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257. 과거의 응어리(5)
“아…! 피곤해!”
“어…?”
왕국 원정대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왕녀의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군용 간이침대 위에 몸을 던지는 유리아의 행동에 에린이 당황했다.
“…왕녀님.”
“아, 왜! 이제 아무도 없잖아!”
막사 안에 들어서자마자 명백히 유리아의 태도가 180도 바뀌어 버리자, 뒤따라 들어온 그녀의 호위 역할을 맡고 있던 여기사가 잔소리를 했다.
유리아는 몇 번이고 들었던 여기사의 잔소리에 인상을찡그리며 외쳤지만, 여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에린을 바라보았다.
“아직 저 아이가있지 않습니까.”
“저 아이는 괜찮아. 스승님과 그 남자 쪽의 사람이니까.”
유리아가 언급한 ‘스승님’과 ‘그 남자’는 일리아나와 은현을 의미했다.
“…그분들인가요.”
“으….”
여기사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에린을 쳐다보자, 그녀의 관찰을 하는 듯한 시선에 에린이 살짝 부담을 느끼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 깔았다.
“세리아. 곧바로 식사 준비 좀 해 달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세리아라고 불린 여기사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사를 나갔다.
막사 안에 에린과 유리아,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니?”
눈치를 조금씩 보며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에린의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유리아가 물었다.
“아, 저 그게…. 왕녀님의 인상이 뭔가…처음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져서요….”
처음 은현의 집에서 유리아와 안면을 트고, 함께 원정을 나가며 은현에게서 훈련을 받았을 때의 유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까 전 모험가들과 기사들 앞에서 보여준 모습과 주위에 아무도 없고 에린만이 있는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에린에게 큰 괴리감을 안겨주었다.
마치 필사적으로 쓰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가면을 벗어던진 모습에 가깝다.
“하아…. 그거야 대외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모습이 있으니까.”
“보여줘야 하는 모습….”
유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나는 왕녀이기도 하니까…백성들 앞에서는 그렇다쳐도, 특히나 다른 귀족들 앞에서는 절대로 우습게 보이면 안 되잖아.”
그래서 항상 가면을 쓰고 행동하게 된다.
“오히려 너나 스승님 쪽, 아니면…그 남자를 대하고 있을 때가 마음이 편해.”
은현이나 일리아나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왕녀로서의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왕녀로서의 위엄과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그 부부는 유리아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관계 중하나다.
하지만 에린은 그런 유리아의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서, 설마….”
“응?”
“왕녀님 혹시 현이를…?”
“…너 지금 혼자서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거니?”
설마 ‘자신이 은현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멋대로 자신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펼치고 있는 소녀를 왕족 모독으로 죄를 물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유리아는 기분이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남자를? 하, 그런 끔찍한 상상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 아니, 상상도 하지 마.”
“어, 어…? 그렇게 싫으세요?”
노골적으로 격한 반응을 드러내자 도리어 에린이 당황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마음을 품고 있는 남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소녀의 마음은 굉장히 복잡하다.
“현이…굉장히 좋은 사람인데….”
자신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남자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유리아의 반응에 에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야. 단지….”
“단지요?”
“도저히 이성으로 볼 수 없어.”
유리아와 은현의 관계는 바깥으로 발설할 수 없는 요소들로 가득한 복잡한 관계다.
그 사이에는 연정을비롯해서 우정이나, 깊은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지구’라는 같은 출신의 공통점을 비밀로 공유하고 있는 협력자라는 관계가 더 어울렸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 제각각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니?”
“으, 으음…네.”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린은 적어도 유리아가 은현에게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확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왕녀님께서는 어째서 이곳에 계셨던 건가요?”
“응? 아, 우리야 모그라프령 쪽에서 왕가에 직접 지원 요청을 보내왔으니까. 페르닌에서도 군대를 파견해서 모그라프령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거든.”
모그라프의 철벽이 뚫려버린다면 인근의 마을들의 피해를 시작으로 페르니아스 왕국에 퍼지는 피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왕가 쪽에서 군대를 파견해 모그라프령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다.
“하지만 이 싸움에 왕녀님이 직접 나서실 필요는….”
“내가 움직여야, 더 많은 규모를 편성하여 파견을 보낼 수 있으니까.”
실제로 유리아가 지원 출정에 참가 의사를 밝히고 나서, 모그라프령에 지원을 보내는 군대의 규모는 약 1.5배 가까이 늘어났다.
“덤으로 나를 호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크라시르의 기사단원들까지 빼내 올 수 있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보내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어.”
“아….”
“게다가 이번 원정으로 나도 공훈을 좀 쌓고, 어린 남동생의 왕세자 책봉에 도움을 좀 주고 싶었으니까. 뭐, 정략결혼을 하기 싫어서 내 가치를 좀 올려두려는 속셈도 있고 말이지. 여러모로 피곤하네. 하아….”
“굉장히 피곤해 보이시네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어 억지로 피는 유리아의 얼굴에는 피로로 찌든 짜증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왕녀라서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아, 아르티아 기사단도 함께 출정했는데, 올리비온 후작님께 인사 드리고 갈래?”
“후작님의 아르티아가요?”
생각해보니, 마수의 토벌 원정에 아르티아가 끼지 않을 리가 없다.
에린은 순간 리오드나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아르티아의 기사들, 그리고 에이라까지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다들 바쁘실 텐데요. 페르닌에서 찾아뵈었다면 모를까,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찾아 뵈어서 휴식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흐음? 그래. 네가 그렇다면 뭐.”
