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74화 (557/730)

〈 574화 〉 574. 아내들의 회의

* * *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테이블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또 다른…일리아나님인가요…?”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레노아였다.

일리아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한 물음에 가깝다.

“…맞아.”

일리아나는 긍정했다.

“아마도 목적은 현이를 데려가려는 거겠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추측이었지만, 일리아나는 확신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가 있다.

“헐….”

에린은 지금의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일리아나가 둘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엘레노아는 머릿속으로 생각에 잠겨 골똘히 생각했다.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어디서 어디까지 알려야 할지.

이에 대한 대응과 대비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후우….”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사람은 괜찮을까?’

그리고는 이 사실을 일리아나에게서 전해 들은 은현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점을 알아차리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었다.

“주인님은…. 뭐라고 하셨나요?”

엘레노아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릴리가 현재 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던 일리아나와 베르단디에게 물었다.

“그냥 알았다고만 했어. 하지만….”

일리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은현의 대답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은현의 속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훤하게 보인다.

그의 속마음을 더 자세하게 읽을 수 있는 베르단디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이는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다.”

이곳과 다른 평행 세계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베르단디가 자신을 되살렸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즉 자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다.

은현은 다른 평행 세계의 일리아나가 이곳으로 넘어온 이유를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그녀를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베르단디는 은현의 그 속마음을 읽어 들이고 절대로 은현의 탓이 아니라고, 그를 위로했지만, 은현은 그 자책을 도저히 씻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은현은 일리아나의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속으로는 방황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일리아나는 자신이 짐작한 대로 흘러가고 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의도는 고마웠지만, 이럴 때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또 이상한 부분에서 속을 썩이고 있다.

정신적으로 가장 강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베르단디의 위로마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의 골이 강하게 엉켜있다면, 그것을 푸는 것은 아마 하루아침에 될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은…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요?”

엘레노아는 가장 심각한 문제를 거론했다.

만약 다른 일리아나가 적으로 돌아선 것이 확실하다면, 자신들이나 은현과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최종적으로는 다른 일리아나를 죽여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올 터.

그때 은현은 적으로 돌아선 다른 일리아나를 죽여야 하는 비정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베르단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은현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며 스스로 다독이고 여신의 사도로서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의 영혼에 제약을 걸어 강제적으로 사도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했던 과거의 은현으로 되돌아가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하게 둬서는 안 돼.”

일리아나와 베르단디는 은현이 직접 다른 일리아나를 죽이게 된다면, 간신히 회복되기 시작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만 한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래서 일리아나는 은현에게 확실하게 요구했다.

다른 평행 세계의 ‘자신’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네. 하지만 일리아나님에게만 맡겨두고 싶지 않아요.”

“저도요.”

“저, 저도요!”

“응. 고마워.”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라 릴리와 에린 또한 마찬가지.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롭게 등장한 재앙을 앞에 두고, 엘레노아가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난 당분간 연구실에서 마법을 연구할 생각이야.”

일리아나는 당분간 지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지금 임신중에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 내 아기에게 부담을 줄 수준까지는 무리하지 않을 거야. 그건 현이도 원치 않을 테고. 그래도…. 다른 ‘내’가 차원을 넘어올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인데, 아무런 대비도 해둘 수는 없어.”

일리아나는 여덟 자릿수 고위 마법사로서 대륙 전체에서도 최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지만, 이 상황을 절대로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상대를 해야 하는 대상이 다름 아닌 자신인 데다가, 무려 차원 이동이라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아득히 높은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

최소한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녀와 준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마법적인 능력을 끌어올리거나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해둬야만 한다.

배 속의 아기 아빠를 다른 여자도 아니고 또 다른 ‘자신’에게 빼앗겨야 한다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제가 일리아나님이 무리하시지 못하도록 잘 돌볼게요.”

“…응. 알겠어.”

릴리가 일리아나를 잘 케어하겠다고 먼저 나서자 엘레노아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아는 지금처럼 현이를 잘 보조해줘.”

“네. 그럴게요.”

영지의 운영과 동시에, 은현이 뒤에서 주도하고 있던 다양한 사업과 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엘레노아는 앞으로도 더 바빠질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아가.”

“네. 일리아나님!”

“당분간 현이를 잘 부탁할게.”

평소 밝고 활기찬 에린이라면, 심란한 은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줄지도 모른다.

“네! 제가 현이 곁에 딱 붙어있을게요!”

“응. 믿을게.”

기운차게 대답하는 에린의 말에 일리아나는 피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목표를 두고 단단히 뭉치는 아내들의 모습에 베르단디는 작게 미소지으며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아이들이 있어서 정말 든든하구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은현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아내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그래서! 당분간 난 현이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야!”

에린은 은현의 팔을 꽉 끌어안고는 얼굴을 비비며 실실 웃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셔츠에 밴 은현의 냄새를 맡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애완견을 연상시킨다.

“…….”

