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299. 릴리의 결심(2)
“둘에게는 엘빈과 함께 이 보육원을 맡기고 싶어. 이곳의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데르킨과 앨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흔쾌히 은현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었다.
“주, 주인님…! 저는…!”
“싫어?”
“…….”
싫을 리가 없다.
자신과 어머니를 주저 없이 버린 아버지는 몰라도,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어머니의 행방은 지금도 릴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무거움 짐이다.
그 마음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릴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것에, 이것이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릴리.”
“…네.”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드는 것 같아서 사양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오히려 이번 일로 나에게 새로운 마음의 빚을 지려 한다면,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해. 그거면 된 거야.”
이미 엘빈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은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주인님….”
고개를 푹 숙이고 떨리는 가녀린 어깨를, 은현이 작게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작은 위로를 마치고 시선을 옮겨 세 명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장기간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동안 이 시설의 관리를 부탁할게. 아마 엘빈, 너라면….”
이미 많은 아이들의 호의를 잔뜩 받고 있는 엘빈은 물론이고, 데르킨과 앨리스도 있다.
“문제없다.”
담담하게 대꾸하는 엘빈의 목소리에는 이미 자신감이 차 있었다.
공작 가문의 예산으로 운용되면서 엘빈과 데르킨, 앨리스의 전투능력을 감안했을 때, 이 보육원에 허튼 짓을 하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 여자와 둘이서만 가는 건가?”
“아니. 이번에는 에린과 에밀리아도 데려갈 예정이야.”
“에린도?”
“1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여행하면서 종종 봐줄 생각이거든.”
“그렇군.”
엘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릴리, 출발은 1주일 뒤야. 그동안 인수인계의 일환으로 엘빈과 두 사람에게 전달해두고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을 알려줘.”
릴리의 빈자리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으로 보육원의 청소와 빨래, 식사준비를 비롯한 관리에 능한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청소나 빨래의 경우에는 엘빈과 데르킨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요리는 두 사람에게도 미묘하다.
달의 마을에서는 앨리스가 주로 요리를 담당했을 테지만, 불편한 눈으로 대량의 식사를 혼자서 하루 세끼 씩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다.
“흐음, 실제로 이쪽의 일을 종사하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도 괜찮겠네.”
“그런…그냥 제가 있으면 되는데….”
자신의 부재로 괜한 지출을 늘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릴리는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은현은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 애초부터 릴리, 혼자에게만 너무 맡겨둔 감도 없지 않아 있었어. 이참에 제대로 된 사람을 고용하자. 앨리스.”
“네.”
“너를 이 보육원의 두 번째 책임자로 임명할게. 맡아줄 수 있겠어?”
“물론이죠.”
데르킨과 엘빈의 경우에는 주로 모험가의 일로 자리를 비울 때도 자주 있다.
항상 보육원에서 체류하는 그녀를 책임자로 세워두고, 고용인들의 관리를 일임하는 체계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럼 둘에게도 부탁할게.”
“물론입니다.”
“알았다.”
앨리스에 이어, 데르킨과 엘빈의 의사도 확인한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 일이 남았어?”
“아…네. 아이들이 저녁을 모두 먹고 정리하면, 곧바로 저택으로 향할 예정이었어요.”
릴리의 주된 일은 이곳 보육원과 던전 주택의 관리.
두 장소를 동시에 번갈아 오가며 양쪽을 관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최근에는 일리아나에게서 마력의 활용방법도 배우고있다고 하니, 인간으로써는 굉장히 살인적인 스케쥴임에도, 릴리는 그 스케쥴을 단 한 점의 불만도 없이 소화해내고 있었다.
“정리는 내가 할 테니, 너는 그만 들어가라.”
“아….”
데르킨과 앨리스와 같이 이 숙소의 빈방을 사용하고 있는 엘빈의 호의에 릴리는 당황했다.
“고, 고마워. 엘빈.”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빈의 대응을 보고, 릴리는 두 부부를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 부부의 반응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릴리와 은현은 보육원을 나왔다.
“엘빈과는 말을 텄구나.”
“엘빈하고는…닮은 점이 있으니까요. 주인님께 도움을 받았던 것도, 똑같은 서약으로 맺어진 것도요.”
“그렇네.”
게다가 신기하게도 아이들을 잘 돌보는 성격까지 그렇다.
좀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릴리와 엘빈은 걸어온 길이 비슷한 점이 다수 존재했다.
“감사해요. 주인님. 저에게…어머니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내가 제안하기는 했지만, 한가지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아.”
“준비요?”
“노예로 팔려간 여성의 앞날이 어땠을지, 각오해둬.”
“아….”
릴리는 작게 몸을 떨었다.
자신 또한 몇 년 동안 노예로서의 인생을 경험해보아서, 은현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절대로 평탄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심지어는 그 생사조차도 미리 최악의 결말을 염두해두라는 경고이자 충고이기도 했다.
“주인님은…상냥하시면서도 잔인하세요.”
