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쉰 두 번째 과외 - 비가 오는 날엔 1
"으아아…"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는 눈물나게 피곤한 기지개 피는 소리와 함께 난 또 다시 아침의 따가운 햇빛을 마이웨이형(네이버 검색참고)으로 받아냈다. 근데 받아낼만한 햇빛님이 안 보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3시 40분…으아아?
"학교 갈 준비나 해야지…."
나의 학년은 3학년, 현재 날짜는 4월 초, 적절하게 대학의 중간고사가 비스무리하게 시작하는 시즌이다. 아니면, 우리 교수님께서 너무 빨리 보시는건가,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험일까지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빨리 쇳덩어리보다 더 무거운 대학교재들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해야했다.
"…쏴아아아…"
새집을 튼 머리카락 뭉치들은 물에 닿자마자 풀이 죽어 쏟아지는 물줄기에 의해 흐트러졌다. 샴푸액을 손바닥에 놓은 나는 풀어지기가 무섭게 머리카락 위에 얹고 마구잡이로 비비기 시작했다. 눈두덩이 위로 거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만약 이 상태에서 눈을 뜬다면 헬게이트를 경험할 수 있었기에 완전히 거품물이 씻기기 전까지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있는 동안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벌어졌던 일을 하나 둘씩 생각했다.
+
"앞으로 그러면 진짜 가만 안 둘거야?"
"…뭐, 뭐를?"
규리누나는 처음 봤을 때 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살가워졌다. 이제는 스킨십도 스스로 서슴없이 한다는 게 내게 불안의 뿌리를 심어주었다. 그것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고목처럼 말이다.
"여보세요?"
[오빠, 저 선화예요! 저 핸드폰 없는 거 아시죠? 그래서 친구꺼 빌려서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했어요!]
"…왜?"
[오빤 여자 취향이 뭐에요? 피부 하얀 여자 좋아하나?]
시크릿에선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 여자는 바로 선화. 초면일 때부터 '하얀 여자 좋아해요?'라고 물어봤던 그녀였다. 그 때 당시에는 방송을 위해서 날린 멘트에 불과했지만, 그 방송은 이미 종영했고 나와 그녀가 통화하는 지금 이 장면은 더 이상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사생활이었다.
"…조금은, 근데 선화도 핸드폰은 아니더라도 스마트기기는 가지고 있을 거 아냐? 톡 어플로 보내면 안 되냐? 요즘은 음성메세지 보내기도 있잖아."
[에이, 그건 시간 좀 걸리잖아요. 그래도 이게 더 낫지. 나머지 애들하고 언니랑도 친해지셨어요?]
"…조금은."
이제 시크릿 고정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3일 째인데, 3일 사이에 통틀어서 겨우 세 시간 보는 아낙네들과 그리 쉽게 친해질 리가 없었다. 그나마 어색어색열매 안 빨고 만날 수 있는 게 선화였으니까.
"여보세요?"
[김민식씨 맞으시죠, 저희는 소월기획사입니다. 프로그램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저희와 함께 할 생각 있으세요?]
"아, 죄송하지만 지금은 연예계에 관심이 없어서요."
요즘엔 이런 전화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돈을 벌어도 혼자 고생하면서 수당을 다 챙기는 게 낫지, 뭣하러 기획사 들어가서 수당을 다시 분배해야하냐 말이다. 더군다나 방송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치면, 스치면 나타나는게 여자 연예인. 그리고 스치면 나오는 게 페로몬이다.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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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론은 대비 끝이다. 흠, 시험이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까 슬슬 나가서 아침이나 먹으며 하루를 시작해볼까."
한 3시간 30분 정도는 줄기차게 공부한 것 같은데, 아직도 8시가 되지 않았다니. 내가 얼마나 잉여스럽게 일찍 끝났는 지 충분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아침은…편의점 가서 때울까."
가방이 털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흔한 종류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털래털래 캠퍼스 안의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갔다. 캠퍼스 안에 편의점이 있었으므로 거기서 대충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해야겠다. 스마트기기에 이어폰을 꼽고, 이어폰을 다시 귀에 꼽았다. 이루마의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조용한 새벽의 캠퍼스의 분위기를 유유히 흔들었다.
