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298. 릴리의 결심(1)
몰락한 귀족들의 비자금을 남김없이 탈탈 털어온 은현은 그 막대한 양을 정확히 세 등분으로 나눴다.
첫 번째는 지난번처럼 은밀히 왕궁에 잠입하여 디아네 왕비에게 전달했다.
에린의 처벌 여부를 눈감아주고, 은현이 만들어둔 판에서 비리 귀족들을 옹호하지 않고, 모조리 뿌리를 뽑아버리는 강경한 대응을 한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은현의 성의였다.
본래 왕가로 환수되어야 할 비자금을 마치 자신이 기부하는 것 인양 전달하는 은현의 태도가 매우 아니꼬웠지만.
왕비의 입장에서는 부족한 예산으로 국정의 운영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돈이었기에 아쉬운 소리를 할 입장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공작령의 영지 운영에 보태는데 사용을 하라고 전달을 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은현의 개인 재산으로, 흑랑단이나 보육원에 필요한 운영비를 충당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달달한 돈맛을 본 이후, 현재 은현은 혼자서 보육원을 찾아왔다.
“아하하! 오빠! 재밌어요!”
“…….”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하프 엘프 소녀가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녀린 소녀의 몸을 목마를 태우고 묵묵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인공 정령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은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유롭게 살라고는 했지만, 완전히 애 보는 거에 푹 빠졌군.”
그것이 자의로 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프 엘프 소녀인 에리스의 생떼인지 구분까지는 가지 않는다.
‘에린은 자기 오빠의 저런 모습을 알고 있을까?’
보육원의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엘빈은 이제 에린의 오빠보다는 많은 아이들의 형과 오빠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아이들은 엘빈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엘빈에게 마음을 열게 된 계기는 그들과 또래이거나 연상인 에리스가 엘빈에게 응석을 부리면서 놀아주던 모습에 흥미를 품은 것이다.
조영술을 이용해 그림자로 귀여운 토끼나 참새를 만들어 놀아준 것을 시작으로, 특히나 위용이 넘치는 사자 같은 멋진 맹수를 만들어 선보였던 것에는 남자아이들이 열광하기까지 했다.
“…….”
“앗! 엘빈 오빠? 왜 멈추는 거예요?”
보육원으로 들어선 은현을 발견한 엘빈이 움직임을 딱딱하게 굳혔다.
“손님이 왔군.”
“손님이요? 아!”
엘빈의 말에 그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에리스가 그와 마찬가지로 은현을 발견하고 작게 경탄했다.
“아저씨다!”
“그래. 아저씨야.”
새삼 아저씨라고 불렸던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기묘한 기분이 들었던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어?”
“네!”
안부를 묻는 은현의 말에 기운차게 대답하는 하프 엘프 소녀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엘프의 특징인 기다랗고 가느다란 귀가 폴리모프로 감춰진 에리스는 데르킨의 밝은 금발을 빼면 어머니인 앨리스의 외모를 똑 닮았다.
“엄마를 보러 오신 거예요?”
“응. 겸사겸사.”
본래의 용무는 릴리에게 있었지만, 두 번째 용무는 앨리스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함이다.
“릴리와 두 부부는 보육원 안이야?”
“그렇지.”
은현은 고개를 주억이며 엘빈과 에리스와 함께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애 보기도 완전히 익숙해졌네.”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으니까.”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밑에서 홀로 에린을 돌봐야 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일까, 엘빈은 생각보다 보육원의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지금의 엘빈은 가끔 놀러 오는 에린과 함께 보육원에서 인기인이나 다름없는 남매다.
심지어 에린의 경우에는 굉장히 능숙하게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돌보는 엘빈의 면모를 처음 보았기 때문일까, 안도하면서도 놀란 눈치였다.
특히 엘빈을 잘 따르고 있는 하프 엘프 소녀를 보았을 때는 왠지 모르게 외로운 감각까지 느끼기도 했다.
-내 오빠인데….
맨날 싸우며 다투기만 했던 남매였지만, 내심 서운한 면이 없지 않았던 감정을 자신보다 어린 소녀에게 푸는 것도 이상하다며 그 감정을 얼버무렸던 일화도 있었다.
“몸의 상태는 어때?”
“나쁘지 않아. 가끔가다 데르킨님을 따라 모험가의 일도 하고 있다.”
데르킨과 엘빈은 자신들의 적성과 특기를 살려 모험가 일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공작 가문에서 받는 지원금 이외에, 운용할 수 있게 된 보육원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다.
딱히 큰 소유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부부와 엘빈은 보육원에 몸을 의탁하면서 금전적인 지원을 흔쾌히 수락했다.
은현이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난 너희 둘이 그렇게 함께 모험가 듀오를 결성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질 줄은 몰랐는데.”
“사이는…잘 모르겠군.”
“뭐?”
엘빈은 은현의 말을 부정하며 복잡한 얼굴을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은 은현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데르킨님은 나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보고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험가의 일을 할 동안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알려주시지.”
엘빈은 최근 사이에 데르킨에게서 다양한 것을 배웠다고 한다.
기초적인 체술부터 단검술과 검술, 심지어 궁술까지.
기척을 감지하는 법부터, 자신의 기척을 제거하는 방법을 비롯해 수색의 기초까지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본래는 배우지 않으려 했으나, 그런 엘빈에게 날아온 것은 데르킨의 호통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엘븐가드에 들어올 수 있겠냐고 하시면서. …나는 그곳에 들어가겠다는 말은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엘프의 마을에 또 한 번 방문하게 될 날이 올지도 알 수 없다.
어째서 데르킨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지 못 해서 안달이 난 것일까.
