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9화 〉 729. 또 다른 신수(4)
* * *
“아….”
눈앞의 광경을 확인한 에린은 작게 탄식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백귀들의 숫자는 도합 백.
무시무시한 투기로 어우러지는 흑색의 마력을 발산하면서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는 백귀들의 위압감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피부를 오싹하게 만든다.
백귀들 하나하나가 모두 강력한 기세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굳이 검을 부딪치고 전투를 해보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 있었다.
전율하여 동요했던 마음을 다잡고, 낙법의 자세를 취했던 몸을 일으켰다.
“…….”
레반테인의 손잡이를 꽉 쥔 손에 힘을 싣고는 검은 백귀들의 중심에 있는 구미호를 응시했다.
이 무수한 숫자들의 백귀들을 눈앞에 두고도 기가 죽기는커녕 아직도 이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눈빛은 구미호의 심기를 계속해서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뭐?”
“미천한 네 녀석이 나의 요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너에게 요술을 가르친 누군가가 있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것은 이 차원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밖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호족을 포함한 신수라는 존재 자체는 이미 지구가 멸망해버리면서 함께 멸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에린에게 요술을 가르쳤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것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구미호밖에 없다.
즉 이 차원의 구미호는 에린이라는 존재에게 강탈했던 육체를 돌려주고, 나아가 신수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을 정도로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는 뜻이 된다.
“너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구미호는 그 가능성을 단번에 부정했다.
이 차원의 에린은 몰라도, 구미호가 육체를 강탈한 ‘에린’이라는 여성은 무척이나 멘탈이 약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자신에게서 가족들을 빼앗아가고, 평민이라는 천한 신분이라며 무시당하고 핍박받으며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해지고 갉아 먹혔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불만을 품으며 세상을 증오했지만, 정작 그 마음을 외부에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계속 쌓아두었던 한심하고 나약한 여성.
“너 또한 이 세상에 강한 원망과 증오를 품고 있었을 터.”
“…….”
구미호가 그녀의 육체를 강탈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오빠가 사라지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에린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원에 있는 눈앞의 에린이라는 여성은 어떠한가.
매우 강직하고 올곧으며 불합리한 것에 저항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온몸으로 표출한다.
“도대체 그렇게 기를 쓰고 사람들을 지키려고 발악하고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
에린의 과거사를 단편적으로라도 알고 있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의문.
같은 존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건가?
그 차이와 원인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도대체 이곳의 에린과 구미호는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과정이 있었기에 자신의 차원에서 있었던 일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너는 모르겠지.”
“흠?”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
에린이 은현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고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사회’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조금씩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 에린이 페르니아스 왕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느낀 감상은 ‘개판’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왕국을 이끌어가야 할 나라의 귀족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는 남의 권력과 이익을 탐내어 서로를 헐뜯고 견제하며 자기들끼리 싸우기를 반복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아래의 사람들이 어떻게 되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왕국은 점점 부패하며 스스로 국력을 약화시키는 어리석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흐름의 지름길로 치닫고 있었으니 개판이라는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릴 정도였다.
한때는 에린도 의문을 가졌었다.
“왜 지켜야 하는 걸까? 왜 구해야 하는 걸까? 왜 도와야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하여 에린이 답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돕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에린에게 도움을 받고 그녀에게 호의를 보여왔던 모험가들.
웃으면서 자신에게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손에 쥐어주었던 상점가의 아주머니.
꼬치구이를 구매하면 서비스라면서 몇 개를 더 얹어주었던 인자한 노점 아저씨.
그리고 자신을 잔뜩 이뻐하고 사랑해주는 은현이나 다른 아내들.
에린이 돕고 싶은 이들은 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지금까지 키워주고 내 사랑을 받아 들여준 현이한테 평생을 보답하고 싶어.”
사실 에린이 이렇게 기를 쓰며 노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하계 자체를 지키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은현을 뒤에서 지지하고 받쳐주기 위한 아내로서의 노력이다.
“…현이?”
구미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풀어진 웃음으로 에린이 입에 담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적어도 멸망해버린 자신의 차원에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
“역시 너는 미호랑 달라.”
“…뭐라고?”
“이야기를 해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너는 내가 아는 미호가 아니야. 그러니까….”
에린은 다시 한번 레반테인의 칼날 끝을 먼 거리에 위치한 구미호에게 겨누며 자신있게 말했다.
“확실히 너를 이길 수 있겠어.”
이 구미호는 에린에게 요술을 가르친 이곳의 구미호와는 전혀 다르다.
그 시작점은 같을지라도, 생각하는 사고방식, 마음가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설령 미숙한 자신을 혼내고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구미호는 자신이 신수라는 것에 대한 확고한 프라이드가 있다.
하지만 눈앞의 구미호는 그저 수백, 수천만의 인간들을 학살하고 그 인간들에게서 정기를 흡수하여 혼탁한 마력으로 힘을 키워낸 학살자에 불과하다.
에린은 그 차이를 명확하게 파악했고 마음을 확고히 다졌다.
저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구미호가 아니라, 적이다.
“…쯧. 그래. 쓸데없는 대화가 길었군. 그냥 죽여버리고 이 차원도 멸망시켜버리면 될 것을.”
자신의 차원과 이 차원의 차이점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 때문에 시작된 대화는 구미호에게 유익한 대화가 되기는커녕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심기를 거스르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에린은 자신의 여우불들을 전방에 흩뿌려 요술을 발동시켰다.
