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394화 (377/730)

〈 394화 〉 394. 차원의 문(3)

* * *

은현은 결국 육체의 붕괴를 버티지 못하고, 머리만 남은 레나트의 이마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은현 고유능력]

[기억견문]

접촉한 상대의 영혼에 간섭하여 그 기억을 읽어 들이는 은현의 능력.

이마를 접한 손가락을 통해, 레나트의 기억이 은현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힘이 필요하니?

­너에게 특별한 능력을 내려줄게.

­이걸로 차원과 차원의 틈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내.

­얼마나 많은 목숨을 희생시키던, 어떤 대가를 치르던 반드시.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이미 메디아에 의해서 한 차례 부활했던 레나트의 영혼은 갈가리 찢긴 상태.

읽어 들인 기억의 정보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도저히 식별할 수가 없다.

속내를 읽기 위해 사용한 능력이지만, 알아낸 것은 레나트의 모든 행동이 그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

합성으로 만들어진 용인 여성, 레나트는 결국 육체의 붕괴를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선생님?”

뒤늦게 은현을 쫓아와 상태를 살폈던 레지나가 은현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 불렀다.

은현은 레지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바닥을 응시했다.

[아이야?]

“예?”

[저 엘프 아이가 아이를 부르고 있다.]

“아….”

은현은 정신을 차리고 레지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 잠깐 생각 중이었어.”

“무슨 일이신가요?”

심상치 않은 표정의 은현을 보고, 레지나도 얼굴을 굳히며 긴장했다.

“…웃고 있었어.”

“웃고…있었다고요?”

“어.”

은현은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죽음의 순간 속에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레나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기억을 읽었음에도 제대로 된 정보는 취하지 못했으며, 레나트의 영혼은 이미 소멸했다.

그녀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뭐가 목적이었던 걸까.”

고대 마수를 소환하여 세계수를 노리려 했던 이유는.

이 동굴에서 은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영혼의 소멸이라는, 죽음보다도 더한 결말을 맞이하면서도 웃고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레지나.”

“네?”

“데르킨에게 연락을 해봐. 숲에 복귀하면서, 무언가 이변을 느끼지 못 했냐고.”

“…알겠습니다.”

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지나는 곧바로 통신 수정구를 꺼내어 데르킨과 연락을 취했다.

­아뇨. 그러한 징조는 없습니다.

데르킨은 곧바로 혹시나 숲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부정했다.

실제로 세계수의 상태도 매우 건재하며, 레지나에게 직접 고대 마수의 존재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것처럼, 세계수는 도움을 호소해오지도 않았다.

“…….”

지금이 아니라, 나중을 생각해둔 어떠한 징조에 대해, 은현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합성으로 만들어진 용인 여성을 죽이고, 사건은 완전히 일단락되었지만, 그녀가 벌여둔 짓이 아직 밝혀지지 않고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 찜찜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선생님. 일단은 돌아가시는 게 어떠세요? 숲에는 은인이신 아내 분도 있으니까요. 걱정하고 계실 거에요.”

“…그렇지.”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먼저 엘프의 숲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일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짓는다.

결코, 쉽게 넘길 사안은 아니지만, 엘프의 숲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현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돌아가자.”

“네.”

거대한 각궁을 짊어진 레지나는 웃으며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

레지나와 시선을 마주친 실비아의 영체가 순간 움찔하여 어깨를 떨었다.

눈웃음을 지으며 은현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은현을 가리키는 레지나의 행동을 알아보고 실비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 여왕님….]

“저랑 약속했잖아요.”

[그, 그치만….]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을 배배 꼬고 있는 광경을 멀찍이서 바라본 은현은 애석한 쓴웃음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엘프와 정령의 어리숙한 실랑이를 보고 있었던 것은 은현뿐만이 아니다.

[…뭐야. 저 정령은?]

마치 첫날밤을 맞이하는 새색시처럼 부끄러움을 잔뜩 타고 있는 상급 정령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브류나크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조금 긴장되시나 보네.”

[긴장한다고? 너랑 대화하는데? 니가 뭔데?]

“그러게. 내가 뭐라고.”

과거의 선택으로 스스로 희생하는 길을 골랐던 것이 은현에게는 어떠한 결과로 작용했을지를 내심 짐작하고 있으므로, 실비아는 은현에 대해 다양하고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은현도 그녀를 마주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여 멘붕 상태에 빠졌겠지만, 여신과 아내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멘탈이 회복되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지금 은현은 실비아처럼 허둥댈 정도는 아니었다.