“데르킨님의 생각을 모르겠다.”
엘빈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엘빈의 이야기를 들은 은현도 얼굴을 굳히고 침묵을 고수했다.
“…….”
그러면서 시선은 엘빈과 그의 목에 목마를 태우고 있는 어린 하프 엘프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탐탁지 않게 여긴다기보다…이건 완전….’
자신의 후계를 키우고 있는 것 같다.
[에휴…. 이곳에도 아이만큼이나 한심한 아이가….]
‘아니, 베르단디님. 말씀이 너무….’
신랄한 베르단디의 비판에, 은현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그것을 굳이 표현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의 머릿속으로 맴도는 생각을 읽은 베르단디가 곱게 눈을 흘기며 은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주인님.”
건물 내부로 들어가, 테이블에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하던 릴리가 은현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데르킨과 앨리스는?”
“앨리스님의 목욕을 도와드리고 계세요.”
일상생활에서 크게 지장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전쟁의 상처로 눈이 불편한 앨리스를 돕는 것은 언제나 남편인 데르킨의 몫이었으며, 데르킨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전혀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 욕실 안에서 목욕 이외에, 부부의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둘도 오고 나면, 네 명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네. 알겠습니다.”
“알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릴리가 그릇에 담아주는 스프들을 착착 옮기며 기다란 테이블들 위에 진열하는 엘빈의 모습은, 이제는 완전히 보육원의 관리자다.
과정이나 계기, 종족은 전혀 틀리지만 서약을 통해 자신의 부하가 된 두 사람의 일상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구나.]
‘솔직히 그래요.’
깜깜한 앞날의 미래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생명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밝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은현의 가슴을 조금씩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들로 가득 채워나갔다.
그것이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모두 아이가 노력해서 이루어낸 결과다.]
‘베르단디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셨다면,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길이죠.’
[그리 말해준다면 나도 기쁘구나.]
노예 생활 속에서, 또는 고아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해 깡마른 몸들에는 어느새 살집이 붙고 없다시피한 근력들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한창 성장해야 할 때인 소년들의 신장의 변화는 가끔 보육원을 찾아올 때마다 커지고 있다.
“이제 조만간 일도 시킬 수 있겠네.”
“일인가요?”
“언제까지고 보육원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일을 배워서 제대로 자립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줄 뿐이야. 평생 저 아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육원은 환경이 어려운 어린아이들이 제대로 자립할 수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을 장소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가능하면 공작령의 어딘가에 취직해서, 알맞은 노동을 하고, 영지의 경제에 기여를 하면서 이 사회에 녹아 들어갔으면 좋겠어. 내 생각은 그래. 이곳은 많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지만, 저 아이들의 인생을 끝까지 부양해야만 하는 장소가 아니야.”
“…그렇죠.”
릴리는 은현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행히도 공작령은 지금 일이 꽤 활발해. 직업을 구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지. 농업이나 상업 쪽에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시킬 사람도 필요할 것 같네.”
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글을 읽고 쓰는 것과 계산을 배워서 공작 가문의 가신으로 일할 수 있는 인재가 나타날 수도 있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주인님은 대단하세요….”
“널 맡으면서 함께 책임지기로 한 아이들이야. 이제 저 아이들의 부모는 너이기도 하니까. 애들의 앞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봐.”
“네….”
릴리는 살짝 감동에 젖은 얼굴로 은현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님?”
이윽고 목욕을 마치고 식당으로 들어오는 두 부부가 은현을 발견하고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군요.”
“응.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네.”
“…….”
“하, 하하….”
얼굴을 붉히는 앨리스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데르킨의 반응을 보면 욕실 안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엘빈 오빠. 목욕이 그렇게 즐거운 시간인가요?”
“…너는 몰라도 된다.”
엘빈의 옆에서 착 달라붙어서 스프를 떠먹고 있던 에리스가 궁금하다는 듯 엘빈에게 물었지만, 엘빈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바로 진찰을 시작하자. 이후에 할 이야기도 있고. 데르킨, 앨리스를 방안의 위에 앉혀주겠어?”
“알겠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진찰을 할 수도 없었기에, 은현은 두 부부와 딸이 사용하고 있는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앉은 앨리스가 안대를 풀고, 그녀의 눈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에스에 의해서 두 눈을 복구는 시켰지만, 오염된 마나로 인해 손상된 시신경까지 완전히 복구시키지 못한 앨리스의 동공은 그 어떤 자극에도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앨리스, 치료를 시작하려면, 이 두 눈을 뽑아야 해. 물론 마취로 고통은 최대한 억제하긴 하겠지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잠시 말을 끊었던 앨리스는 살벌한 치료 과정의 일부를 듣고 몸을 살짝 떨었다.
하지만 결심을 굳히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은현님을 믿고 따라왔는걸요. 최대한…아프지 않게만 해주시면 참아볼게요.”
“데르킨은?”
“믿겠습니다. 저도…아내가 다시 두 눈으로 에리스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알았어. 나중에 아니에스에게도 부탁해서 일정을 잡아볼게. 그리고…오늘 보육원을 찾아온 건 치료 전에 눈의 상태를 진찰하려던 것도 있지만, 앨리스와 데르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야.”
“부탁인가요?”
똑똑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릴리가 문을 열고 두 부부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릴리의 등장은 매우 타이밍이 좋았다.
“릴리.”
“네?”
“나랑 가야 할 곳이 있어.”
“가야 할 곳이요?”
“네 어머니의 행방.”
“아…!”
릴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은현의 말에 몸을 작게 떨었다.
“네 어머니의 행방. 찾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