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6화 〉 506. 새로운 왕(2)
* * *
“그래서 누구를 추천하려는 건데요?”
“…….”
은현은 유리아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답하는 것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선실에 있는 사람들이 은현의 시선을 따라 일제히 유리아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고, 이윽고 그가 차기 왕으로 누구를 추천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서, 설마…?”
깨달은 것은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유리아 또한 마찬가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유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급히 말했다.
“나, 나는 못 해요.”
“어째서죠?”
“그야 그렇잖아요! 내가 어떻게 왕을…!”
“해보지도 않고 벌써 단정 짓지 마시죠.”
유리아는 은현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자신을 페르니아스의 왕으로 만들려는 그의 이야기는 유리아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에 기가 차서 자연스레 이가 갈렸다.
“당신…진짜로 말을 쉽게 하는데…!”
“쉽게 꺼내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많이 생각하고, 하는 제안이기도 하죠.”
은현은 올곧은 시선으로 유리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리곤 그녀의 옆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 헬레나 후비와도 시선을 교환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은현의 얼굴을 관찰하며 그 의중을 파악하려는 헬레나 후비의 표정 또한 몹시 굳어있었다.
현 왕국의 주인인 국왕이 없다는 것도 아주 큰 문제였지만, 이 타이밍에 차기 국왕으로 자기 딸의 존재를 거론하다니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헬레나 후비가 은현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것이 두 번째.
딸의 독단행동으로 몰래 왕궁을 빠져나갔을 때 개인적인 부탁을 위해 그를 찾았던 때 이후로 다시 보게 된 은현은 그녀로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동안 자신이 보아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어떠한 이질감.
재물욕이나 권력욕, 색욕 등의 다양한 욕망으로 얼룩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던 만큼, 눈앞의 이 남자의 눈에는 그런 욕망의 감정이 전혀 서려 있지 않았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유리아와도 굉장히 가까워 보이고….’
그나마 알렉스가 크라시르 기사단 소속이었을 당시, 가까운 관계로 지냈던 유리아가 은현을 상대로는 묘하게 풀어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왕녀로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아닌, 마치 친한 친구를 대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딸의 모습이 몹시 기묘했다.
그렇기에 은현이라는 남자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현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헬레나 후비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왕녀님을 차기 왕으로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짜증 나게 또 무슨 이유를 세 가지씩이나 만들어서 가지고 왔어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태클을 거는 유리아의 말을 무시하고, 은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이제는 유일한 왕위 계승자이신 에반 왕자님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거죠.”
“…그게 제가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맞습니다.”
은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존재가 필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시기를 늦추고서라도 디아네 왕비가 그랬던 것처럼 정권을 이어받아 헬레나 후비가 대리청정을 하는 방법도 있다.
굳이 유리아가 무리하게 왕위를 이어받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은현에게는 무리해서라도 유리아가 왕위를 이어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현재 왕국의 외부에서 흘러가고 있는 대륙의 전체적인 정세 때문입니다.”
“…정세?”
“왕녀님도 이야기만으로는 들어서 알고 계시겠죠. 렌디르 왕국이 멸망했다는 소식.”
“……!”
유리아는 물론 헬레나 후비까지도 그 소식을 듣고 몸을 움찔 떨었다.
이윽고 시선을 옮겨 리오드의 눈치를 살폈다.
렌디르 왕국은 리오드의 옛 동료인 레이넌이 귀족으로 소속되어 있는 국가이며, 그 렌디르 왕국을 멸망시킨 것은 다름 아닌 레이넌이라는 소문은 유리아와 헬레나 후비도 접한 사실이었다.
“솔직히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정 상황은 빈말로도 좋다고는 못합니다.”
“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할 여지가 없는지 두 모녀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면에 지금 외국의 정세는 심상치 않죠.”
페르니아스 왕국만큼은 아니지만, 아르케나 대륙에서 강대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렌디르 왕국의 멸망은 대륙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전조다.
동시다발적으로 주위의 소국들이 피해를 보며 점차 인명피해는 늘어만 가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사령술사의 존재가 끼어들어, 사망한 민간인들을 언데드로 만들면서 그 규모를 점점 부풀려 나가고 있었다.
꽤 먼 거리에 있는 페르니아스 왕국에까지 그 영향이 오고 있는 것은 아직이지만, 머지않아 페르니아스 왕국은 물론 대륙 전체를 혼란이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시겠습니까? 지금은 내부의 파벌 싸움으로 힘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현재 비리를 저질렀던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 다수가 처벌을 받으면서 작위와 토지를 몰수당하고 평민으로 전락하여 기강을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권력이나 재물을 취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귀족들이 모조리 뿌리가 뽑힌 상태는 아니었다.
은현에 의해 파벌 싸움을 벌일 정도의 규모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와해하기는 했지만, 그 야심가들은 언제든지 세력을 형성하여 과거와 같은 행동을 되풀이할 혼란의 씨앗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 상황.
은현은 이번 사태를 이용하여 유리아를 앞세워 그 벌어질지도 모르는 혼란의 씨앗을 뿌리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유리아는 부담감을 짊어져야 하는 국왕이라는 그 무거운 자리를 생각하자니 위가 아파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 왜 저여야만 하나요. 차라리 저보다는….”
