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5화 〉 575. 암사자의 시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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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온 공작 가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올리비온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올리비온 공작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그의 후계를 잇고 싶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리오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차한성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차한성의 정수리에 꽂히는 리오드의 매서운 시선이 굉장히 예리하고 날카롭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압박감에 무심코 몸을 떨었지만, 차한성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귀족이 아닌 평민에 불과하더라도, 차한성은 자신의 한 말의 의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이렇게 단독으로 나를 찾아와 이런 요청을 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지도, 알고 있겠지?”
아무리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이나 왕족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단독으로 찾아와 막무가내식으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는다.
평민이나 다름없었던 차한성이 리오드의 저택을 혼자서 방문하여 이렇게 독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리오드가 속한 아르티아의 단원이자, 에이라의 중재로 이 저택을 찾아와 자주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에이라의 부탁으로 기초 훈련을 봐주었다고는 하더라도, 정식으로 자신의 검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것과는 경우가 틀리다.
“…네.”
그렇기 때문에 차한성은 예의는 밥이나 말아 먹은 개념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이 있더라도, 이곳이 승부처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군. 너는 다를 줄 알았는데.”
날이 선 리오드의 목소리에는 실망이라는 감정이 가득했다.
리오드가 평민이면서 출신이 불분명한 차한성을 아르티아의 기사단원으로 입단을 허가한 이유는 오로지 실력과 인성만을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였다.
“너도 결국엔 나의 지위와 가문을 노리고 접근해온 것이었나?”
올리비온의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요청해오는 젊은 귀족들의 숫자는 아직도 열손가락으로 다 세도 모자랄 정도로 많다.
왕국의 공작 가문이 된 그의 검술을 이을 수만 있다면, 그 공작 가문의 일원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왕국 내부에서 큰 지위와 명예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리오드는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차한성이 그와 같은 족속과는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의도를 알아보려는 압박이었다.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숙여져있던 고개가 들어 올려지며, 차한성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속해서 리오드의 질문에 긍정만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처음으로 보이는 부정.
드디어 차한성과 시선을 마주하게 된 리오드는 그가 말을 잇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제가 원하는 건 지위나 명예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주제넘게 꿈꿀 정도로 야심이 넘치는 성격도 아니었다.
차한성은 자기 분수를 잘 아는 인간이었으며, 출세에 대한 욕심도 딱히 없었다.
이 아르티아 기사단에 입단하여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차한성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출세를 할 수 있었다고 자부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몹시 단순하다.
“저는…. 저는 강해지고 싶습니다.”
주먹을 꽉 쥔 차한성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득하다.
“에이라 선배가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모그라프령으로 기사단 일부 인원이 차출되어 지원을 갔을 때.
고립된 에이라와 그녀의 소대원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차한성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에이라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서 상관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고, 신전에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현실적인 제약에 가로막혀 모두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 문제를 모조리 해결하고 에이라를 구출해온 것은 다름아닌 에린이었다.
비록 아니에스라는 신전의 대주교이자 리오드와 동급인 영웅의 조력이 있었다고는 해도, 무사히 에이라를 구출하여 복귀시킬 수 있었던 에린의 능력은 초라한 자신의 힘과 너무도 비교가 되었다.
심지어 이후에 벌어졌던 언데드와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하기까지.
자신과 에린 사이에 존재했던 어마어마한 격차에 차한성은 무력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분함.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그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
“그때는 꼭 제가 에이라 선배를 옆에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
차한성의 말을 들은 리오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이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제 정신인가?’
차한성은 자신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욕과 다급함이 뒤섞인 감정에 앞서 굳게 결심한 의지를 피력하는 것이, 바로 지켜주고 싶은 여자의 아버지라는 아이러니한 상황.
거의 ‘아버님! 따님을 제게 주십쇼!’라는 것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이 없다.
바쁜 일정으로 에이라가 현재 저택에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할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이걸 노리고 온 건가.’
차한성 또한 이 속내를 에이라가 있는 앞에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지 지금을 노리고 방문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십시오.”
차한성은 리오드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빤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아무리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아서.
“한 가지 묻겠다.”
차한성이 고개를 숙이고 몇초가 지나서야 리오드가 입을 열었다.
“네.”
“도대체 그렇게까지 내 딸을 위하려는 이유가 뭐냐.”
리오드는 굳이 에이라를 ‘딸’이라고 말하며 물었다.
그것은 에이라를 기사단의 단원으로서, 한 명의 기사로서 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에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아버지의 물음이다.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그리고…. 아.”
순간 ‘여자로서.’라는 말도 분위기를 타 나올 뻔했지만,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리오드를 앞에 두고 그 말이 쏙 들어갔다.
‘큰일났다.’
차한성은 정면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압박에 전신이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을 것만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다.
“다, 단장님. 그게 저는….”
급하게 입을 열어 변명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먹었던 굳은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기라도 했는지 차한성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순간 집무실의 문을 연 누군가가 다급하게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개입했다.
“자자! 잠깐 진정 좀 하자!”
재빠르게 리오드와 차한성의 사이에 끼어든 남자는 은현이었다.
원래 오늘은 테레지아의 몸을 검진해주는 날짜로 사전에 약속된 방문이었기에 리오드는 그렇게 놀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차한성 쪽이었다.
“으, 은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 아하하…. 안녕하세요?”
“에린님까지….”
급하게 은현의 뒤를 쫓아와 인사를 하는 에린의 모습까지 확인하고 당혹스러웠던 차한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집무실 밖에서 리오드와 자신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음을 직감했다.
에이라에 대해서 품고있는 자신의 속마음까지도.