“아, 그런데 말이야.”

적나라한 파트너의 막말이 매우 그리웠는지, 욕을 먹으면서도 은현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다시 만나게 된 파트너와의 대화는 이제 그것을 순순히 웃으며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게 현재 상황이다.

“너, 그 말투 이제는 좀 고쳐야 할 거야.”

[흥, 내가 왜.]

브류나크의 평소 언행은 소멸하기 이전의 과거에도 가시가 돋치거나, 공격적인 표현으로 은현을 욕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 거친 언행을 하는 것에도 자신만의 기준이 존재한다.

다른 이들보다 그 선의 허용 범위가 굉장히 높을 뿐, 성격이 나쁜 것이 아니다.

언행과 성격과는 달리, 브류나크는 주인인 은현의 요망에 따라 무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러므로 굳이 브류나크의 말투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리아나에게는 이미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기 때문이다.

“내 아내들이 말이지. 내가 다른 누군가한테 무시당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

설령 그것이 과거 자신과 함께 싸워오며 소멸했던 파트너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아내들이 아니다.

실제로 일리아나나, 에린은 정체와 힘을 숨기고 대외적으로 무능한 기둥서방의 역할을 해오면서 많은 귀족에게 무시 받아왔다는 것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나랑 둘만 있을 때는 괜찮은데, 혹시라도 일리아나나 다른 아내가 있을 때는…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 나도 기껏 부활했는데 다시 허무하게 부러지고 싶지는 않다.]

일리아나의 진심으로 짜증스러움이 섞인 표독스러운 눈동자와 힘을 경험한 브류나크는 절대로 그녀에게 대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의식 속에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런데 잠깐, 너 지금 ‘아내들’이라고 했냐?]

“어.”

[아내가 있다는 거야, 결혼도 했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복수형이라고? 몇 명인데?]

“네 명. 아니…. 다섯 명인가…?”

[…….]

순간 브류나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며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은현의 말을 이해한 브류나크의 창대가 거칠게 떨렸다.

[이런 부러운 개자식을 봤나…. 니가 사람이야? 양심은 어따 뒀냐? 네 명 또는 다섯 명이라는 건 또 뭔 소리야?]

“그게….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브류나크는 은현이 신의 사도라는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다.

실제로 악마들을 상대하면서 여신에게서 받았던 권능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싸워왔으니 모를 수가 없다.

[…부러운 놈.]

무기가 인간을 질투하는 경우가 있다니, 별의별 경우가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은현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래도 여자를 돌같이 보고 철벽이나 치면서 멀리하던 놈이 결혼도 하고 마음의 여유도 찾은 거 보면 좀 나아졌네. 나중에 다시 불러서 제대로 설명해라. 알았냐?]

“그래.”

은현은 그 대화를 끝으로 브류나크의 소환을 취소시켰다.

창을 구성하고 있던 신력들이 흐트러지며 형체가 사라져버리자, 브류나크의 역소환을 지켜보던 베르단디는 웃었다.

[조금은 거칠어도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 마음이 잘 나타났구나.]

“뭐 본성이 그렇게 나쁜 녀석인 것도 아니라서요.”

만약 브류나크의 본성이 악에 가까웠다면, 사용하기는커녕 가차 없이 소멸시켜버리는 것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자, 그러면….”

“아직도 그런 태도를 보이시면 어떡해요? 제가 자리도 만들어드렸잖아요.”

[하,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어디에 시집이라도 가시나요? 그냥 대화하는 것뿐이잖아요. 답답하게 굴지 마시고 그만 가세요. 좀!”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엘프와 정령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지나. 이동하자.”

“아, 네. 선생님.”

“이야기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실비아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동하면서 해도 괜찮을까요?”

[무, 물론이지….]

실비아는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걸어온 은현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 ◆ ◆

“으응….”

일리아나는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코를 타고 들어오는 향긋한 풀 내음이 가득한 감각은 오랜만에 맛보는 자연의 냄새 그 자체였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잠이 든 장소가 이전에 은현이나 엘레노아와 함께 반년을 가까이 생활했던 엘프 마을의 목조 주택이라는 것 때문인지 일리아나의 몸은 그렇게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과 향기들은 안 그래도 나른한 몸을 더욱 풀어지게 했다.

솔직히 푹신한 침대 위에서 계속 누워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지만, 일리아나를 잠에서 깨운 건 갈증 때문이다.

“목말라….”

나른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온 일리아나는 휘청이며 방을 나왔다.

