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7화 〉 547. 전사의 혼(6)
* * *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여우불, 청염을 두른 레반테인을 휘둘러 차근차근 언데드들을 배제해나가던 도중.
“저건…!”
기괴한 거구의 오우거 좀비를 발견하고 급하게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누군가가 에린의 팔을 붙잡아 제지했다.
“괜찮아요.”
“개, 갤러해드님. 하지만….”
“그분이 가셨으니까. 괜찮아요.”
“…그분?”
에린은 어째서 갤러해드가 자신을 붙잡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 의미를 이해한 것은 갤러해드의 손이 아까까지 시에테가 있던 곳을 가리키고 나서부터였다.
“어라?”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 쪽에 있었던 시에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에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이내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깨달았다.
“설마…?”
갤러해드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거구의 오우거 좀비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카아앙!
위로 높게 들어 올려진 거대한 배틀 엑스가 있는 힘껏 아래로 내려 찍히면서 배가 된 무시무시한 위력이 아니에스가 만들어낸 신성한 방벽과 충돌했다.
도저히 인간의 영역이 아닌 창과 방패의 충돌 여파는 대기를 떨게 만드는 충격파를 형성하여 주위에 흩뿌려진다.
‘도와야 하는데….’
그 대기의 떨림을 직접 느낀 에린의 몸이 무심코 떨릴 정도로 전신을 전율케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격.
에린의 몸이 멈칫한 아주 짧은 순간, 그 상황은 발생했다.
신성한 보호막 채로 인간들을 분쇄하기 위해 배틀 액스를 내리친 오우거 좀비의 한쪽 팔에 일섬이 그어졌다.
이후 한 타이밍 늦게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지는 오우거 좀비의 팔뚝을 멀찍이서 목격한 에린은 그 광경을 직접 보고도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윽고 아래로 내려찍던 배틀 엑스를 쥐고 있던 팔에 이어, 남아있던 다른 팔들과 거구를 지탱하고 있던 양쪽 다리까지.
마지막으로 사지가 절단되어 남아버린 몸통이 반으로 잘려나가 차례차례로 바닥에 추락한다.
“세상에….”
그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던 에린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두 눈으로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은현과 마찬가지로 감지를 통해 범위에 들어온 모든 존재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던 에린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총 아홉 번의 참격. 그것도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첫 번째 참격은 아니에스가 만들어낸 신성한 보호막과 충돌한 배틀 엑스를 쥐고 있던 팔을 잘라내면서다.
이후에는 왼쪽과 오른쪽의 다리를 동시에, 이어서 남아있는 다섯 개의 팔들과 마지막으로 거구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렸던 극강의 참격.
그 검술은 두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감지를 통해 짧은 순간 일련의 과정들을 파악한 에린은 전율했다.
첫 번째 공격부터 마지막 공격까지, 마치 하나의 기다란 춤을 보는 것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동작의 연속들은 한없이 유려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공격이 연속되면 될수록 더욱 빨라지고, 더욱 강해진 끝에 거대한 오우거 좀비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리는 절삭력을 선보였다.
어떻게 상대적으로 짧은 검신으로 몇 배가 넘는 거대한 체구를 갈라버릴 수가 있을까.
“저것이 검성입니다.”
검술의 극을 추구한 끝에, 검의 영역에서 성인(成人)이 되었다는 검사.
그 경지를 거머쥔 기술의 끝을 경험한 에린은 이전에 흘려들었었던 은현의 말을 떠올렸다.
기술의 극에 달한 검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있는 마법을 뛰어넘을 수도 있어.
그것은 아무리 검술의 수련을 열심히 하더라도, 대지를 갈라지게 만들고 폭풍을 휩쓸며 하늘을 불태우는 고위자릿수의 마법사에게는 대적할 수 없다는 에린의 가치관을 두고 해주었던 은현의 조언이었다.
그 예시는 물론 은현이 일리아나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두고 했던 말이었지만, 에린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저게…검성….”
비록 자연재해에 가까운 마법과 비교할 수는 없을지라도, 일반적인 상위 자릿수 마법사를 간단히 뛰어넘는 저 공격력을 고작 개인의 힘과 기술로 선보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에린의 가치관을 크게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저는…도대체 누구를 되살린 건가요?”
“검성이죠.”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닌데…. 저분이 도대체 유령의 모습으로 왜 제 앞에 나타나신 거죠?”
갤러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인께선 그걸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가요?”
“…….”
우르드와 베르단디에게 불려가면서 사도의 권속 서약을 맺고 힘을 부여받는 일련의 과정을 모르는 갤러해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 당황스러운 것은 에린 쪽이었다.
“그나저나 그분께서 정말 좋아하시겠네요.”
“네?”
감지를 통해 시에테의 검술을 간접적으로 느껴본 에린이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을 때, 그녀의 상념을 일깨운 것은 갤러해드의 말이다.
“그분이요? 누구요?”
“주인의 부군이시죠.”
“부군…?”
누군가를 부리고 그 위에 서보았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에린은 자신을 높여 부르는 갤러해드의 표현이 전혀 익숙지 않았지만,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현이요…? 현이가 왜요?”
“…….”
갤러해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오는 에린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으므로 그녀의 얼굴과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투구만 없었다면 에린은 ‘얘 정말 괜찮나?’라는 표정을 짓고 갤러해드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에린의 눈치가 심각할 정도로 없다는 것을 스스로 설명할 용기가 없었던 갤러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저분이 아마도…. 주인의 부군께 검술을 가르친 스승이실 겁니다.”
