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화 〉 419. 영웅의 딸(2)
* * *
“에이라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직 에이라가 다섯 살의 무렵.
테레지아는 에이라에게 물었다.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성인이 되면서 귀족으로서의 많은 소양을 갈고닦고, 적당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 남성과 정략결혼을 맺는다.
왕국 내부 귀족들 간의 결속을 다지고 왕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남편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역할을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귀족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에이라의 어머니인 테레지아는 막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에이라에게 그런 교육과 사고방식을 주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물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그것은 다른 귀족 부인들이 딸에게 하는 질문과는 조금 달랐으며, 딸의 대답도 다른 귀족 집안의 여식들과는 많이 달랐다.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고 싶어요!’
왕국 최강의 기사로서, 기사단의 수장인 기사단장으로서, 반짝반짝 빛나는 갑옷들로 무장한 무수히 많은 기사를 거느리며 출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동경했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자신도 모르게 동경하게 되고 꿈을 꾸게 만드는 그런 강렬함.
‘하필이면….’
다섯 살 밖에 안 된 딸의 꿈이 하필이면 남편과 같은 기사가 되는 것이라는 것에 테레지아는 복잡한 심경을 품었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맑은 눈망울로 아버지에게 동경의 마음을 품은 딸의 꿈을 부정할 수 없었다.
기사란 백성과 나라, 귀족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자신의 용맹함을 많은 사람이 칭송하는 명예로운 직업이지만,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자란 아가씨가 하기엔 너무 위험한 직업이었다.
어린 마음의 치기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예법과 취미의 영역으로 검을 가르치긴 했지만, 에이라는 검술에 대해 진심이었다.
얼마나 진심이었으면 살면서 단 한 번도 반기를 들지 않았던 에이라가, 아이테르의 졸업을 앞두고 아르티아의 입단 시험에서 멋대로 불합격의 결정을 내린 리오드에게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은현의 중재로 부녀지간의 화해는 순조롭게 이어졌지만, 그때 당시의 테레지아는 난처함에 정말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딸에게 험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남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아버지를 동경하여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하는 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한 쪽의 편도 들 수 없었다.
‘정말로 고집스러운 건 그이나 에이라나 똑같아서….’
역시나 피는 못 속인다고, 서로의 의견에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부녀지간의 사이에서 테레지아는 한숨밖에 쉬지 못했다.
성별은 다르더라도, 에이라는 틀림없는 리오드의 딸이었다.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의 제약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기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인지, 누군가가 자신을 약하다가 얕잡아본다면 정말로 불같이 화를 낸다.
그래서 에이라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얕보였나 봐?”
“…….”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표정을 하는 흡혈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한 것을 보며, 에이라는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흡혈귀의 양팔을 절단시킨 에이라는 마치 살얼음 같은 싸늘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말했다.
“그 기세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한번 보고 싶네.”
에이라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올리비온 검술]
[벌새의 춤]
“크윽!?”
쉴새 없이 날아드는 참격에 양팔이 잘려나간 흡혈귀는 경악했다.
에이라의 맹공을 피해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여 미처 양팔을 재생시킬 여력도 없을 지경.
검의 궤도를 읽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흡혈귀가 정신이 없을 때, 흡혈귀의 뒤쪽에 있는 차한성과 맹공을 이어나가던 에이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뭐하고 있어!”
“아…!”
에이라의 호통에 이어서 어깨를 움찔 떨던 차한성이 굳어 있던 몸을 일깨워 에이라의 맹공을 피해내고 있는 흡혈귀를 이어서 공격했다.
“크…윽! 이것들이!”
이제는 뒤쪽에서도 칼이 날아들어와 두 남녀가 협공을 해오자, 흡혈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음에는 에이라나 차한성이나 둘이 협공을 해온다고 하더라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 벌어지는 싸움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강한 위력이 실려있지만, 검의 경로가 매우 솔직하여 흡혈귀의 동체 시력으로 차한성의 공격을 피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더욱 성가신 것은 싸움에 난입해온 에이라다.
위력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지만, 빠른 속도의 속검을 구사하는 이 검속을 동체시력으로 따라잡는 건 조금 버거웠다.
에이라는 차한성의 공격 템포에 맞추어 검을 휘두르면서 계속 흡혈귀를 견제하고 억지로 만들어낸 빈틈을 강제로 비집고 들어가 급소를 노려온다.
