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256. 과거의 응어리(4)
상황이 한없이 에린,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맞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 꽁꽁 싸매두고 있던 응어리가 조금 풀어진 것을 자각했다.
지금이 순간, 자신은 틀림없이 성장했노라,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힘든 훈련을 받아왔던 나날들이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헤.”
“…웃어?”
에린의 내면의 만족을 전혀 알 리가 없는 크라시르의 고위기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하들 셋을 사정없이 때려눕혀 놓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미친 소녀처럼 보였다.
‘저 소녀는 분명….’
눈앞의 소녀를 보고 있는 고위기사, 델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1년 전보다 더 발육이 진행되어 성인이나 다름없는 육체미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의 색깔이나 얼굴형은 분명히 기억에 있는 소녀였다.
‘그때 페르닌 습격 사건에서 은발의 남자와 함께 감옥에 수감 되었던, 그 소녀?’
가장 처음 페르닌의 귀족들을 습격했다는 용의자로 몰리면서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이후 직접 악마와의 교전을 통해서 악마들을 소멸시킨업적을 남겼던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델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네? 아…그렇죠.”
정신을 차리라고, 다급하게 어깨를 툭 치는 지스의 행동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린이 맞은편의 크라시르의 기사들을 응시했다.
“…방법이 있는 거유?”
일단 사전에 부탁한 대로 에린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지스는 겨우 그것으로 크라시르의 단원들이 얌전히 물러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은 페르니아스 왕가를 수호하는 기사단.
그런 만큼, 왕국 내에서 신입 단원들을 선발할 때는 그만큼의실력과 명성을 비롯한 다양한 요건들을 따지고 가장 우수한 최상위 성적을 낸 기사를 선발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관례이다.
바닥에 쓰러진 세 명과 겁을 뽑아 들고 에린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는 빌라드의 외모나 실력 수준을 보면 이제 막 신입단원으로 뽑힌 기사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부족한 신입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왕국 안에서 가장 명예로운 기사단의 단원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사실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나라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왕족을 수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는 기사들이 무기도 아닌 맨손으로 단 한 명의 소녀에게 패배를 했다는 사실은 기사단은 물론, 왕가에도 먹칠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
‘제발, 제발 그냥 넘어가라….’
지스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문제가 더욱 커지지 않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에린을 가는 눈으로 노려보는 델른의 매서운 시선에 상황은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꼬르륵
만족감과 함께 싸움이 끝나고 전투태세가 풀어지자, 곧바로 소녀의 뱃속에서 공복의 신호가 울렸다.
“배고파….”
가장 처음들은 소녀의 말이 자신의공복 상태였다는 것에, 델른은 이내 인상을 찡그리고 어색한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네? 아, 아뇨. 아, 저 맞아요. 제가 혼자 그랬어요.”
“…….”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있는 에린의 모습에 델른은 할 말을 잃었다.
“당장 저 소녀를 포박해라.”
“전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요.”
델른의 명령을 이행하려던 크라시르의 기사단원들이 에린의 말을 듣고 행동을 멈칫했다.
기사들 셋을 때려눕혔다고 담담하게 인정해놓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방금 네 스스로 우리 단원들을 저 꼴로 만들어놨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랬죠. 하지만 저는 제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째서지?”
“그야 저 사람들이 제 밥을 저 꼴로 만들었는걸요.”
에린이 자신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델른의 질문에 답했다.
바닥에 엎질러진 스프와 그릇을 보고, 자신이 생각한 그 이유가 맞나 스스로 되물었을 정도로 하찮은 이유.
“…….”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델른 대신, 한 기사가 분개하며 에린을 향해 소리쳤다.
“감히 그딴 이유로…!”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오늘 밤에 자신들에게 아양을 떨면 저 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식사를 챙겨준다고 저를 모욕까지 했죠.”
“……!”
역정을 내려던 한 기사가 이어서 주장하는 에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내 진위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빌라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것을 느낀 빌라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에린의 주장을 부정했다.
“거, 거짓말입니다! 저희는 그런 적이…!”
“이봐! 거짓말하면 못쓰지!”