누군가를 통솔하고, 다가올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막중함 책임이 잇따르는 일은 그저 평온하게 생을 누리고 싶었던 유리아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다.
굳이 차기 국왕이 아니더라도, 그 역할은 누군가가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자신보다 더욱 적임자에 맞는 사람을 찾으려다가, 유리아의 시선이 리오드에게로 향했다.
차라리 대륙 전체를 구하는데 일조했던 영웅의 카리스마라면, 왕국 안의 다른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내실을 다지는 데도 아주 큰 도움이 될 터.
“리오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은현은 유리아의 생각을 읽은 듯이 곧바로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왕가를 수호하는 기사지. 이 나라의 머리에 위치하는 왕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가장 선봉에 서서 기사들을 이끄는 리오드는 훌륭한 통솔력을 가진 지휘관이지만, 그것이 위정자의 덕목이 될 수는 없다.
그는 누군가를 섬기는 기사지, 누군가의 왕이 되는 자질을 갖춘 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리오드 자신이 그 자리를 바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리오드는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다른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울만한 정당성과 명분이 없어요.”
오히려 여자이긴 해도, 남아있는 왕가의 젊은 핏줄이며 성인인 유리아가 더욱 명분이 타당하다.
은현이 유리아를 추천하려는 이유도 이러한 점에서 이다.
“그건…그렇지만…. 하지만 역대 페르니아스 왕국의 국왕들 중에서 여자가 왕위를 계승했던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축하드립니다. 그 첫 번째 사례를 왕녀님께서 만드시겠네요.”
“당신 진짜….”
유리아는 살짝 짜증이 치밀어 주먹을 꽉 쥐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박수를 짝짝 치며 말하는 것이 어찌나 얄미운지, 이곳에 은현과 자신 둘만이 있었다면 면상을 한 대만 때리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으리라.
[…아이야. 집중하거라.]
그런 유리아의 표정이 자못 우스워서 무심코 웃음을 터뜨릴 뻔하자, 베르단디가 은현의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당기며 주의를 주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낸 은현이 드디어 세 번째 이유를 입에 담았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제가 왕녀님을 선택한 것 이외에도, 차기 국왕으로 왕녀님을 선택하신 분이 있기 때문이죠.”
“…네?”
유리아는 황당한 표정을 보이며 되물었다.
은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유리아도 시야에 보이는 그녀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은현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닌 구미호였기 때문이다.
“흥.”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던 구미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딱히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구미호의 존재는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유용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의사를 받들어 대변인의 역할까지 자처하고 있는 것은 은현이다.
“서, 설마 저분께서…저를…?”
“맞습니다.”
“어째서….”
“그야 왕녀님께서 미호님의 여우 구슬을 부수셨지 않습니까.”
유리아는 답변을 듣고 펄쩍 뛰며 억울한 표정을 지어 역정을 냈다.
“그건 당신이 시켰잖아요!”
친절하게도 알렉스까지 호위로 붙여주어서 오르비스 유적 내부로 들어가 여우 구슬을 깨부수었던 유리아의 행동으로 전황은 확실하게 역전의 발판으로 만들어졌으며, 엘레노아에게 그 전략을 지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은현이었다.
“흥. 내 구슬을 깨부숴놓고, 설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생각이었더냐?”
“아니. 저는 그런 게….”
오르타스에게 강탈당하여 멋대로 쓰이고 있었다고는 하나, 구미호에게 있어 힘의 근원이었던 여우 구슬을 졸지에 부숴버린 중죄인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버린 유리아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책임을 져라. 네가 네 선조와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우웅
강력한 신수의 마력이 선실 안을 가득 채워 나간다.
“그놈의 피를 이어받은 너희들 모두를 죽여 그 피를 불태워버릴 것이니.”
짧은 경고였지만, 그 경고에 담겨 있던 흉흉한 구미호의 감정은 절대로 가볍지 않다.
“알…겠습니다.”
신수의 위압에 저항하지 못한 유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억울한 면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에반은 구미호로서는 정말로 증오스러웠던 오르타스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다.
곧바로 죽이지 않고 기회를 주는 것으로도 감사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구미호가 선실 안을 가득 채웠던 마력을 거둬들이고 흘끗 은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냐?”
“…아니. 그냥 말로만 하시면 되지. 왜 겁을 주고 그러십니까?”
“흥. 나로서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으니까.”
한때는 인간을 믿었으나, 배신을 당했던 구미호는 궁금해졌다.
눈앞의 유리아라는 여성이 과연 오르타스처럼 타락할지, 그와는 다른 행보를 걸을지.
한 번 그 결과를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왕녀님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셔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아, 또 뭐가 남았는데요!”
“왕녀님. 저랑 약속 하나 하신 거 있지 않습니까.”
“약속…? 아!”
유리아는 뒤늦게 페르닌에서 티르니스령으로 가는 길의 원정 행군에서 은현과 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왕녀님. 이거 끓여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네.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좋아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테니까 당장 끓여요. 지금 당장.
라면에 낚여서 덥석 받아들였던 그 제안을 떠올리고, 유리아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이윽고 경직된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은현이 그때부터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자신은 보기 좋게 거기에 속아 넘어갔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유리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번 열심히 해보시죠. 도와드릴 수 있는 지원은 최대한 해드릴 테니.”
“이…사기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