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 376. 가족의 얼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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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되찾은 앨리스의 두 눈은 20년 전의 10대 소녀 시절 보여주었던 푸른색이 아니다.
세계수의 기운을 받은 나뭇가지로 제작된 기운의 영향인지 녹색의 빛을 띄우는 눈동자.
그 눈 속을 통해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앨리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엄마. 눈이 굉장히 예뻐요.”
“그러니?”
낳고 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딸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낼 수 있게 된 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에 안겨 오는 딸을 꼭 끌어 안아주었다.
처음 보는 자신의 딸의 모습은 굉장히 아담하고 인형같다.
만져도 보고, 정령의 힘을 빌려 형태를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두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틀리다.
“이제 저 볼 수 있는 거예요?”
“응.”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모녀간의 정을 다지고 있을 때, 은현은 둘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수술은 잘 끝났고 회복도 제대로 되고 있지만, 적어도 3개월 정도는 이식한 의안이 제대로 몸 안에 정착할 때까지 무리한 행동은 삼가. 정기적으로 약은 물론, 당연히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해. 데르킨.”
“네.”
“3일 치의 약을 지어줄게. 3끼마다 매번 꼬박 먹여. 그리고 회복에 필요한 음식들을 알려줄 테니까 그것 위주로 먹이고.”
“알겠습니다.”
데르킨은 은현이 알려주는 음식들의 이름들을 모조리 머릿속으로 집어넣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요리는 앨리스가 하지?”
“…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 릴리에게 간호식을 만들어두도록 말해둘테니까.”
“감사합니다.”
“이 상태로는 보육원을 운영하는 것도 무리일테니까. 당분간은 내가 맡아줄게. 엘빈.”
“그래.”
“공식적으로는 네가 보육원 운영의 대리를 맡아. 기본적인 보고서 작성 요령이나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물론.”
이미 릴리와 함께 에리스를 포함한 이외의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앨리스의 보육원 운영을 도왔던 엘빈은 망설임 없이 가능함을 답했다.
“좋아.”
앨리스의 몸 상태에 대한 이야기와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대강 정하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병, 나도 도와줄게.”
“…넌 진짜로 안 바쁘냐?”
느닷없이 아니에스까지 이 주택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혀오자, 은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나한테는 앨리스의 회복이 우선이야.”
“…그래.”
저렇게까지 강경하게 본인이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는데, 딱히 말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데르킨과 에리스랑 좋은 시간 보내. 우리는 이만 나가볼게.”
“네. 감사해요.”
“감사드립니다…. 은현님.”
밝은 미소로 자신에 고개를 숙여오는 두 부부의 모습에 이어서, 에리스 또한 상체를 숙여 은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래.”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꼽위에 올리고 허리를 90도로 숙여 꾸벅 인사를 해오는 하프엘프 소녀의 모습은 자연스레 웃음꽃이 피게 만드는 귀여움이다.
은현은 피식 웃으며 에리스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주고는 곧바로 앨리스의 방을 나왔다.
다수의 방이 존재하는 이곳은 5층으로 구성되어 자신과 아내들이 사는 집 안이 아니다.
던전 주택의 옆에, 새로 지은 건물로 그 용도는 이 던전을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
곧바로 아니에스와 엘빈을 데리고 이동하여 아니에스가 사용하게 될 방으로 안내했다.
엘빈의 경우에는 보육원에서 지내어 관리의 대리 역할을 맡아야 하니 따로 방을 배정받지는 않았다.
“이 방을 써.”
“흐음.”
은현의 안내에 따라 배정받은 방의 내부를 둘러보던 아니에스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내부를 관찰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건물들을 단기간 안에 뚝딱 지어내냐?”
“뭐 좀 편법을 쓰고 있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인 은현을 보고는, 아니에스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그 감사의 의미는 다름 아닌 앨리스의 시력을 회복시켜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
“이걸로 나도 조금은…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어.”
비록 자신의 힘으로 앨리스를 회복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에 아쉬운 감정이 남아있어도 다행이라는 감정이 더욱 앞섰다.
“너도 참 책임감이 넘친단 말이야.”
“아무렴 너보다 더 할까.”
아니에스는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져오는 은현의 얼굴을 관찰했다.
“이제는 좀 살만한가봐?”
“…그렇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확실히 최근의 자신은 사는 것이 즐겁다.
400년을 가까이 삶을 살면서 즐거웠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의무적으로 살아있었을 뿐,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열망하거나 욕구를 추구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다.
“흥, 일리아나나 엘레노아가 꽤나 노력했나보네.”
이러한 것은 모두 적극적으로 자신의 멘탈을 케어해주는 것에 신경을 써주었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 그리고 가장 큰 공헌을 해왔던 것은 베르단디다.
“…….”
은현은 이전에 아니에스가 자신에게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넌 X발, 진짜로 그 X같은 멘탈 어떻게 안하면, 앞으로 일리아나는 물론이고 내 후임인 엘레노아까지 마음고생 존나게 할 텐데, 너 때문에 일리아나가 나한테 푸념하러 오는 건 물론이고, 내 후임의 멘탈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꼴은 절대로 못 봐. 니 뒤치다꺼리를, 왜 내가 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
빨리 마음 다잡고 정리 안하면 니 아가리 속에 옥수수들 다 뽑아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어?