두 사람의 공격 스타일은 리듬부터 속도, 위력이 너무나도 달랐지만, 에이라는 차한성의 움직임을 보조하며 흡혈귀를 계속 몰아넣었다.
“크…윽!”
협공을 피해내던 차에, 에이라의 검이 흡혈귀의 옆구리를 얕게 베어내기 시작하자 흡혈귀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팔의 재생을 시킬 여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두 기사의 공격을 피해내는, 자신이 몰리고 있는 이 상황이 심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인간을 사냥하는 쪽의 존재지, 사냥을 당하는 쪽의 존재가 아니다.
[흡혈귀 혈기술]
[럼블도그]
자신의 피를 매개로 바닥에서 튀어나온 개의 형상들이 흡혈귀에게 맹공을 펼치던 두 기사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계속해서 맹공을 이어가던 에이라와 차한성은 어쩔 수 없이 흡혈귀에게서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쯧!”
끈질기게 달라붙어 검을 휘둘러온 두 기사가 떨어지자, 흡혈귀는 허공으로 점프하여 더욱 거리를 벌렸다.
“…한성아.”
허공에서 집중하여 양 팔을 재생시키는 흡혈귀를 바라보며 에이라는 작은 목소리로 차한성을 불렀다.
“예?”
“아버지의 검술. 본 것들은 다 따라 할 수 있는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에이라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한성은 잘 모르겠다고만 대답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적어도 기술적인 부분에서 위력이나 완성도에 자신은 없지만 재현을 해보려한다면 해볼 수 있다는 뜻.
성별과 체격의 차이로 인해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검을 모두 재현할 수 없는 에이라에게는 불가능하다.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재능에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지만, 지금은 저 흡혈귀를 처리하는 것이 선결 과제.
“내가 시간을 벌어줄게.”
에이라는 차한성이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기술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자신보다 경험적인 면도, 마력의 양도 부족한 애매한 상태지만, 그의 눈과 노력으로 재현해낸 리오드의 검술은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강하다.
하지만 차한성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에이라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서, 선배…. 하지만 저는….”
“적어도 아버지의 검을 훔쳐 배웠다면, 제대로 선보여봐. 그렇지 못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
차한성의 거절을 단칼에 거절해낸 에이라는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재생을 완료하여 바닥에 착지하고 있는 흡혈귀에게 돌진했다.
“하! 네가 강하다고 해도!”
흡혈귀는 차한성을 내버려 두고 혼자만 달려온 에이라를 비웃었다.
둘이서도 처치하지 못한 자신을 에이라 혼자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흡혈귀는 에이라의 그 건방진 자신감을 비웃으며 자신의 손톱을 강화시켰다.
“그 버릇을 고쳐주지!”
둘의 치열한 공방전을 본 차한성은 에이라가 말했던 경고의 의미를 곱씹었다.
“용납할 수 없다라….”
그것은 에이라가 자신의 아버지인 리오드에 대해 그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아버지의 기술을 선보임에 있어서 볼품없는 수준의 완성도라면, 그것은 리오드를, 올리비온 후작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는 에이라의 경고.
따라할 거라면 똑바로 따라하라는 에이라의 경고는 차한성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후우우….”
차한성은 심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의 마력을 검속에 응축시키며 갈무리했다.
그러면서 흡혈귀과 교전을 이어가고 있는 에이라의 모습을 응시했다.
카아앙!
빠르다.
정교하다.
매섭고 날카롭다.
에이라의 검술을 응시하고 분석한 차한성은 그녀의 검술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받쳐주는 남성의 강한 힘을 기반으로 탁월한 밸런스와 공수 일체의 힘을 보여주는 리오드와 이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던 은현의 빠른 속검술이다.
신체 강화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근력이 약한 에이라가 리오드의 검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에이라가 선택한 방법은 리오드의 검술 속에서 힘으로 커버가 불가능한 부분을 유연하고 가벼운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속도로 메꾸는 것이었다.
‘부족한 힘은 속도로.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몸의 밸런스를 유지하도록 신경 써야 해.’
이 검술의 힌트는 예전, 에이라가 리오드에게 아르티아 기사단의 입단을 인정받기 위해 에린과 함께 던전 안에서 은현에게 특훈을 받았을 때, 은현에게서 받은 힌트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 것은 다름 아닌 은현이었다.
“…대단해.”
성별의 차이를 극복하고, 아버지의 검을 계승하기 위해 그녀 나름대로 고민하고 행동하고 노력한 결과를 본 차한성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류에 불과 하지만 이것 또한 ‘올리비온 검술’의 틀에 들어가는 틀림없는 후작 가문의 검술이다.