유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대화를 마쳤을 즈음, 막사로 들어온 세리아를 뒤따라 온 병사들이 테이블 위에 스프와 빵들을 올려두고 왕녀에게 인사를 마치며 막사를 나갔다.
“먹어.”
“아…네. 잘 먹겠습니다.”
“이번엔 또 뭐니?”
다시 한번 에린이 신기한 표정을 짓자, 유리아가 물었다.
“아, 그게….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
“그, 보, 볼품없다 거나그런 뜻이 아니라! 왕족의 식사니까, 분명 휘황찬란한 많은 메뉴들이 테이블 위를 꽉 채울 거라고 상상했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단조로워서….”
에린의 말을 알아들은 유리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궁정에서나 차릴 수 있는 식탁이지, 취사 시설도 열악한 이런 야전에서 그런요리들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 장거리의 원정에서는 그냥 식량의 낭비일 뿐이잖아. 게다가 나는 식사를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이 아니야.”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래도 왕족분들의 원정은 뭔가 다를 줄 알았던 터라….”
일반적인 모험가와 별 차이가 없는 간소화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에린, 슬슬 본론으로 이야기를 꺼낼게.”
“네?”
스프에 빵을적셔 입안으로 넣던 에린이 유리아의 말에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크라시르에입단해볼 생각 있어?”
“콜록! 콜록!”
느닷없는 왕녀의 제안에, 목구멍으로 넘겼던 빵을 도로 뱉어낼 뻔했던 에린이 사레가 들려 기침을 토해냈다.
황급히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던 에린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잘못 들은 것도 아니며 그녀의 얼굴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 하지만 저는….”
“신분도, 입단시험도 걱정하지 마. 내가 곧바로 통과시켜줄 테니까.”
“아뇨. 그건 완전 월권 행위인 게…?”
“월권 행위가 뭐 어때서. 이미 다른 귀족들도 다 써먹고 있는 수법인데. 에린, 한 가지 묻겠는데. 방금, 네가 때려눕힌 기사들이 정말로 정당한 실력과 성적으로 왕가를 수호하는 최고의 기사단에 입단했다고 생각하니?”
“아뇨. 그건 아닌데요.”
빌라드 일행을 제압하고 처음 에린이 품었던 감상은 ‘겨우 이정도?’라는 생각이었다.
매일 은현에게서 고된훈련을 받고 아르미타스의 기사들과 대련을 통해서 경험을 쌓았던 에린은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를 과시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은현과 빌라드 일행의 신입기사들을 비교하는 것은 전설속에나 나오는 드래곤과 고블린을 늘어놓고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버렸기에, ‘이 나라 정말로 괜찮나?’ 싶은 생각이 들정도.
“후후.”
에린의 즉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유리아의 옆에 서 있던 그녀의 호위기사, 세리아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작게 웃었다.
유리아도 에린의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맞아. 다 부모의 연줄, 가문의 인맥, 권력으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지. 입단 시험이라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지금은 이 나라의 정치판만큼이나 기사단의 내부 사정도 개판이지.”
내부는 썩어들어가면서도, 겉으로 보이는 ‘크라시르의 기사단원’이라는 칭호, 명예에 집착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고 자신의 능력이 올라가는 것도 아님에도, 그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몇 안 되는 수단이기때문이다.
“정말…차라리 올리비온 후작께서 왕국의 정치에 개입을 적극적으로 해주셨으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테지만…아 이것도 현 왕비와 후작 사이의 응어리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한가….”
작게 중얼거리며, 에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던 유리아가 이내 다시 에린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나는 네가 크라시르에 들어와서 내 전속으로 나를 호위해줬으면 좋겠어. 생각해봐. 왕녀라는 커다란 뒷배가 생기는 거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만한 실력이….”
“겸손한 거니? 아니면 네 가치를 모르고 있는 거니?”
“네?”
“흐음…. 모르는 쪽인가? 세리아,네 생각은 어때?”
침묵을 지키며 대화를 듣고 있던 세리아가 유리아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신입기사 셋을 제압한 것 만으로는 정확한 평가는어렵지만, 적어도 단원들 내부에서 중간 이상까지는 치고 올라갈 수준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최소한 이번에 입단한 그 신입기사들보다는 월등히 좋은 실력이죠.”
“어…가, 감사합니다.”
세리아의 칭찬을 들은 에린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가 기사단에 입단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아마 단장은 받아들이지 않겠죠.”
“아…그 양반, 역시 그렇겠지? 진짜로 짜증나네.”
크라시르의 단장인 월터는 유리아의 어머니인 헬레나 후비 쪽이 아닌, 디아네 왕비 쪽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은현에 대한 사소한 악연으로 엮여있는그가 은현의 제자인 에린을 기사단 내부에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저어…. 죄송하지만, 왕녀님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흐응? 이유를 물어봐도될까?”
“그게…. 저는 지금 따로 목표가 있거든요.”
“…네 오빠의 명예와 반납했던 귀족의 작위를 도로 찾는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오빠의 문제는…조금씩 희망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 만큼이나 더 간절한 소원이 하나 생겼거든요.”
“흐응. 소원?”
“네.”
굳게 결심한 소녀의 얼굴을 보고, 유리아가 흥미를 띄운 기색으로 물었다.
“왕국 최고의 기사단원이 되는 명예를 거머쥐고, 나의 조력으로도 이루어 줄 수 없는 소원이라는 거니?”
“…네.”
에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섬겨야 하는 기사가 된다면…제가 섬기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