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8화 〉 708. 신전 복구(1)
* * *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
은현은 침대 위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는 두 아내들을 바라보았다.
잠옷은커녕 속옷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상태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으며 곤히 자고 있는 광경은 굉장히 요염했다.
마치 여동생의 언니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굉장히 친숙하고 애정이 넘쳤다.
그 광경에 작게 쓴웃음을 짓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내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하게 에린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주면, 엘레노아의 가슴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잠들어 있던 에린이 조금씩 뒤척였다.
“으응…. 히히.”
자면서도 은현의 손길을 느낀 것일까, 에린은 헤벌쭉한 웃음을 흘렸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행복한 꿈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은현은 침대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들을 두고 방을 나왔다.
아직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신전 본교 내부는 창문으로부터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최소한의 경비 병력으로 지켜지고 있는 본교 건물은 굉장히 조용하고 시원했다.
“엘빈.”
아무도 없는 복도 건물을 걸으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은현은 조용히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은현의 뒤에 생겨난 그림자가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스멀스멀 위로 올라와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은현과 일리아나에 의해 인공적으로 탄생한 그림자 정령이자, 에린의 오빠인 엘빈이었다.
“불렀나.”
“어. 알아봤어?”
“확인된 자는 4명. 의심과 정황은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자가 5명이다. 시간이 더 있다면 다른 증거들을 모을 수도 있겠지.”
은현이 엘빈에게 따로 시킨 일은 에레니아 신성국이나 베스타 신전의 비리와 연루된 외부 인사의 존재다.
신전 안에 자리잡아 부패하고 썩어가고 있던 자들을 솎아내고 잘라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해결이 되리라고, 은현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지 않았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것처럼, 이번 일에 연루된 모든 자를 모조리 처단하여 뿌리를 뽑아야 한다.
“…계속 고생해줘. 그리고…엘레노아의 호위도 부탁하고.”
베스타 여신에게서 ‘신성 회수’라는 새로운 권한이자 기적을 부여받은 엘레노아는 차기 성녀로서 신전을 대표하는 최고위의 사제로 향하는 출세의 길이 놓여있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다른 사제와 성기사들의 천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성력을 빼앗길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엘레노아는 신성력이라는 기적의 힘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다.
비리가 있으나, 아직 그 죄가 드러나지 않은 자.
앞으로의 출세에 있어서 엘레노아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야심이 그득한 자.
그저 엘레노아가 두려운 자.
같은 신전에 있고 사제와 성기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아니에스나 엘레노아처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 또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집단이며 누군가는 욕망을, 누군가는 야심을 가지고 이 신전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한다.
그런 그들을 완벽히 견제하고 위험의 싹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서는 먼저 엘레노아의 안전이 보장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은현이 고른 수단이 엘빈이었다.
“물론이다.”
엘빈이 사용하는 그림자를 조종하는 마법은 마나를 이용한 검기조차 막아낼 정도로 막강한 방어력을 지녔고, 거기에 더해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을 가졌다.
누군가가 엘레노아를 노리는 악의를 내비치고 위해를 가하기라도 한다면, 엘빈은 망설임 없이 그 위협의 근원을 제거하고 엘레노아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것이 은인이자 주인인 은현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와 계약한 정령인 엘빈은 그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에린한테는 물어보았어?”
사령술사의 에레니움 습격 사태가 진정되고 어수선했던 신전의 분위기가 잠잠해진 이후,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에린의 기분을 파악했던 은현과 엘레노아는 엘빈에게 에린의 속내를 넌지시 떠보도록 명했었다.
평소에도 굉장히 밝고 행동력이 넘쳤던 에린이었기 때문에, 애써 그것을 감추려고 해봐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은현과 엘레노아에게는 쉽게 간파당했다.
정작 에린은 그것을 간파당했다는 자각조차도 없었으리라.
“음….”
엘빈은 에린의 기분이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로 은현에게 말하지 않고 망설였다.
은현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는 에린의 당부 때문이었다.
정령인 엘빈은 계약의 대상인 은현에게 절대복종과 충성을 맹세하긴 하였지만, 은현은 엘빈에게 강요에 가까운 명령을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령과 오빠라는 경계의 사이에서 엘빈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은현도 살짝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심각한 거야?”
“심각…하달까. 에린은 그렇게 여기고 있지.”
엘빈은 일부러 에둘러 말했다.
그 또한 여동생인 에린이 이상한 싸이코에게 엮여서 곤욕을 치르는 것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으나, 멋대로 자신이 먼저 은현에게 말을 했다가는 분명히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뻔하다.
“…당장 말해.”
다행히도 은현은 엘빈의 예상대로 보기 드물게 강요에 가까운 명령으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인 강요로 은현에게 입을 열었다면, 에린도 크게 화를 내지는 못하리라.
항상 못생겼다고, 그 얼굴로 어떻게 결혼을 했냐고 면박을 주는 오빠지만, 엘빈도 결국엔 동생에게 무른 오빠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령술사가 에린에게 아주 푹 빠진 것 같더군.”
“…뭐?”
뜬금없는 엘빈의 대답에 은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사령술사와 에린의 사이에 있었던 해프닝의 전말을 자세히 들은 은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
“너무 혼내지 마라. 그 녀석도 나름대로 너나 엘레노아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던 거니까.”
여동생을 변호하는 엘빈의 말에 은현은 쓰게 웃었다.
“크게 뭐라할 생각은 없어. 단지…. 말해줬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우린 가족이니까.”
곤란한 문제나 고민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공유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은현이나 에린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말해주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엘레노아도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에린을 따끔하게 혼내줘야겠다고 결심을 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지?”