리오드가 남성에게 특화된 완벽한 ‘올리비온 검술’을 완성시켰듯이, 그의 딸인 에이라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여성에게도 맞는 ‘올리비온 검술’을 차근차근 완성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빠르고, 매서우며 날카로운 움직임들을 완성시키기 위해 보낸 땀과 노력의 시간들이 차한성의 눈에는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검을 모욕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차한성에게도 경고를 했듯이, 에이라는 아버지와 후작 가문, 아르티아 기사단을 욕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고, 또 노력하여 지금의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여성의 몸으로 험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랬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은 이렇게 훌륭한 기사가 되어 당신의 검을 이어받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에이라의 의지가 행동 하나하나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절대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차한성은 에이라의 경고와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한번 검속에 마력을 한계의 한계까지 응축시켰다.
“크….”
검에 응축된 마력이 날뛰며 휘몰아치고 그 반발력에 검을 쥐고 있던 양손이 벌벌 떨려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보았던 리오드는 지금 자신의 열 배가 되는 양의 마력을 검에 주입시키고도 태연하게 밸런스를 유지했다.
적어도 눈대중으로 훔쳐서 배웠다고 할지라도, 이 기술을 볼품없이 선보여 더럽히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에이라의 경고가 한계의 한계를 맞이했음에도 이를 꽉 물며 버티도록 오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벌벌 떨리며 자칫 잘못하면 검을 놓쳐버릴 지경에 까지 놓이자, 차한성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선배애애애!”
크게 자신을 부르는 차한성의 목소리를 들은 에이라는 자신의 검을 막아낸 흡혈귀의 강화 손톱을 튕겨내고는 거리를 벌렸다.
차한성과 흡혈귀의 직선상의 사정거리에서 에이라가 아예 벗어난 것을 확인한 차한성은 마침내 자신의 검에 담겨 있는 검기를 해방하며 위로 들어올린 검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올리비온 검술]
[태산 가르기]
차한성의 검에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전방의 흡혈귀를 집어삼켰다.
“크…으으으!”
미처 차한성이 시전한 기술의 사선에서 벗어나지 못해 마력의 폭풍에 덮쳐진 흡혈귀가 이빨을 꽉 깨물며 차한성의 마력에 저항하려 했지만.
[올리비온 검술]
[연월]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에이라의 초승달 같은 검기가 흡혈귀의 몸에 직격하면서 그 저항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크아아아아!”
전신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흡혈귀의 비명이 끊어지는 순간, 마력의 폭풍에 휩싸인 흡혈귀의 숨통도 완전히 끊어졌다.
폭풍이 소멸하면서 흡혈귀의 찢겨진 몸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확인한 차한성은 극심한 피로와 정신의 탈력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우….”
복수는 끝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시를 빼낸 기분은 기쁘면서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수고했어.”
이윽고 에이라가 바닥에 주저 앉은 차한성에게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선배님. 감사합니다.”
“10점이야.”
“…그거 10점 만점에 10점이라는 소리인가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어오는 차한성의 말에 에이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후,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이윽고 정색한 표정을 짓고는.
“당연히 100점 만점에 10점이지.”
“…….”
에이라의 평가 기준은 너무 높았다.
“위력은 그렇다쳐도, 준비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 오래 걸렸어. 이번 임무가 끝나면 앞으로 우리집으로 와. 아버지에게 말씀드릴테니 정식으로 배워.”
“제, 제가 올리비온 검술을…말입니까!?”
굉장히 뜬금없는 타이밍에 파격적인 제안이 들어온 것에 차한성은 경악했다.
잔뜩 놀라는 그 태도를 보고, 에이라는 두 눈을 흘겨보며 물었다.
“싫니? 설마 싫다고 하지는 않겠지? 기사단원들 사이에서도 아버지의 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데. 설마?”
게다가 기사단 본부에서도 아니고 후작 가문의 훈련장에서 직접 개인지도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영광스럽게까지 느껴야 한다고 에이라는 생각했다.
“그, 그게 아니라…. 단장님이….”
“아버지가 뭐?”
“저 단장님이…진짜로 무서운데요.”
에이라와 같이 붙어있을 때면, 아주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리오드의 시선을 느끼곤 했다.
진짜로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오줌을 지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에이라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시끄럽고 당장 배워. 아버지의 검을 모욕하는 건 내가 용납 못해.”
“…넵.”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