체력이 원체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상위 마법을 트리플 캐스팅으로 계속해서 펑펑 쓴 결과로 극심한 탈력감을 겪고 있는 일리아나의 정신은 반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몽롱한 상태.

그런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오자 일리아나의 움직임을 감지한 에밀리아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작은 인형의 몸체를 움직여 일리아나의 앞으로 다가온 에밀리아는 조용히 일리아나의 명령을 기다렸다.

식탁에 앉아 엎드린 일리아나는 곧바로 에밀리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물 좀 가져다줄래?”

“데르킨님께서 전달하신 음료가 존재합니다. 서브 마스터께서 일어나신다면 꼭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바로 가져다줘.”

“명령을 수락합니다.”

일리아나의 명령으로, 에밀리아가 곧바로 가져온 음료는 녹색의 빛을 띠는 액체였다.

신기하게도 맑은 빛깔을 띄우고 있는 녹색의 빛은 일리아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게 뭐야?”

“세계수에서 나온 수액을 희석해 만든 음료라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심한 마력의 소모는 물론, 피로를 비롯한 전반적인 몸의 컨디션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영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서브 마스터의 소모된 마력과 정신력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흐응, 그래?”

다른 것도 아닌 세계수의 수액을 원료로 만든 음료가 흔할 리가 없다.

그만큼 엘프의 숲에서 자신과 은현이 대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일리아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에밀리아가 건네준 음료를 곧바로 들이켠 일리아나는 곧바로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대단하네.”

어질어질하고 몽롱했던 정신의 상태가 맑아지고, 나른한 몸은 금세 활력을 되찾았다.

웬만한 재료들로 만들어낸 영약보다도 효과가 좋은 것에, 역시나 세계수라는 감탄이 들 정도다.

“서브 마스터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말해.”

“이 ‘달의 마을’이라는 숲은 지금까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지 않은 정보들로 가득합니다. 이 마을을 둘러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모르는 건축 양식과 자재들, 모르는 약초, 모르는 종족들의 정보는 에밀리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접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을의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그 인형 소녀의 열의는 그 나이대의 외모에 걸맞은 소녀의 탐구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갔다 와.”

“감사합니다.”

피식 웃은 일리아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에밀리아가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은현이 거실의 현관문을 열고 목조 주택 안으로 들어왔다.

“안 잤어?”

은현은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일리아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방금 일어났어.”

“그건….”

“이거? 데르킨님이 주고 갔다는데? 맛도 맛인데, 효과도 정말 좋아. 너도 마셔볼래?”

컵을 흔들며 담겨 있는 음료를 권하는 일리아나의 행동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아. 그 음료. 내가 만든 거야.”

“…네가?”

“어. 300년 전에.”

“흐응….”

은현은 곧바로 컵 하나를 가져와 일리아나의 옆에 앉았다.

“이건 사실 피로나 마력의 회복 효과도 뛰어나지만, 이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거든.”

“그러면?”

컵에 세계수의 수액을 희석해 만든 음료를 따르는 은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일리아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엘프들이 인간들보다 오랜 시간을 사는 장수 종이라는 것은 너도 알지?”

“알지.”

“그래서인지, 엘프들은 상대적으로 아이를 가지기 굉장히 힘들어.”

숲의 주민인 엘프들의 가장 큰 특징은 몇백 년의 시간을 장수한다는 것과 동시에, 인간들보다 번식 능력이 인간보다 떨어진다.

오랜 시간을 사는 엘프들의 개체 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으면서, 늘어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은현의 도움으로 고대 마수를 물리칠 수는 있었지만, 그 싸움 때 은현은 지금처럼 반신도 아니었으며 겨우 여신의 권능을 몸에 익히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300년 전에도, 고대 마수가 세계수를 노리고 침략을 해온 사건에서 많은 엘프가 죽었고, 새로운 엘프들은 생겨나지 못했어.”

“그럼 설마….”

“맞아. 이건 내가 엘프들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기 쉽도록, 남성 엘프들의 원기를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력제 같은 영약이지.”

“…….”

은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일리아나를 바라보며, 세계수의 수액이 희석된 음료가 담겨 있는 컵을 흔들었다.

“일리아나. 나, 이거 마실까?”

“…뭐?”

“지금 내가 이걸 마시면….”

천천히 일리아나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끊었던 말을 이었다.

“넌 오늘 잠 못 자.”

“…후후.”

자신을 유혹하는 남편의 목소리에 일리아나는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는 먹잇감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입술을 핥고는 남편의 유혹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응했다.

“바라던 바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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