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5화 〉 505. 새로운 왕(1)
* * *
쿵!
게이트의 너머로 빠져나온 넷 중, 은현의 품에 안겨 있던 에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방안?”
잘 정돈이 되어 있는 객실 내부.
티르니스령에서 오르비스 섬으로 항해를 했던 범선 안의 객실이었다.
쿠우우우웅!
“꺄악!”
거센 폭발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선실의 내부가 거칠게 흔들렸다.
은현의 품에 안겨 있던 에린이 거칠게 좌우로 흔들리는 혼란에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
은현은 한 손으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벽을 짚고 쓰러지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했다.
“형님 이건….”
“그래. 그 공격의 여파겠지.”
구미호가 만들어낸 거대한 섬멸옥이 섬 전체를 집어삼킨 것과 동시에 주위의 바다를 휩쓸어버리면서 해류가 불안정해진 것이리라.
엘레노아에게 미리 전달해두었던, 왕가와 기사단원들을 데리고 먼저 출항하여 최대한 오르비스 섬에서 떨어지라는 지시 덕분에 저 섬멸옥에 휘말리는 건 면할 수 있었지만.
아직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젠장! 서둘러!”
“빨리 선체를 안정시켜야 해!”
“아오! 환장하겠네! 진짜로…!”
불안정한 해류로 인해, 휘몰아치는 거대한 파도들이 일제히 티르니스 범선을 덮치기 시작하여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태.
이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티르니스 범선의 선원들이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발소리들이 어찌나 정신없는지 선실 내부에까지 들려왔다.
“오셨군요.”
선실 안에서 네 사람의 등장을 반긴 것은, 게이트를 설치하고 은현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엘레노아였다.
“괜찮으세요?”
엘레노아는 곧바로 은현과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에린의 몸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저, 저도 괜찮아요. 엘레노아님.”
“그것보다 상황은?”
은현이 곧바로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말씀하신 대로 리오드님께 전달해서 바로 출항했어요. 부상자는 있어서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녀님과 오라버니가 제때 나오셔서 다행히 사망자 없이 모두 범선을 타고 출항할 수는 있었죠. 그렇다곤 해도….”
그 이후에 펼쳐진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
은현은 이 상황을 만들어낸 원흉인 구미호를 흘끗 바라보았다.
“결국…저지르셨군요.”
“흥.”
구미호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약속. 잊어버리신 겁니까?”
“아무도 안 죽지 않았느냐.”
“…….”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하는 은현의 시선에도 구미호는 몹시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저와 제라드가 가지 않았다면 신수님은 물론이고, 에린도 위험했을 겁니다.”
“올 줄 알고 있었으니, 일을 저질렀겠지.”
실제로 하늘 위에 만들어진 섬멸옥을 보고 에린이 기겁하여 그녀를 말렸지만, 구미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르비스 섬 전체를 집어삼키도록 섬멸옥을 강하시켰다.
구미호는 몹시 자기중심적으로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졌지만, 스스로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만큼 한 번 지킨 약속은 쉽게 깨지 않는다.
그녀가 약속을 중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몇백 년 전에도 오르타스와 약속을 맺고 속세로 나오지도 않았으며, 배신당한 이후 에린의 몸을 빼앗아 부활을 꾀했을 때도 곧바로 왕국과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으리라.
그렇기에 과격하게 행동하더라도 은현이 재빠르게 조치하고 커버를 쳐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구미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미호. 너 정말….”
“미호님…. 아무리 그래도 사전에 말씀도 없이 저런 기술을 사용하시는 건….”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무런 상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있는 섬 전체를 없애버리려는 그녀의 과격한 행동이 칭찬을 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다.
“흥.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던 건 네 놈 쪽도 마찬가지지. 내 구슬을 파괴할 것이라는 계획은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 텐데?”
도리어 역으로 추궁해오기 시작한 구미호의 말에 당황한 것은 은현이 아닌, 제라드였다.
“그, 그건….”