“왕국의 기사님이 그러면 쓰나!”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근처의 몇몇 모험가들이 황급히 에린의 주장을 부정하려던 빌라드의 말을 끊고 낄낄거리며 그를 조롱했다.
“어이! 기사 나으리! 저 아가씨 말이 사실인데? 저기, 저 뒤에서 숨어있는 마법사가 바람 마법을 이용해서 돌풍을 일으켰고, 아가씨를 위협했다고!”
“크윽!?”
한 모험가가 손가락으로 빌라드와 함께 있던 마법사를 가리키자, 마법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소속은 궁정마법사단의 소속이지만, 빌라드의 집안인 백작 가문의 원조를 받고있는 하위 귀족의 자제였기 때문에 빌라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늘 있는 도련님의 못된 장난의 연장선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마법사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음에 잔뜩 당황한 상태였다.
과거의 아이테르에서 보여주었던 소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에린이고정관념으로 박혀있던 것이 원인으로, 지금의 에린의 수준을 가늠하지 못했던 안일한 판단으로 벌어진 결과다.
“저 기사도 인성이 완전 개차반이더구만!”
“하나도 아니고, 그것도 여러 명인데, 왕국의 기사들은 모두 개차반 인성 순으로 뽑는 건가?”
“오! 일리가 있구만 그래!”
낄낄거리며 이 상황을 관람하며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던 모험가들의 조롱을 직접 받게 된 크라시르 기사들은 생전 받아 볼 수 있는 평생의 모욕들을 다 받아본 것인 양, 하나같이 주먹을 꽉 쥐며 떨었다.
“감히 명예로운 크라시르 단원들을 모욕하다니!”
스르릉!
각자의 기사들이 분개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모험가들을 노려보기 시작하자, 그들을 조롱하며 웃고 있던 모험가들의 분위기도 점차 험악해져 갔다.
“아앙? 해보자는 건가?”
“좋지!”
숫자는 비등비등했지만, 현재 모여있는 모험가들의 수준은 에린을 포함한 은위계의 모험가들이 다수였으며, 전투의 최정예 요원이었던 크라시르 기사들과 무력을 비교해보자면, 모험가 쪽이 당연히 열세였다.
하지만 모험가들이 분위기에 취해 잔뜩 객기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한 차례 크라시르의 신입 기사들 셋이 에린 하나에 처참하게 깨졌던 것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것들 별거 아닌 게 아닐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싹을 트기 시작하며 모험가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게다가 에린이라는 소녀는 이미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모험가 길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며 인기인이기도 했다.
지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험가들이 에린을 옹호하며 들고 일어나주는 것에는 그녀가 모험가 길드에서 꾸준히 보여주었던 성실한 모습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감히 한낱 모험가들 주제에…!”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맞먹으려는 태도를 당당하게 보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 당황스러운 것은 에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아저씨들….”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 살벌해진 분위기가 점차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모험가와 기사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당장이라도 무기를 빼들며 언제라도 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이 상황은 다름 아닌 에린, 자신이 원흉이다.
‘어, 어쩌지…?’
에린은 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될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가슴 속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급격하게 치밀어오른 짜증과 스트레스가 기폭제가 되어 터져 나온 것이 원인.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에린은 이미 빌라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마음속에 쌓여있었던 과거의 응어리는 조금이나마 해소되어 약간의 후련함을 느꼈지만, 눈앞의 모험가들과 크라시르의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두 번째 싸움을 벌이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자, 잠시만요! 이건 제 문제니까, 아저씨들이 나설 이유는…!”
“멈추세요!”
에린이 무기를 들고 일어서며 감정적으로 대응하려는 모험가를 말리듯이, 기사들에게 명령을 강제하는 고운 목소리의 외침에 기사들의 행동이 일제히 정지했다.
그 목소리에 에린과 모험가들, 기사들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일제히 돌려졌다.
시중 겸,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두 명 기사를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은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사들의 행동만 봐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에린도 의도치 않은 우연을 통해서 몇 번 인가, 본 적이 있는 여성이기도 했다.
‘…저분이 왜 여기에?’
“와, 왕녀 전하!”
