맑게 웃으며 터널을 다 건너자, 하얀 조명이 익숙하게 다시 공간을 채워갔다.

"야…"

"왜?"

"저기 지나가는 저 여자 누구 닮지 않았냐?"

수연이는 터널을 지나간 이후부터는 계속 팔짱을 낀 채 머리를 기대며 걷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썼고, 조명이 수연이를 비추고 있긴 했어도 할로겐 조명마냥 눈부신 조명도 아니고, 침실 조명같은 은은한 빛이었기에 우리 옆으로 스쳐지나가던 행인들은 수연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연예인 아무개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시카 아닌가?"

"으이구, 병신아. 제시카는 흑발이 아니라 갈색 머리잖아, 정신 좀 챙겨라, 상구야."

"아, 맞다. 미안, 히힛."

지나가는 행인들은 왜 저럴까,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뭐만 조금 가렸거나 바꿨다하면 저렇게 눈치를 채지 못하니…미련한 것도 아니고,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참 애매하다.

"히힛."

그러거나 말거나, 수연이는 이미 그런 반응을 양껏 즐기고 있었다. 하아…너란 여자, 항상 생각 그 이상인 여자.

"쟤네들 바본가보다, 시칸데 못 알아보네."

"히힛, 괜찮아. 아리까리한 반응이 더 재밌거든. 그리고 지금 알면 큰 일 나잖아?"

"그건 그래."

수연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사, 여기서 수연인 걸 알아버리면 저 행인들은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에요?'라고 질문공세를 쏟아붓겠지. 비밀로 하자고 해도, 사람 본성이 비밀을 감추려고 마음 먹으면 꽤나 고생하는 터고, 남 이야기를 어떻게든 듣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이 사람들이 sns를 조금이라도 해볼 줄 아는 자들이라면, 다음 날 인기 검색어 키워드에 '제시카'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건 시간문제다.

"펭귄이나 보러갈래?"

"응."

어느 수족관에나 가면 있을 법한 평범한 부스를 지나, 거의 마지막 부스라고 볼 수 있는 펭귄들이 있는 부스로 천천히 걸어갔다. 남극처럼 꾸민 허술하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은 펭귄 부스를 구경했다. 펭귄들이 뒤뚱거리며 몸을 흔들면서 걷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꺄아…귀엽다!"

수연아, 네가 더 귀여워. 같은 잡소리는 단칼에 속에서 잘라버리고, 아무 말 없이 수연이의 시선을 따라 펭귄을 쳐다보았다. 

수연이는 아담한 걸음걸이로 걷는 펭귄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펭귄은 수연이가 이쁜 건 아는 지는 몰라도 그녀를 향해 뒤뚱뒤뚱 걸어오다가 그만 미끄러져 바닥에 팔딱 넘어졌다.

"어머, 어떡해…펭귄 쓰러졌어."

"일어나겠지, 봐봐."

넘어진 펭귄은 일어나기 위해 날개를 바닥에 맞대며 아둥바둥거렸지만 쉽게 일어나지는 못했다. 옆에서 뒤뚱뒤뚱 걷던 펭귄이 도와주나 싶었지만, 상황이 우습게도 흘러갔다. 넘어진 펭귄의 친구가 짧은 부리로 넘어진 펭귄의 매끈한 등을 콕콕 찔러댔다. 그런 펭귄의 모습을 보고 화장품 광고에서 흔히 하는 멘트 두 개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라던가 '피부가 장난이 아닌데? 으헿으헿을 발랐을 뿐인데…'같은 거랄까.

"야, 괴롭히지말고 저리가! 휘이~ 휘이~"

수연이는 넘어진 펭귄에 감정을 이입했는 지, 마치 자신이 그 펭귄이 된 마냥 핸드백을 든 팔을 내저으며 넘어진 펭귄을 괴롭히는 펭귄을 쫓으려고 시도했다. 괴롭히던 펭귄은 탁한 눈빛으로 수연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펭귄에서 멀리 떨어져 도망갔다. 

"헤헤, 갔다아!"

괴롭힘을 당하던 펭귄은, 괴롭히던 펭귄이 저 멀리 가버리자 다시 날개에 힘을 주며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게 날개를 가지런히 배에 모으더니 고개를 아래로 까딱거렸다. 

"수연아, 저 펭귄이 너한테 인사하는 거 같은데?"

"에이, 설마. 펭귄이? 히힛."

나는 같이 이런 장면을 목격한 수연이에게 아까 그 펭귄이 너한테 인사 하는 것 같다. 라는 식으로 말하자,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그저 해맑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흐음…기분 탓인가."

"이제, 볼 거 다 봤으니까, 나가자. 배고픈데 우리 집 가서 밥 먹자."

수연이의 말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코엑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우중충한게 무언가 내릴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런 날씨일 줄 알았으면 우산을 챙겨오는 건데.

"히힛, 기분 좋다."

"왜?"

"데이트잖아. 수족관도 오고, 펭귄이 나한테 인사도 하고, 간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날 못 알아봐!"

수연이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정말 구름이 개고 난 뒤의 맑은 푸른 색의 하늘을 보는 것 같다.

"좋아?"

"응!"

"근데, 그거 안 좋은 걸지도…"

"에이, 뭐 어때. 머리 색깔만 갈색이나 노랑색으로 바꾸면 다시 알아볼텐데."

수연이가 이렇게 낙천적인 성격이였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면 봄 특수를 맞아 새롭게 업데이트한 그녀의 신상 캐릭터!? 정여우, 정순서, 정겸디, 정시레라는 별명도 부족해서 별명을 하나 더 추가하려고…부리는 수작일까. 아, 의미없는 개소리인가.

"어?"

"어?"

갑작스런 그녀의 낙천적인 모습도 잠시, 버스 정류장을 약 백 미터 가량 남겨두고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짜놓기라도 했다는 듯 일제히 자신의 겉옷을 벗어, 팔을 들어 비를 잠깐 막는 데에 급급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행동했다. 그래도 장대비처럼 내려오는 소나기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이 축축하고 기분 나쁘게 젖어갔다.

"히이…다 젖었다아…"

"응? 안 돼!"

그녀의 혼잣말에 무슨 소리나, 싶었는 데 하얀 그녀의 상의가 의도치않게 시스루룩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기도 전에 그 스타일을 발견한 나는 젖었지만 그녀의 옷을 가릴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겉옷으로 그녀의 옷 위를 감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급히 껴안았다. 다른 사람의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지거나 말거나, 그런 시선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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