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46화 (529/730)

〈 546화 〉 546. 전사의 혼(5)

* * *

“으하하!”

호탕하게 웃은 백귀.

트리스탄이 있는 힘껏 건틀렛을 착용한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에린의 ‘괴력난신(?力?)’이라는 검기의 여파로 황폐화가 되어버린 숲과 대지가 주먹을 박힌 곳을 중심으로 갈라졌다.

대지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거세게 뒤흔들리자,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언데드들이 갈라진 땅의 균열 아래로 무력하게 떨어졌다.

오크 좀비의 거대한 하체가 균열 사이에 끼어버리면서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임에도 마수는 오로지 앞만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미 죽어버려 시체에 불과한 오크 좀비는 마수로서의 본능조차도 잃어버린 상태.

그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반응하여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바닥의 균열에 끼어버린 오크 좀비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허공에 떠오른 트리스탄의 권격이 다시 한번 내리쳐지며 오크 좀비의 머리를 분쇄했다.

청염을 두른 건틀렛이 두피를 찢어발기고 두개골을 분쇄하여 머리 자체를 찌그러뜨리는 백귀의 공격은 겁에 질려 마수들에게서 도망을 치려던 병사들을 전율케 했다.

“대, 대단해….”

“흐흐.”

경외와 감탄이 섞인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은 트리스탄은 어깨를 떨며 작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구미호의 영혼에 예속되어 백귀가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던 트리스탄은 죽어서도 전장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전투광의 성향을 타고난 남자였다.

트리스탄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백귀들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다.

끝까지 검의 길을 추구하다가 끝내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새롭게 찾아온 기회.

세상의 명운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는 작은 염원.

구미호에게 예속된 백귀들은 모두 이렇게 되기까지 각기 다른 다양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근본은 전장의 중심에서 적을 쓰러뜨리고 자신들의 기술을 갈고닦아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사의 혼이다.

“이런 날이 오게 되다니!”

머리가 찌그러진 오크 좀비의 몸을 짓밟아 자신이 만들어낸 땅의 균열 아래로 밀어낸 트리스탄은 환호했다.

구미호의 백귀로 예속된 지 어언 수백 년.

자신의 전 주인이었던 구미호가 인간에게 배신당하여 죽은 이래로, 많은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던 만큼 이런 전장의 중심 속에 소환된 것은 그에게 있어 큰 호재였다.

특히나 백귀가 되면서도 계속해서 갈고닦은 기술을 되살아난 인간의 몸으로 선보일 수가 있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감회도 몹시 남다르다.

“하하하! 다 정리해주겠어!”

피부를 타고 전해져오는 전장의 열기에 취한 트리스탄이 또다시 병사들을 위협하는 언데드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아주 신났군.”

트리스탄과 함께 제일 먼저 전방에 나서서 자신의 덩치보다 커다란 그레이트 소드를 휘둘러 마수들을 묵사발을 내고 있던 퍼시벌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트리스탄을 흘끗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 저 기분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만.”

되살아난 인간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고 점점 전장의 열기에 취하여 고양되고 있는 것은 트리스탄뿐만이 아니었다.

우직하고 단단한 철벽처럼 언데드들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면서 대검으로 쓸어버리는 퍼시벌 또한 담담해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들떠 있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며 워울프 좀비를 대검으로 있는 힘껏 내리쳐 반 토막 낸 퍼시벌은 조금만 늦었어도 좀비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길 뻔했던 병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

긴장으로 떨리는 병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얇고 가녀리다.

사이즈에 맞지 않는 투구가 벗겨져 드러난 작은 얼굴은 아직도 앳되어 보이는 어린 나이.

심지어 단발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가진 병사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지구의 멸망을 경험해보았던 퍼시벌에게는 여성 병사에 대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악마들의 침공으로 위기를 맞았던 지구에서는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만 했으며 하루에도 몇만 명의 사람이 쉽게 죽어 나가는 참혹한 시기였다.

퍼시벌은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여성 병사의 투구를 주워 병사에게 주고는 짧게 조언했다.

“투구는 맞는 사이즈로 착용해라.”

“아…저…!”

여성 병사가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할 틈도 없이, 퍼시벌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배제해야 할 적을 향해 몸을 던졌다.

쿠웅!

퍼시벌이 차례차례로 언데드 마수들을 제거해나가던 도중, 땅이 울리는 거친 진동을 느끼고 멈칫했다.

진동이 발생한 근원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마수의 시체가 느린 걸음으로 성문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건…?”

퍼시벌 뿐만이 아니라, 모그라프 변경의 병사들은 물론 적을 배제하는데 필사적이었던 아르티아의 기사들이나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과 성기사들까지 멈칫하게 할 정도로 기괴한 생김새.

기본적인 베이스는 오우거의 몸통이었으나, 일반적인 오우거보다 두세 배는 커다란 체구에 팔이 세 쌍이나 엉겨 붙어있고, 거기에 더불어 머리까지 세 개가 붙여져 있어 몹시 기괴하고 혐오스럽다.

그 거구에서 나오는 꺼림칙한 기운은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기분을 역하게 만들고 구토를 유발하여 혐오를 조장했다.

“우웁…!”

“괴, 괴물…!”

“도망쳐!”

누군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구토하고, 누군가는 기겁하여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을 친다.

아르티아 기사단원도, 신전의 사제들 또한 세 마리의 오우거가 기괴한 형태로 합성된 언데드의 모습에 순간 전율하여 몸을 경직시켰다.

“저, 저게 뭐야…?”