“일단은…. 가만히 있어.”
“나서지 않을 생각이야?”
“도움은 줄 생각이야. 하지만 그 사령술사를 내가 먼저 나서서 없애기엔 지금 급한 일들이 너무 많아. 그리고…에린이 혼자 해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은현이나 엘레노아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다는 것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에린이 혼자서 처리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은현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에린을 성장시키는 것 정도 뿐이다.
“내 명령으로 바쁘겠지만…. 혹시 에린이 도와달라고 하면 들어줘. 부족한 일손 부분은 내가 해결할게.”
“…배려해줘서 고맙다.”
“고맙긴, 아내인데 당연하지.”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천천히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의 보고를 받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때, 은현은 복도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중앙 정원에 보이는 인영을 발견했다.
“…아니에스?”
아니에스는 중앙 정원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탁할게.”
“그러지.”
엘빈이 곧바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며 물러가고, 혼자가 된 은현은 곧바로 아니에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크으….”
잔에 따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독한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나발을 불고 있는 15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의 모습이라니.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여기서 혼자 병나발을 불고 있냐?”
“엉?”
아니에스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은현을 발견하자마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흥. 남이사.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그냥 잠이 안와서.”
은현은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술잔과 술병을 꺼냈다.
“마실래?”
술잔 하나를 권하자 아니에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침 한창 마시고 있던 술이 떨어지기도 했고, 아직 더 마시고픈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은현이 건넨 술잔을 받자, 은현은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뚜껑을 따고 잔에 술이 따라지는 청아한 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잔을 가득 채운 술을 그대로 들이키자 깔끔하면서도 단맛이 입안에 퍼져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니가 직접 담근 거냐?”
“맞아.”
“흠, 괜찮네. 몇 병 더 가지고 있으면 내놔.”
“주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지.”
이미 리오드에게도 선물한 적이 있고, 특히나 던전 안의 사당에서 생활하고 있는 구미호의 경우에는 은현이 직접 담근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아직 여유분이 많이 있던 은현은 아니에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왜 혼자 병나발을 불고 있던 거야?”
“업무중에는 못 마시잖아. 게다가 업무가 끝난 오후 시간에도 알베른이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몰라. 술 좀 줄이라면서.”
아니에스는 불만이 많았는지 계속 투덜거렸다.
원래 20년 전, 팀으로 활동하면서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던 당시, 자주 술을 입에 댔던 그녀에게는 신전 안에서의 생활을 적지 않게 갑갑한 기분을 선사했으리라.
“이 시간이 아니면 편하게 먹을 시간이 없어.”
많은 사제들이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인 이른 새벽은 아니에스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음주를 즐길 수 있는 해방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먹고 업무는 괜찮냐?”
“흥, 취기 정도는 그냥 신성력으로 기도를 올리면 곧바로 회복할 수 있어.”
신성력을 지극히 사적으로 사용하는 그 불경함을 누군가가 듣는다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일까, 아니면 노발대발하며 설교를 늘어놓을까.
이 신전 본교 안에서 가장 높은 사제라는 대주교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설교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니, 아마도 전자에 가까운 반응들을 보이리라.
“야.”
“왜.”
“신전은…. 정말로 바뀔 수 있을까?”
“그건 앞으로 너희하기 나름이지.”
은현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확언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상황과 길을 만들어주었을 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깔아둔 길을 제대로 걸을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걷는 이들의 문제다.
물론 간단히 새지 않도록 제도와 규율을 강제하고, 신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심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엘레노아의 ‘신성회수’를 선보임으로서 강제력이 발휘되도록 손은 써두었다.
남은 것은 그들을 올바르게 관리하는 것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에스는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정리되지 않았던 신전의 부패들이, 은현이 개입해오자마자 빠르게 정리가 되어버린 것에 대하여 기쁨과 안도를 느끼면서도 한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자신을 비롯한 신전의 사람중에는 무능하고 한심한 작자들 밖에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
“정치 같은 건 정말 싫었어.”
자신의 선택으로 누군가는 평안한 삶을 누릴수도 있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아주 간단히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 간단한 이치와 책임이 부담스러웠고, 권력과 이권을 위해서 같은 집단 안의 사람들과 헐뜯고 싸우며 감정을 소모해야한다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저 앞에서, 사제들의 상징으로서, 부패한 내부의 세력을 척결하는 임무를 남에게 넘기고 성녀로서 자신을 앞세우고 신전의 위상만을 높이는 것에 주력했던 결과가 지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지금도 싫어?”
“응.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싫어.”
아니에스는 은현의 물음에 웃으며 망설임없이 답했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현 교황인 아르반은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계로 추천한 아르반의 손자, 알베른은 그 지위를 이어받기에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리고 이렇게 풍비박산이 나버려 만신창이가 된 신전을 아르반의 손에 쥐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내 후임한테 일을 짬처리하는 선임이 될 수도 없잖아.”
현재 자신보다도 더 앞에 서서 신전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주축이 되고 있는 엘레노아에게만 많은 부담을 지게 하는 것도 선임으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다.
“진짜 고맙다. 이렇게 늦게라도 바로 고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줘서.”
“별말씀을. 오늘따라 좀 너답지 않네.”
항상 당당하고 말투가 거친 아니에스가 유독 감성적이게 말을 하는 건 아마도 술 때문만은 아니리라.
은현과 엘레노아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었던 부담의 짐을 좀 내려놓게 되면서 조금은 후련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에스는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술 때문에 그래. 임마. 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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