갑작스럽게 이 상황에 난입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제지시킨 ‘유리아 페르니아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당황했다.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은 사실상, 마수의 토벌 원정에 적합한 기사단이 아니다.
그들의 역할은 왕족을 수호하고 보필하는 것.
그런데 그 왕족의 일원인 유리아가 이번 토벌 원정에 참가했다면, 왕족인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크라시르 기사단이 움직인 것은 당연한이치다.
하지만 왕족인 그녀가 어째서 유리아가 직접 마수의 토벌 원정에 참여하는 선택을 했을까.
에린은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윽고 유리아의 입이 열렸다.
“물러나세요.”
“…예?”
“물러나시라고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델른이유리아에게 되물었지만, 유리아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신입 단원이라지만, 왕국의 기사단원이 처참하게 깨졌는데도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리는 유리아의 말에 델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와, 왕녀님! 하지만 저 소녀는 저희 단원들 셋을 저 꼴로 만든…!”
“정황을 들어보니, 먼저 싸움을 건 것은 기사단 쪽이라고 하던데요.”
“그, 그것은….”
“그리고 나를 호위해야 하는 기사들의 수준이 겨우 저 정도라니, 부끄럽지도 않나요?”
“크으…!”
아무리 다른 이유를 갖다 붙여도, 기사 셋이 소녀 한 명에게 처참하게 깨진 것은 추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뽑아 들고 에린을 노려보고 있던 빌라드를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싸움에서 진 것도 모자라 맨손인 여성을 상대로 검을 뽑다니, 델른?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게…무슨 말씀이신지…?”
“문제를 일으킨 저 신입기사가 크라시르의 기사단원으로써 어울리는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하시나요?”
“…….”
델른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황을 보아 빌라드 일행이 에린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도리어 처참하게 깨져버렸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빌라드의 기사로서의 실력도, 인격도, 성품 자체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최악이라는 유리아의 지적은 자신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유리아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은 빌라드의 집안이 대대로 페르니아스 왕가를 보필해온 궁정 귀족의 일원인 고위귀족의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이 길어지고 있네요. 내 질문이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얘기였나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길어질 바에는 이렇게 서서 시간 낭비를 하지 말고 어서 주위의 기사들을 물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따로 반박을 하지 못한 델른은 침음을 삼키며 유리아의 명령을 따랐다.
“쓰러져 있는 저들은 사제들에게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조치하세요.”
“…예.”
“와, 왕녀 전하! 저 계집은 왕국의 기사인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든….”
“저거 당장 끌고 가서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려. 왕국의, 나의 수치나 다름없는 쓰레기야.”
“왕녀님, 아직 주위에 듣는 귀가 많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대각선 뒤쪽에 서 있던 여기사에게 명령을 내리자, 여기사가 유리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유리아는 듣는 척도 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데려가.”
“예….”
유리아의 명령을 받았던 여기사가 뒤로 살짝 빠지며 이동을 개시하고,크라시르 기사단원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자, 유리아는 완전히 경계태세가 풀린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저의 기사들이 모험가 여러분들에게 무례를 저질렀군요.”
“예? 아니, 뭐….”
“소란과 무례에 대해서 주의를 하도록 단단히 말해두겠으니, 여러분들께서는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싶으니까요.”
“무, 물론입니다! 허허!”
유리아는 최대한 모험가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한 말과 표정들을 섞어가며 그들을 격려했다.
직접 왕족이 자신 쪽의 무례를 일컬으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부드러운 어조로 사죄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격식을 차리는 표현에 가까웠다.
일국의 왕녀가 직접 자신들을 격려해주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까까지 살벌한 기운을 내뿜었었던 모험가들의 기분이 눈 녹듯이 풀어져 갔다.
이윽고 유리아의 시선이 에린과 마주치게 되자, 에린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은현의 중재로 한차례 미궁원정을 통해서 유리아와 안면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에린에게 있어 왕녀인 유리아의 존재는 땅과 하늘 사이의 격차만큼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 좀 내줄래?”
“네? 아…저, 그게….”
에린은 이런 자리에서 왕녀의 신분을가진 유리아의 권유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권유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크게 갈등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저녁 못 먹었지? 나와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 좀 나누지 않을래?”
“네.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