아내들끼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은현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서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보통 그런 건 비밀로 하지 않아?”

“응? 글쎄?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걸?”

그래서 에린은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당당하게 은현에게 달라붙어 있을 거라고 선언을 해왔다.

“…티가 났나 보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건만, 역시나 일리아나에게는 간파를 당했다는 것에 쓴웃음을 짓는다.

[당연하지 않으냐. 누구를 속이려고.]

게다가 여신과 사도로서 영혼이 연결되어 있어, 은현의 생각 일부를 읽어 들일 수 있는 베르단디를 앞에 두고 연기가 통할 리가 없다.

허공에 떠 있는 베르단디가 은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아이가 좀 더 나나 다른 아이들에게 의지를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응! 나도 현이가 계속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싶어.”

“…감사합니다. 베르단디님. 에린도 고마워.”

“히히. 나는 현이의 아내잖아! 당연한걸!”

에린은 배시시 웃어 보이며 끌어안은 은현의 팔에 더욱 얼굴을 비볐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표현하는 애정이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은현의 마음속을 조금씩 풀어나갔다.

“그런데 현아. 리오드님의 저택은 왜 가는 거야?”

현재 은현과 에린이 향하고 있는 곳은 올리비온 공작 가문의 대저택이다.

“테레지아의 검진하고, 리오드한테도 용무가 있어서.”

“아. 그러네. 테레지아님. 배 엄청 부르셨던데.”

은현은 특별한 용무가 없거나, 장기적으로 자리를 비우지 않을 때는, 거동이 불편한 테레지아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리오드의 저택을 방문해 왔다.

만삭이 다 되어 곧 출산 시기를 앞둔 만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실력 있는 궁정의를 통해서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리오드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은현에게도 따로 부탁을 해왔다.

임산부를 진찰해본 경험은 없다시피 했지만, 기본적으로 웬만한 궁정의들보다 뛰어난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리오드가 은현을 깊게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리아나의 건강을 체크하는데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은현 또한 리오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선물로 애플파이 좀 사갈까?”

“네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페르닌에 있는 일리아나의 집에 살던 당시, 한창 성장기에 먹성이 좋아졌던 에린은 때로는 페르닌의 노점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먹거리를 양손에 줄줄이 담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 친했던 에이라를 보러 저택을 방문할 때면, 그때마다 은현에게 받은 용돈으로 비싼 애플파이를 방문 선물로 사가고는 했다.

사과 향과 달콤한 젬이 가득한 파이는 에린이 제일 좋아하는 군것질 중 하나여서, 에이라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핑계로 사심을 채우는 행동이었던 것.

“가, 가서 에이라 언니랑 테레지아님이랑 같이 먹으려는 거지!”

에린의 그 속내를 알고 있던 테레지아나 에이라는 귀여운 딸이나 여동생을 대하듯이 웃으며 속아 넘어가 주고 있었지만, 에린은 두 모녀가 그것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래. 알았어. 사 가자.”

은현은 작게 웃으며 에린이 원하는 대로 페르닌의 제과점을 향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 아가씨? 오랜만이군!”

제과점의 점주는 오랜만에 방문한 에린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테르의 학생 시절, 은현에게 거둬진 시점부터 눈에 띄게 밝아져 갔던 에린은 페르닌의 노점이나 먹거리 상권에서 꽤 얼굴이 알려져 있던 소녀였다.

왕립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귀족 집안의 아가씨들로 노점이나 간단한 빵류 등 서민들의 먹거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왕립학교 아이테르의 교복을 입고 있으면서, 노점의 음식들에 크게 관심을 보이며 싹싹하게 대하는 에린은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상권의 사람들에게는 인상적이었으리라.

“늘 혼자 오더니, 이번에는 남자친구랑 같이 왔나?”

“히히. 저 결혼했거든요! 남편이에요! 잘생겼죠?”

이 제과점에 방문했던 적은 자주 있었지만, 은현과 함께 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점주는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 훤칠하게 생긴 게 선남선녀가 따로 없군! 내 서비스로 이번에 애플파이를 아주 두껍게 구워줄 테니 자주 찾아오라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점주에게서 갓 구운 따끈따끈한 애플파이를 포장해가고 제과점을 나온 두 사람은 곧장 리오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저택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올리비온 공작 저택의 총괄 관리를 맡은 노집사가 직접 마중을 나와 은현과 에린을 반겼다.

리오드와의 친분도 그렇고, 테레지아의 검진을 해주고 있는 은현을 귀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당연했다.

“공작님께서는 현재 집무실에서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노집사는 곧바로 리오드가 있는 집무실로 두 사람을 안내하며 설명했다.

“손님이요?”

“네. 지금….”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려던 때, 도착한 리오드의 집무실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저에게 단장님의 검술을 가르쳐주십시오!

“이 목소리는….”

간절함이 흘러나오는 요청의 목소리는 에린의 귀에 익은 차한성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그의 요청을 들은 리오드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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