“미안해.하지만…이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릴리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은현은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며, 어머니의 행방을 찾아주는 것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설사 그 행방과 결말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할지라도.
은현은 릴리가 어머니의 행방을 찾으면서 마음속에 생긴 하나의 응어리가 끝을 맺기를 바랐다.
상냥하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나아가길 바라는 잔인한 호의였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늦춰, 자신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릴리와 나란히 걷도록 위치를 조정한 은현이 릴리의 손을 맞잡았다.
“적어도…어머니의행방을 찾았을 때, 네 곁에 있어 줄게.”
떨림이 진정되지 않는 릴리의 손이 은현의 손을 꽉 움켜쥐며 떨림을 억지로 멈추려고 애를 썼다.
“네….”
푹 숙인 고개 위로, 한줄기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애써 고개를 돌려 못 본 척을 했다.
이후 손을 맞잡고 던전 주택 안으로 들어온 은현은 맞잡은 손을 풀고 릴리를 놓아주었다.
“그럼 저는 곧바로 일을 하러 가볼게요.”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드로서 할 일을 하러 간 릴리를 뒤로 하고, 은현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에게는 이미 말을 해둔 상태.
일리아나는 새로운 마법의 연구로 당분간 지하의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엘레노아의 경우에는 공작령에 새로 건축되고 있는 ‘신전의 관리 및 중개’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작년에 있었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던 아니에스의 요구와도 이어진 일이었다.
주례를 맡아 줄 테니, 자신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신전 안에만들라는 요구 조건을 알렉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동생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었고, 그 여동생의 선배격이나 다름없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이유가 없다.
게다가 에레니아신성국에서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아니에스가 자주 찾는 곳이라는 것만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요소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수도에 있는 베스타 신전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기에 주교의 직함을 가진 고위 성직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약소한 규모의 신전을 운영하고 있던 상위 사제와 공작 가문 사이의 중개로서는 엘레노아 만큼의 적임자도 없었다.
때문에 현재 마법의 연구와 신전과 공작 가문의 중개로, 매우 바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이번 여행에 은현을 따라나설 수 없었다.
“뭐, 일리아나의 경우에는 구태여 바깥에 나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실비아의 성묘 겸, 신혼여행이라는 명목이 아니었으면 지난 여행도절대로 따라오지 않았으리라.
은현은 발걸음을 옮겨 에린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전달하기 위해 소녀의 방을 찾았다.
에린의 방문 앞에 도착하고, 노크를 하려던 순간.
-하아…. 현아아….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신음에, 노크를 하려던 은현의 손이 멈췄다.
“…뭐?”
자기가 지금 잘못 들은것은 아닌지, 환청이라 생각했던 은현은 전신을 경직시킨 상태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앙! 그렇게 만지면…! 안 돼애!
헐떡이면서 높아진 소녀의 교성은 방문 너머 은현의 귓가를 때리는데 충분한 음량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베르단디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은현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 실수다.’
주택을 건설하면서, 당시 연인이었던 일리아나와의 관계를 신경 써서 자신의 방안에만 방음설비를 설치했고, 다른 방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다른 방도 소홀히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러한 사태를 상정하지 못하고 방음을 신경 쓰지 못한 것은 자신의 실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현아아….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애타게 찾고 있는 소녀의 목소리는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에린이 나를?’
직면한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결론을 지어야 할지, 은현은 한참을 고민했다.
일리아나는 지하 공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고, 엘레노아는 신전의 일로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
집안에 혼자만 남게 된 에린은 은현과 릴리가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깨달았다면 아무리 자신의 방안이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무방비하고 큰 교성을 흘릴 리가 없다.
“후우우….”
작게 심호흡을 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을필사적으로 진정시킨 은현은 애써 찾은 평정을 유지했다.
못 들은 척, 못 본척의 연기를 이어나가며 에린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에린, 나야. 들어가도 될까?”
-히익!?
방문 너머로 에린이 무슨 반응을 하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갔던 은현은 조용히 에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뭔가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니까. 복잡하네.’
[무엇이 복잡하다는 것이냐?]
‘방안에서 혼자 지금의 에린과 똑같은 걸 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어머니한테 들켰는데.’
동영상이 틀어져 있는 컴퓨터를 끄고 황급히 팬티와 바지를 올려 입으면서 아무것도 안 한 척을 했던 10대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무런 말 없이 담담하게 빨래 더미들을 가지고 나가는 어머니의 반응을 보고, 10대 시절의 은현은 자신의 자기 위로가 전혀 들키지 않았다고 안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커서 알고 보니, 어머니는 그냥 알고도 모른 척을 해주셨던 거더라고요.’
아니, 모를 수가 없다.
[…….]
굉장히 한심하게 쳐다보는 베르단디의 표정에 은현은 멋쩍음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의 10대 시절의 은현이 했던 행동을, 지금의 에린이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를 떠올리면서, 그걸 하고 있었다는 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