제라드가 내심 양심에 찔렸는지 몸을 움찔 떨며 구미호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직접 여우 구슬을 파괴한 것은 페르니아스 왕족들이 묻혀 있는 무덤인 오르비스 유적 내부로 진입한 유리아 왕녀지만, 그녀가 내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파수꾼인 요호를 상대했던 것은 은현과 자신, 리오드다.
오르타스에게서 강탈당했던 그녀의 여우 구슬은 몇백 년 동안 공을 들여 정갈한 힘을 축적해온, 구미호의 노력과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가 있는 정수 그 자체.
비록 구미호가 자신의 여우 구슬을 오르타스가 멋대로 활용하는 그 상황에 부아가 치밀어, 여우 구슬이 파괴되면서 도리어 후련해진 마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내심 후련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복잡한 기분을 품고 있었다.
역정을 내지 않고 생각보다 차분하다는 것에 내심 안심하였으나 여우 구슬을 파괴하는 것에 일조한 제라드의 마음 한쪽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하아. 알겠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은현은 어쩔 수 없이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서로에게 잘못된 행동을 한 가지씩 한 상황이기 때문에, 은현도 구미호를 강하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사실 2년 전 에린의 몸을 빼앗아 빙의했을 때, 곧바로 페르닌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려 했던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여기서 얌전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다.
“현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해?”
거친 해류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 조급함을 느낀 에린이 은현에게 물었다.
“…움직이자. 제라드.”
“예. 형님.”
“너는 밖으로 나가서 리오드와 티르니스 백작을 도와. 나도 곧 따라 나갈게.”
이런 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제라드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오랜 세월을 방랑으로 살아왔던 만큼 항해의 경험 또한,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이며, 오르비스 섬에서 보여주었던 싸움이나 리오드와의 인맥도 도움이 될 터였다.
“알겠습니다.”
제라드는 곧바로 의도한 바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선실을 나갔다.
“엘레노아. 부상자들의 케어를 부탁해. 그리고 에린은 몸 상태 어때?”
“나 괜찮아! 완전 건강해!”
여우 구슬이 깨지면서 응축되어 있던 신수의 마력 일부를 흡수했던 에린은 평소보다 더욱 기운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른 이후였음에도, 피로보다는 강한 의욕을 드러내는 그 얼굴에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엘레노아의 보조를 해줘.”
“응.”
“그리고 신수님은….”
이윽고 이 사단을 만들어낸 가장 골칫덩이인 구미호를 바라보고는 은현은 말을 잇기를 망설였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흥. 그럴 생각이었다.”
구미호는 코웃음을 치며 당당하게 답했다.
그녀의 답변을 뒤로하고, 은현은 엘레노아와 에린의 배웅을 받아 선실을 나섰다.
갑판 위로 나온 곳은 난장판 그 자체다.
얼굴을 때리는 매섭기 짝이 없는 굵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바다 위를 난잡하게 만들고 있다.
모두 구미호가 만들어낸 섬멸옥이 오르비스 섬을 집어삼키면서, 만들어진 여파로 조류에 불규칙적이면서도 강력한 파장을 일으키면서 생긴 자연재해다.
“휘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
“아, 하고 있다고!”
“젠장! 갑자기 이게 뭔 난리야!?”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선원들과 바다의 사투를 응시하고, 은현은 혀를 내둘렀다.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구미호에게 상의도 없이 여우 구슬을 파괴하긴 했지만, 설마 그 이후 오르비스 섬을 가득 채운 마력을 이용하여 섬 전체를 날려버리는 거대한 공격을 써버릴 줄은 은현도 예상하지 못했다.
역시나 신수인 그녀는 인간인 자신들과는 남다른 시야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재차 실감했다.
그리곤 곧바로 리오드 쪽으로 합류했다.