"3000원이요."
"여기요."
여량의 잠을 완전히 떨치기 위한 커피와 편의점용 참치김밥 두 줄을 들고서 캠퍼스 내 잔디밭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새벽이고, 아직 늦봄도 아니고 하니 은근히 쌀쌀했다. 더군다나 일요일이라서 기숙사동 근처가 아닌 이상 나머지 길은 거의 휑하다 싶었다. 김밥 두 개를 입 안에 넣고 으물으물 씹었다. 우연히 내 옆으로 갈색 머리를 한 여자가 지나갔다.
"…시카?"
라고 생각했으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눈치를 못 채게 은근슬쩍 흘겨보니 시카는 무슨 그저 흔한 외모의 일반인이었다. 갈색머리하면 바로 시카가 생각나다니. 금발이었으면 시카라고 생각하고 바로 뛰어가서 장난쳤겠지만. 내가 아는 시카는 지금 일어나는 것 자체가 기적인 그런 여자. 그래도 전화 한 번 정도는 해볼까, 생각했다.
[헤에…여보세요오…]
"어? 잠순이가 깨어있어!?"
아직 잠이 달아나지 않았는 지, 본의 아니게 목소리에 애교가 가득 차 있는 시카였다. 나라서 그렇겠지…딴 사람이었으면 애교보단 짜증이 넘쳤을 거다. 그리고 통화대기시간이 조금 길었다시피 했으니, 아마도 모닝콜인 줄 알고 깨긴 깼는데, 확인해보니 내 전화였고, "!?" 라는 감정이 덜컥 든 시카는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고 활짝 핀 웃음꽃을 얼굴에 지닌 채로 전화받았을 게 확실했다. 그래도 지금 잠에서 깨다니, 더럽게 신기하네.
[…당연히 잤지이…]
"언제 깼어?"
[니가 전화해서…히힛…]
아아, 시카가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는 건가. 매번 미안하긴 하지만, 감동 또 감동이다. 요즘 소시 애들이 왜 이렇게 내게 서정적인 감성을 풍부하게 주는 지 모르겠네. 나중에 소녀시대 아이들이랑 같이 어딜 가서 놀든가 해야지. 내 몸이 아주 피곤하겠지만, 그것도 감수해야지.
[왜 전화했어?]
"오늘 스케쥴 어때?"
이제 스타일링이 생활화되는 나는 도서관 가는 데에도 머리 세팅을 열심히 했기에 오랜만에 잘 된 머리를 집으로 들어가 따뜻한 온기에 썩히기에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그러니, 데이트라도 조금 해서 스타일링 한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해야지.
[…흐음…없는데 왜?]
"소시가 요즘 많이 쉬네."
[단체 활동은 하려면 시간 좀 남았고…다들 개인활동 하느라 바빠서, 난 개인활동이라고 하는 건 가끔 가다 잡지화보 찍는 거라서 거의 없지롱, 히힛.]
시카가 티비에서 왜 이렇게 뜸했는 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제시카, 너란 여자. 은근히 일 하는 건 귀찮은 여자고, 쇼핑이나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은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은 여자구나. 지난번에도 순서드립이란거나, 그런 것으로 나에게 야무지게 재미를 줬으니 오늘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구나."
[근데, 왜?]
"데이트하자."
[꺄아아아악-!]
"푸훕…"
데이트 신청하는 게 그리도 기분이 좋은가, 핸드폰 스피커 밖으로 둔탁한 충돌음이 들린 것을 보니, 내 말에 놀라서 핸드폰을 마루바닥에 떨어트렸다고 대충 생각했다. 거기다가 비명까지 지르다니. 시작부터 그녀의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아, 시카. 시트콤 찍으면 잘 하겠네.
[히히, 미안. 너무 놀라서. 윤아 깨겠네, 그럼 어디서 만날까?]
"니네 숙소 편의점 앞에서 기다릴게. 거기까지 가려면 한 1시간 정도 걸리니까."
[알았어, 그 때까지 준비 다 하고 있을게에.]
"그래야지. 그럼 끊는다?"
[잠깐, 잠깐!]
핸드폰의 통화종료버튼을 누르려던 그 순간, 시카의 급한 목소리가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들려왔다. 난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그녀가 뒤이어서 할 말을 듣기로 했다.