“…네? 뭐라고요?”
에린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은 투로 재차 확인하여 물었지만, 갤러해드는 시선을 피하며 답하는 것을 회피했다.
그녀의 그 태도를 보고 에린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핏기가 가신 얼굴로 몸을 경직시켰다.
뒤늦게 가슴 속에 피어올랐던 어떠한 위화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저 자제와 동작…. 검술은 분명 현이의….’
성별과 기술의 완성도에 대해서 완벽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에린 또한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은현의 검술 실력 또한 왕국 최고의 기사인 리오드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이거나 그를 초월한 수준이지만, 그를 상회하는 시에테의 검술의 완성도는 너무나도 경악스러워서 은현과 연결을 지을 새도 없었다.
잘 봐둬라. 검술이란 이런 것이다. 이 건방진 손제자 녀석.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한 에린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바보! 왜 눈치채지 못한 거야!?’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눈치를 챌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긴장하고 있던 차, 뒤늦게 자신의 두 번째 실수를 떠올렸다.
그, 그냥 말 많은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나 어떡하지…? 진짜 큰일났다….”
시에테를 화나게 한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에린은 은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라 막막한 심정에 울상을 지었다.
◆ ◆ ◆
위험한 국면을 한순간에 비틀어버리고, 다시 승기를 거머쥐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단 한 명의 여검사다.
“…….”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전혀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긴장하며 주춤하고 있을 때, 아르티아 부기사단장 카인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어서 움직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것은 그의 통솔하에 있는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에게 하는 호통이었지만, 동시에 주춤하고 있던 베스타 신전의 성기사들과 사제들, 그리고 모그라프령의 병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숨을 죽이며 경직되어 있던 몸이 다시 풀린 이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며 언데드들을 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카인은 곧장 시에테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모험가이십니까?”
“모험가?”
“…아니십니까?”
“…….”
시에테는 바로 답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현재 이 대륙이 지구가 멸망하고 다른 차원과 통합되어 재창조된 하계라는 사실은 신계에서 시에테도 이미 대강이나마 전해 듣기는 했다.
하지만 현재 대륙의 상황이나 개념 등의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여 소개할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카인으로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기사인 리오드와 동급, 또는 그 이상의 검술을 선보이는 정체불명의 여검사가 몹시 수상쩍고 이상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 듣고 싶습니다만….”
“그러지.”
언데드들을 모조리 배제하고 현재 이 상황을 종결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에서는 카인과 시에테의 이해가 일치하여 서로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짧은 순간 위기를 맞이하여 꺾였던 모그라프령 병사들의 사기는 갑작스러운 백귀들과 시에테의 등장으로 다시 빠르게 치솟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그라프령에 들이닥쳤던 언데드라는 재앙과의 싸움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이겼어…. 이겼다고!”
“우린 살아남았어!”
“아아, 베스타시어…!”
누군가는 승리에 취하여 환호하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누군가는 살아있는 이 순간에 감사하며 자신이 모시는 여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후우우….”
아니에스는 싸움이 종결되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는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결계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으로 약화되었던 언데드들의 정화가 모조리 처리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결계를 해제했다.
지금껏 억지로 버티고 있던 피로와 탈력감이 덮쳐와 피곤함이 배로 가중되었다.
“어휴. 삭신이야….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나.”
도저히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의 외관으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20년을 넘도록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활약은 대단했다.
병사들과 기사들, 사제와 성기사들이 일제히 싸움의 종지부를 확인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쿠웅!
거대한 무언가가 땅을 차면서 발생하는 거센 진동에 승리를 만끽하던 모든 병력이 다시 전신을 경직시키며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언데드의 대군이 밀려들어 왔던 전방을 주시하였지만, 이미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정화 의식으로 깨끗하게 정화되어버린 현재 주시해야 할 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쿠웅! 쿠웅!
“이 진동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서 울려 퍼지는 진동이다.
아니에스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비롯한 모든 병력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던 모그라프 철벽의 성문을 응시했다.
“저, 저건 뭐야…?”
마치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듯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
중얼거린 것은 아니에스가 아닌 다른 병사였다.
그 병사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가 성문 앞에서 거대한 크기로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하여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 전 쓰러뜨렸던 오우거 좀비보다도 더욱 커다란 몸체에 온몸이 밝게 빛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거대한 골렘.
그 골렘의 정체를 알아본 것은 수많은 이들 중에서 단 한 명 뿐이었다.
“맙소사…! 설마 메가트론이라고!?”
“메가…. 뭐…? 한성아. 그게 뭔데?”
경악과 흥분 등의 감정이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띠고 있는 차한성의 목소리를 들은 에이라가 물었지만.
차한성은 오직 성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금속 골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으하하! 야장께 기술을 전수 받아 제작한 이 골렘을 선보일 수 있게 될 날이 이렇게 빨리 오다니!”
거대한 금속 골렘의 가슴팍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하여 몹시 걸걸하면서도 호쾌한 목소리다.
아니에스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혹시 모르니 엘레노아를 통해 은현 쪽에도 상황을 전달하여 도움을 요청해두었다는 에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설마 지원해주겠다는 게 저 골렘이었어?”
딱히 도움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에린의 백귀야행과 시에테의 조력으로 언데드와의 싸움을 끝낸 지금의 시점에서 저 금속 골렘의 등장은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뒷북도 오지게 치네. 올 거면 한 시간만 일찍 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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