[호족 요술(?? ??)]
[백귀야행(???行)]
구미호와 마찬가지로 에린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백귀들을 소환했다.
에린이 만들어낸 푸른색의 여우불들이 점차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잠시, 이윽고 사람의 형태를 갖춰나가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충직한 기사들.
“하하! 싸움인가!?”
“흐음.”
곧바로 에린의 부름에 응하여 소환된 백귀들은 벌써부터 어떤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인지 잔뜩 기대하며 호전적인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들 중 다른 백귀들을 통솔하는 지휘관 격의 검사 백귀.
아서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들은….”
“그래. 너 또한 백귀들을 부릴 수 있다는 건가.”
아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검은 백귀들의 중심에 서있는, 에린과 똑같은 얼굴을 한 신수의 모습이다.
아니 저것은 신수라고 해야하는 것일까.
그녀가 품고 있는 힘은 한없이 탁하고 어둡다.
영험한 신수(??)라기보다는, 귀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아서는 자신을 포함한 백귀들과 에린을 둘러싼 백 명의 흑기사들이 자신과 같은 본질을 가진 백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를 포함한 다른 백귀들 또한 마찬가지로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하하! 이번 상대는 우리랑 같은 백귀들이라는 건가!”
“재미있겠군.”
“다들 아직 대기.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백귀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으려 했던 트리스탄과 퍼시벌을 제지한 것은 아서였다.
명령을 기다리기 위하여 자신의 주인에게로 흘끗 시선을 옮긴 아서는 곧바로 에린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조리 죽여라.”
“백귀님들! 부탁드릴게요!”
동시에 양쪽 진형의 퀸에 해당하는 신수들이 자신의 종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하여 전투는 시작되었다.
“하하! 어디 한번 어느 쪽이 먼저 깨지는지 붙어보자고!”
위압감은 당연히 백이라는 숫자를 가진 구미호의 검은 백귀 쪽이 우세.
하지만 에린이 여신에게서 부여받은 권능으로 인해 과거 생전의 육체를 되찾은 에린의 푸른 백귀 쪽은 그 위압감에 밀리지 않을 만큼 흥분과 소란스러움을 표출하며 전투에 돌입했다.
모든 푸른 백귀들이 검은 백귀들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꿀리지 않고 전투에 임했을 때, 에린은 흘끗 자신이 소환한 백귀 하나의 눈치를 봤다.
“저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수의 마력에 종속된 백귀라고는 하지만, 에린이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눈치를 봐야만 했던 이유는 그녀가 은현에게 검술을 가르친 시에테이기 때문이다.
“대스승님? 부탁이….”
“알고 있다.”
시에테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에린의 말을 끊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자신의 검을 뽑았다.
“상황은 대강 파악했다. 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저것은 아마도 다른 차원에서 온 것이겠지.”
“어…. 네…? 그걸 어떻게…?”
에린은 아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시에테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예전에 일리아나에게서 직접, 다른 차원의 또 다른 자신이 이곳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듣고,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도움을 요청했던 것을 시에테가 받아들였다는 자세한 정황을 에린은 모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번에는 도와주마.”
“아! 감사합니다! 대스승님!”
“하지만 내가 처리해줄 수 있는 것은 저 검은 백귀들까지가 한계다. 저것은…. 네가 직접 처리해라.”
구미호의 처리는 에린에게 직접 맡기겠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큰 조력이다.
“네! 알겠습니다!”
에린은 곧바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에린과 구미호의 청색과 흑색 백귀들의 양상은 당연히 흑색 백귀들이 우세했다.
구미호의 흑색 백귀들은 그녀가 아르케나 대륙의 인간들을 학살하면서 강력한 전력을 가진 전사들의 혼을 수집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전사들.
하나하나가 백전연마의 사선을 거친 강인한 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열세에도 불구하고, 에린의 청색 백귀들은 쉽게 굴하지 않고 흑색 백귀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카아앙!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무기와 무기, 그리고 갑옷의 철과 충돌하는 격렬한 금속의 소리들.
한 명당 적게는 여덟부터 많게는 열둘까지, 혼자서 많은 흑색 백귀들을 향해서 공격을 퍼부으며 치명적인 데미지를 주고 있는 청색 백귀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데미지가 누적되는 것은 당연한 전개다.
“하앗!”
하지만 에린의 백귀들은 그런 전개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호전적인 미소를 띄우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부활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이들.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전쟁터에 서는 것을 바라며 백귀가 된 그들은 오히려 이 불리한 형세 자체를 즐기며 필사적으로 전투를 펼쳤다.
그리고 그 난리 속에서 ‘숫자의 우위’라는 간단하면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을 깨부수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개인이 전장에 난입했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의 바람]
전장에 불기 시작하는 그 선풍이 흑색의 백귀들을 한 번씩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그들에게 그어지는 무수한 수십 개의 참격들.
이윽고 흑색 백귀들의 형체가 기사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검은색의 불꽃으로 퇴화하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 몇십의 흑색 백귀들을 단번에 정리해버린 그 아름다우면서도 매서운 검격의 연속을 간접적으로 체감한 백귀들은 감탄했다.
특히나 그녀와 같은 장검을 사용하는 아서는 시에테가 보여준 기술의 정점을 두 눈에 담으며 전율할 정도.
“감격스럽군.”
전황은 개인이 가진 압도적인 폭력에 의해 빠르게 뒤집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