“그게….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진짜로 죄송해요!”
민망함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 에린의 얼굴을 확인한 차한성은 할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아요! 에이라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에린이 필사적으로 차한성을 위로하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도 은현이 필사적으로 리오드를 설득하고 있었다.
“…비켜라. 이건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야.”
평소 무뚝뚝한 인상이던 리오드가 보기 드물게 냉정을 잃었다.
딸이 얽혀있는 문제라 그런지 은현도 어쩔 수 없다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지금은 그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일단 그 표정이나 풀고 얘기하자. 좀. 너 지금 눈빛만으로 칼 한 자루 만들어서 사람 하나 골로 보내버릴 기세야.”
“눈빛으로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가능했으면 진즉에 그랬다.”
“너 임마! 슬쩍 본심을 얘기하고 있잖아! 여기서는 그럴 생각 없다고 했어야지!”
리오드는 계속 자신의 앞을 막아서서 중재하고 있는 은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지금 대체 나를 뭐로 보고 있는 거지?”
“딸을 둔 아버지.”
“잘 알고있군. 너는 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20년 뒤쯤에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일리아나의 배속에서 나온 은현의 아기가 딸이라면, 은현은 자신보다 더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리오드는 확신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한참동안 실랑이 끝에 리오드와 차한성의 사이를 중재하고 있을 때, 은현이 미리 노집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급하게 도움을 요청한 테레지아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테레지아?”
만삭의 배를 손으로 지탱하고 메이드의 부축을 받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테레지아를 보고, 리오드가 얼굴을 굳혔다.
보통이라면 거동이 불편하여 침소에서 잘 나오지 않는 테레지아가 어째서 집무실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인지 이유를 생각해보고, 은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불렀나?”
“나도 부르고 싶지는 않았는데, 널 진정시키려면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불편한 거동에도 불구하고, 테레지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메이드의 부축으로 천천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집무실의 소파에 앉았다.
“여보. 앉아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지.”
리오드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상석의 중앙 소파에 앉았다.
배 속에 막내 아이를 품고 있는 테레지아에게 더 부담을 지울 수는 없었다.
“얘기는 대강 들었어요. 그이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요?”
“…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알고있습니다.”
“알았어요.”
테레지아는 빙긋 웃어보이고는 리오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찬성이에요.”
“…테레지아.”
“적어도 기회 정도는 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
리오드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적어도 에이라가 직접 저택에 데려온 남자에요. 한번 믿어보죠.”
테레지아는 딸의 안목을 믿어보기로 생각을 굳힌 모양이었다.
차한성이 제대로 리오드에게서 검을 배우겠다고 다짐하게 된 동기도, 에이라가 위험에 처해있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무력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심과 기개는 제법 테레지아의 마음에 좋은 점수로 각인이 된 모양.
“…….”
그리고 리오드가 차한성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렴풋이 에이라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신의 딸이 거들떠 보지않는 남자였다면, 자신도 아무런 주저도 없이 치워버렸을 터.
어느샌가 훌쩍 커버려 성인이 되고 자신의 품 안에서 떠나려는 딸의 아버지가 품고 있는 심경은 몹시 복잡하다.
“차한성이라고 했죠?”
“네, 네.”
“우리 딸 아이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있다는 건 어머니로서 굉장히 감사한 일이에요.”
딸 아이를 위해서 강해지고 싶다는 결심을 굳게 다짐하는 남자를 만난 것이, 테레지아는 몹시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혀 별개의 문제랍니다.”
“……?”
차한성은 순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방금 전에는 리오드에게 ‘기회를 줘 봐도 괜찮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다.
“저나 우리 그이는 저희 딸 아이의 옆에 딸보다 약한 남자를 곁에 둘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말투와 태도 자체는 고귀한 공작 부인의 품위에 걸맞게 몹시 온화하고 정중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빙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몹시 단호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너는 내 딸인 에이라보다 약하다.’
‘그러니 에이라의 옆에 있을 자격 따위는 없다.’
“그리고 기사단원의 말단인 단원이, 이렇게 홀로 기사단장의 저택을 찾아와 독대하는 이 상황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주제를 알아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 말뜻을 깨달은 차한성이 전신을 딱딱하게 굳히고 긴장하며 테레지아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몹시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귀부인이지만, 젊었을 적의 테레지아 또한 귀족 부인들의 전쟁터였던 사교계를 휘어잡았던 여자다.
그저 영웅의 명예만을 가지고 있던 남작 귀족 가문의 리오드를 백작 위계까지 끌어올리고 기사단장의 지위에 올릴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던, 한 성격하는 그녀의 미소는 정말로 화가 나면 무서운 에이라의 얼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쏙 빼닮았다.
“와아….”
옆에서 어른들의 눈치만을 보고 있던 에린마저도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탄을 흘렸을 정도.
리오드가 무리의 모두를 앞서서 이끄는 용맹이 넘치는 사자라면, 테레지아는 우두머리 사자를 지탱하고 무리의 내실을 단단하게 다지는 암사자와도 같다.
“1개월.”
“네…?”
“1개월의 시간을 드릴게요. 그 기간 안에 우리 그이의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정식으로 검술을 배울 수 있도록 제가 이 사람을 설득해드릴게요.”
테레지아가 내건 조건은 차한성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리오드를 설득하여 잘 중재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리오드보다 더 강력한 조건을 내걸어 압박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미처 대답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리자, 테레지아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우리 남편을 찾아온 당신의 행동이, 무례와 만용이 아니라, 기개와 용기에서 비롯된 행동이길 부디 기대할게요.”
차한성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무례를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라는 온화한 암사자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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