◆ ◆ ◆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구간을 빠져나와 잠잠해지는 해역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다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말 그대로 폭풍우를 건너온 티르니스 범선의 상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
급한 대로 자재 창고를 열어 보수작업을 시작한 지금은 선원이나 기사들이랄 것 없이 선장인 티르니스 백작의 지휘 아래에 모두가 합심하여 범선의 수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본래 아르티아 기사들의 상관은 리오드였지만, 전투가 벌어진다면 별개의 상황을 제외하고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돌발 상황들은 가문 대대로 항해술을 익혀온 티르니스 백작의 전문 분야다.
일시적으로 티르니스 백작에게 항해술에 대해서 지휘권을 양보한 리오드는 현재 선실 안에 마련된 회의에 참석했다.
리오드를 포함하여 참석한 이는 헬레나 후비, 유리아 왕녀, 알렉스, 은현과 엘레노아, 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구미호였다.
현재 이 원정대 안에서 가장 높은 서열에 있는 디아네 왕비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왕가의 비밀과 육체를 빼앗겨 변질된 자기 아들의 진실을 들은 디아네 왕비는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버렸다.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한 티르니스 백작은 디아네 왕비의 상태를 헤아리고 따로 마련된 별실을 준비해 주었다.
“…….”
헬레나 후비와 유리아 왕녀가 구미호의 눈치를 보며 침음을 삼켰다.
그녀와 자신들의 먼 선조인 오르타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이 증명된 이상, 오르타스의 핏줄을 이어받은 유리아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의 머나먼 후손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자, 그러면 회의를 시작해볼까요?”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은 기이하게도 은현이다.
회의의 안건은 당연히 지금까지 감춰져 있었던 페르니아스 왕가에 대한 진실과 다시 공석이 되어버린 ‘차기 국왕’에 대한 문제다.
“아르티아의 단원들에게는 이미 이 함구하기로 얘기는 해두었다.”
아무리 리오드가 직접 뽑았고 교육했으며 기사단장인 리오드를 존경하는 이들이 모인 기사들이라지만, 사람의 입을 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의 말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헬레나 후비와 유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페르니아스 왕가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정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왕세자의 자리가 다시 공석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1왕자인 데미안의 사망으로 인해, 다음 왕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2왕자인 에반으로 정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
“에반은 아직 안 돼요.”
유리아는 제일 먼저 나서서 에반의 차기 국왕 취임식을 반대했다.
어린 남동생은 아직 왕족으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미숙한 나이다.
왕세자의 취임식은 당연하지만, 선대 국왕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대관식을 통해 국왕이 되는 것은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었다.
“음….”
헬레나 후비 또한 동의한다는 듯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도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당장 대리청정을 통해 국정을 이끌고 있던 디아네 왕비가 데미안의 죽음으로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 폐인에 가까운 상태가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헬레나 후비가 디아네 왕비를 대신하여 그 실권을 쥐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 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째서 디아네 왕비가 폐인이 되어버렸는지, 데미안 왕자의 죽음 등 밝혀야 하는 사안들이 굉장히 많다.
페르니아스 왕가에 대한 비밀을 숨기면서, 이 일을 수습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대리청정의 시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것은 타국과의 외교에서도 그리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줄 우려가 존재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왕의 존재가 필요한 시기.
오르타스는 이 타이밍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노리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제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연 은현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새로운 국왕 폐하는 필요하시고, 하지만 왕세자님이 되실 에반 왕자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셔서 그 소임을 수행지 못하시죠. 그래서 저는 새로운 국왕으로 추천을 드리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만….”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주위의 반응을 살폈다.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으로 곤란한 표정을 짓거나, 궁금해하는 표정,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 등 다양하다.
몇 년 전까지 외국인이며 아무런 신분도 없었던 남자가 이제는 왕국의 주인인 국왕의 자리에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를 앉힐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져 버린 애석한 상황.
“그거 완전 비선실….”
“조용히 하세요. 그런 거 아니고, 이걸 통해서 뭔가 이득을 볼 생각도 없으니까.”
은현은 유리아의 작은 중얼거림을 빠르게 끊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흘겨보던 유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누구를 추천하려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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