살면서 그 어떤 마수보다도 기괴하고 혐오감을 조장하는, 처음 보는 언데드의 외관에 에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썩어버린 팔을 들어 올려,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인간들을 향해 내려찍으려 하는 오우거 좀비의 공격에, 그 누구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반응하지 못했다.

“생긴 것 참 뭐같이 생겼네.”

앞서 달려나가며 중얼거린 것은, 이 전장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외관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빠르게 뛰어가 누구보다도 가장 앞쪽에서 거대한 도끼를 내려찍는 오우거 좀비와 마주한 아니에스는 자신의 머리 위에 내리쳐지는 도끼를 마주하고 자신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여신님. 좀 막아주세요.]

[베스타의 축복]

[성스러운 보호막(Saint Guard)]

기도에 답하여 현현된 여신의 기적은 투명한 거울의 방벽.

카아앙!

신성한 방벽과 오우거 좀비의 전투 도끼가 부딪쳐 생긴 거친 충격파가 전역에 흩뿌려지며 모든 것을 휩쓸었다.

“크…윽!”

무시무시한 질량에 중력과 근력의 힘이 더해진 압도적인 폭력은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가진 아니에스의 한쪽 무릎을 꿇게 했다.

“아오! 진짜!”

하지만 아니에스는 양손을 위로 뻗어 여신의 기적으로 만들어진 보호 장벽이 부서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어 악착같이 버텨냈다.

본래라면 비록 이런 거구의 마수일지라도 ‘강신(??)’을 사용한다면 이런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은 극강의 방어력을 갖춘 아니에스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의 이야기.

현재 언데드들의 힘을 약화하고, 반대로 아군의 병력을 강화하고 있는 광역 범위의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신성력이 소비되고 있는데, 여기서 강신까지 사용하게 된다면 이 결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더욱 힘들어진다.

결과적으로는 ‘조건부’라는 제약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강신을 쓸 수 없는 지금의 아니에스는 현재로선 오우거 좀비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한계에 가까웠다.

“도망칠 거면 치고! 아니면 빨리 저것 좀 어떻게 해봐!”

“죄, 죄송합니다!”

한 신전의 성기사가 아니에스의 짜증 섞인 일갈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

자신 중에서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가장 가녀린 체구로, 가장 앞에서 무시무시한 공격을 막아주고 있는데.

그것도 자신들의 상사나 다름이 없는 대주교를 뒤로하고 도망을 친다는 선택지는 성기사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기사들은 세 마리의 오우거 시체들이 합쳐진 기괴한 마수의 거구를 올려다보며 하나 같이 똑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저 혐오감과 기괴함이 가득한 괴물을 처리할 수 있을까.

도저히 생각을 쥐어짜 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신성의 보호막을 깨부수기 위해, 위에서 내려찍고 있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도끼날과 어떻게든 도끼날을 막아내기 위해 신성력을 쏟아붓는 신성한 보호막은 결말이 보이지 않는 창과 방패의 싸움과도 같았다.

아르티아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눈앞의 공방전에 압도되어 몸을 굳히고 있을 때, 난입해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존재였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花)의 바람]

잔잔한 선풍이 아래로부터 불어와 조금씩 접근해오는 것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고요하면서도 소리소문없이 찾아온 그 바람은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참격이 만들어낸 바람.

서걱

“어?”

아니에스는 무언가가 깔끔하게 절단되는 소리를 들어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위를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신성의 보호막째로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을 모조리 짓뭉개버릴 것만 같았던 힘의 압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상했던 것은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질량은 그대로지만 가해지던 힘의 압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뒤늦게 아니에스의 옆에 떨어진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과 많은 이들을 위협했던 오우거 좀비의 거대한 팔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절단된 오우거 좀비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전투 도끼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더욱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가…?”

누가 오우거 좀비의 팔을 절단시킨 것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두 번째 변수는 빠르게 생겨났다.

오우거 좀비의 양쪽 다리가, 남아 있는 다른 팔들이 모조리 잘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많은 이들이 목격하여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체중을 지탱하도록 땅을 딛고 있던 양쪽 다리를 잃은 오우거 좀비의 몸통이 뒤늦게 반으로 갈리며 추락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바닥으로 추락하는 과정이, 그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럴 수가….”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을 통솔하는 현 지휘관인 부단장 카인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치채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총 아홉 번…. 그것도 거의 동시에…?’

양쪽 다리와 세 쌍의 팔들, 그리고 몸통을 반으로 갈랐던 참격까지, 총 아홉 번의 참격이 이루어지는데 걸린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거대한 체구를 단 한 번의 참격으로 깔끔하게 절단시키는 공격력이나, 눈으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는 같은 검사로서 전신을 소름 돋게 만드는 수준의 경지.

카인은 곧바로 자신의 상관이자 왕국 최고의 기사인 리오드 올리비온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급, 어쩌면 그 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은현이라는 남자도 마찬가지.

‘단장님과 같은…. 아니. 단장님과 그 남자, 그 이상이다.’

인정하고 싶다, 아니다가 아니라, 그의 몸과 이성이 본능적으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흠. 나쁘지 않군. 정말로 전성기의 육체가 그대로 재현됐다는 건가?”

허공에 검을 휘둘러 검날에 묻은 더러운 피를 흩뿌린 여검사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모두가 토막 난 오우거 좀비의 시체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니에스와 카인은 오우거 좀비를 도륙 낸 여검사를 주시했다.

아니에스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어떠한 기시감을 떠올렸다.

성별은 전혀 달랐지만, 검에 묻은 피를 허공에 휘둘러 흩어내는 행동이나, 자세들, 품세와 동작들이 어쩐지 은현을 떠올리게 만든다.

“…저 여잔 누구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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