"왜?"
[뽀뽀 해줘야지, 뽀뽀!]
아, 귀찮지만 시카의 애교섞인 부탁이니 들어줘야겠다.
"쪽!"
[쪽!]
지금이 크리스마스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크리스마스였으면, 이것을 쓰고 있는 작가를 비롯해서 이것을 읽고 있는 독자들,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솔로들이 이것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기기를 모조리 던지거나, 혹은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다행히 나는 솔로가 아니여서 말이야, 키킥. 돈 좀 나가도 얘들이 다 사랑스러운데, 돈이 나가는 지도 모르겠거든. 근래들어 경제관념을 까먹어버린 것 같아. 그리고 나말고 여자친구들도 돈 충분히 벌고 있어서, 어차피 내는 건 거의 더치페이랄까.
* 더 이상의 민식의 독백은 분노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편집하겠습니다.
+
"…흠,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나도 은근히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나보다. 1시간 걸리겠다고 했는데, 오늘따라 길이 안 막혀서 5분 더 남아서 그런걸까. 입 안이 심심했던 찰나에, 다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김밥 몇 개를 시카가 오기 전까지 입 안에 털어넣었다. 흐흠…김밥이 부서지면서 참치와 마요네즈의 알흠다운 조화가 내 혀에 녹아들며 절로 침이 고이게 만들었다. 아, 굳쟙. 乃
"시카가 오기 전에 커피 두 캔이나 사서, 하나는 시카 줘야지."
시카가 좋아하는 건 아메리카노…따윈 아침에 씁쓸해서 입맛이 땡길리가 없으니, 카라멜 마끼야또로 통일. 마끼야또 특유의 달달한 맛처럼 달달한 분위기로 오늘 데이트를 즐겁게 하는거야. 그리고, 달달한 데이트를 하고나서 라디오를 하러 가는거지. 오늘 스케쥴도 이렇게 확정이다. 카라멜 마끼야또 두 병을 구입한 뒤, 편의점 문을 나오자 바로 앞 횡단보도에서 검은 머리를 한 여자가 촘촘히 박힌 리본 패턴의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를 입고,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핸드백을 든 채로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빙긋 미소를 지으며 살랑사랑 손을 흔드는 그녀, 시카였다.
[딩동, 녹색불이 켜졌습니다. 건너가도 좋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녀와 가까워진다. 짜증도 행복으로 바뀌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그녀가 점점 가까워진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나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반가워했다.
"오, 수연이. 머리색 바꿨네."
"히히, 역시 자기가 최고야. 머리 색 바뀐 거 바로 알아봐주네."
정말 눈에 띄게 색깔이 바뀌었으니, 알아봐주는 건 당연지사. 비록 선글라스를 쓰긴 했지만 나름대로 상큼하게 보이려는 지 옅게 한 그녀의 메이크업은 청순한 스타일에 맞춰져있었다. 청순상큼한 스타일링에 발랄한 성격이라니. 오늘 데이트는 카라멜 마끼야또처럼 무지하게 달달할 것 같다.
"안 이상해?"
"전혀, 검은 머리로 바뀌니까 무지하게 청순해졌네."
"힛, 언제는 안 청순했나? 안 이상하지?"
그녀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 안에 움켜쥐며 바뀐 헤어스타일에 대해 계속해서 물어보았다. 거의 4년만에 돌아온 흑발인만큼, 그녀도 조금은 신경쓰이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걱정할 필요없이 너무나도 괜찮았다. 차라리 검은 머리카락으로 계속 활동했으면 좋았을 것을…라고 혼자 생각했다. 시카의 청순함은 예전 파니의 검은 머리로 염색한 것보다 더 눈부시달까. 그 때는 염색하자마자 침대로 강제로 끌려가서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응, 이뻐. 그것도 많이. 진짜 동양인 같아."
"뭐야? 그럼 전에는?"
"음, 서양인?"
"칫."
"그래도 괜찮아, 수연이니까 다 이뻐."
그녀의 갸냘픈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도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깍지를 끼며 웃었다. 아,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너무 오글거렸나. 그녀와 닿지 않은 왼손은 심하게 오그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