경고에 가까웠던 조언을 하며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 차버렸던 그때의 아니에스를 떠올리자니, 은현도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때? 내 옥수수는 무사할 것 같냐?”
“흥. 합격이야. 적어도 일리아나나 내 후임이 될 엘레노아는 행복한 것 같으니까.”
은현이 던지는 농담에 코웃음을 친 아니에스는 당당하게 합격을 선언했다.
적어도 그의 정신 상태를 걱정하는 두 여성이 자신을 찾아와 하소연하면서 귀찮게 만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야. 나도 하나만 부탁해도 되냐?”
“뭔데.”
“그 의학이라는 거. 나한테도 가르칠 수 있어?”
“더럽게 힘들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부정적인 답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은현의 대답에 아니에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너, 머리 안 좋잖아.”
은현이 설명한 이유는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
실제로 아니에스 또한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자신의 성향은 아니에스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로서 신전의 상징인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베스타 여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막대한 신성의 축복 때문이다.
몸은 절대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육체의 성장 또한 멈춰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신성의 축복으로 인해 어떠한 공격 속에서도 자신의 몸은 절대로 상처를 입지 않는 최강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자신은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전형적인 육체파 스타일이다.
신성의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과 의학이라는 학문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분야다.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아.”
“…….”
“앨리스의 일로 네 스스로 일에 한계를 느낀 거잖아.”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전혀 생소한 분야.
은현이 아니에스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게 이러한 부류의 부탁을 해온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20년 전, 신입 사제였던 그녀는 후열에서 팀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싸우는 것을 거부했다.
다른 사람의 뒤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원했던 그녀에게는 때마침 신성의 축복을 부여받은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싸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멘토가 존재했다.
그래서 은현의 훈련을 받고 인파이터 사제로서 역량을 성장시킨 사제가 바로 현재의 아니에스이다.
“의학이라는 건, 끝이 없는 학문이야. 너에게 이것이 맞지 않다고 단언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성취가 더욱 느린 건 사실이니까.”
“그렇게 힘들어?”
“사람의 몸에 나타나는 병은 한두 개가 아니야. 수십, 수백 가지가 넘는 다양한 질병들이 존재하며, 그 질병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알고있어야 하는 지식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지.”
병에 대한 지식에는 발병의 원인, 치료 과정, 완치 이후의 관리 등.
하나의 병에 대해 공부하는데에만 해도 수많은 정성과 노력, 시간이 들어간다.
그러한 병들을 하나도 아니고 수십 수백 가지를 파악해야 하는 의학은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은 학문.
게다가 지구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신전과 사제들이 신성의 기도를 통해서 의학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의학이 따로 발전하지 않았다.
당연히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설비나 체계도 잡혀있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앨리스의 경우가 매우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알았어.”
아니에스는 은현의 설명에 납득하고는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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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래. 내가 제공한 선과(??)가 도움이 되긴 했나보군.”
앨리스의 치료 소식을 전달함과 동시에, 에린의 상태를 보러 온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흥.”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해오는 은현의 말에도, 구미호는 코웃음을 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히히.”
오히려 은현의 무릎을 베고 기분이 좋다는 듯 잠을 자고 있는 에린의 모습을 보고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성스레 머리를 쓸어내려주며 가지런히 정리를 해주고 있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주인과 애완동물이다.
“…쯧. 한심한 것.”
혀를 차며 자신의 후예를 바라보고 있는 구미호의 표정은 심히 언짢아보였다.
“꽤 힘들었나 봅니다.”
“네 녀석은 그 녀석의 응석을 너무 받아들여 줘.”
“제가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은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육 하나도 붙지 않은 깡마르고 허약한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아직 미성년자였던 에린을 심하게 굴렸으면 굴렸지, 응석을 받아주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뭐 훈련이 끝난 이후에는 좀 어리광을 부려와도 받아주긴 했지만.’
“조금만 힘들어져도 곧바로 네 녀석에게 엉겨붙어서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다니. 나 때는 이렇지 않았다.”
“…….”
천 년의 세월을 지내온 신수가 말해오는 ‘나 때는….’이라는 말에는 도저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내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흥. 이제는 자신의 연인이 되었다고 감싸고 도는 꼴이 우습구나.”
“그, 그런 게….”
아니라고 하기엔 또 뭐한 그런 애매한 상황 속에서, 난감해하는 은현의 태도를 본 구미호는 은현을 비웃었다.
이내 화제를 전환하여 은현에게 물었다.
“여신께선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셨더냐?”
“…예.”
베르단디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떠오르자, 은현의 낯빛도 어두워져 갔다.
“흐음.”
은현을 골려줄 의도가 다분했던 원인을 제공한 구미호는 짧게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한테 괜찮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해보겠느냐?”
“…뭡니까?”
미심쩍어하는 얼굴을 보이면서도, 흥미를 감추지 못하고 귀를 기울이는 은현을 보고 구미호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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