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4화 〉254. 과거의 응어리(2) (254/730)



〈 254화 〉254. 과거의 응어리(2)

 2년 만에 보는 오르바는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아이테르에서 보았던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외모는 사라지고 키도 조금 성장한 탓인지, 이제는 완전한 성인 남성의 모습.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뀐 모습이었지만, 전혀 바뀌지 않은 것도 존재했다.
거만한 태도로 남을 깔보는 눈동자, 항상 자신이 누구보다도 위에 서 있다는 우월감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엘리트 의식은 사라지기는커녕 이상할 정도로 뒤틀려 더욱 깊어져 버린 듯 한 모습이었다.
에린은 빌라드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의 일부를 읽어 들이고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 나빠.’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면서 자신에게 보내오는 적의.
게다가자신의 전신을 훑어보고 정욕의 빛을 띄우는 눈동자.
하나 같이 에린의 기분을 저기압으로 끌어내리는 역겨운 감정들 뿐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미호야?’

작게 중얼거리는 구미호의 목소리에 에린이 속으로 의아한 마음에 물었으나, 구미호는 답하지 않았다.
에린이 애슈턴의 주도 아래, 폐창고로 납치되어 강간을 당할 뻔했던 당시, 구미호는 점점 약해져 가는 에린의의식과 교대하여 소녀의 몸을 차지하고, 신수의 힘을 발현시킨 구미호의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빌라드 오르바가 보는 눈앞에서.
애슈턴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과 생기를 빨아들여 미이라에 가까운 빈사 상태를 만들었던 구미호의 능력은 마법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형(異形)의 힘이다.
구미호가 발현시킨 능력이었다지만, 엄연히 에린의 몸으로 발현시킨 능력을 눈앞에서 보고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에린을 무시하고 있는 태도는 구미호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없는 사고방식이다.

[아둔한 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무슨 말이야. 도대체?’

그때 당시, 정신을 잃었던 에린은 구미호와 빌라드 오르바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

굉장히 신경 쓰일 말 만을 늘어놓고는 침묵을 지키는 구미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에린이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재촉했지만, 구미호는 일절 답하지 않았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빌라드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왼쪽 가슴에 페르니아스 왕국의 인장이 찍혀있는 갑옷의 외양은,  번인가 본 적이 있었던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의 갑옷이다.
게다가 마법사로 보이는 고급진 로브와 방어구를 착용한 이들의 모습까지.
상황을 보아하니, 페르니아스 왕가 쪽에 들어간 모그라프 변경백의 지원요청에 응답하여, 군사들을 보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모험가들의 마차 행렬이 이곳에서 야영을 결정하게  것도 먼저 도착하여 이곳에서 쉬고 있는 왕국 군대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또한 깨닫는다.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이동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며 결정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면서, 에린은  다른 의문을 떠올렸다.

‘크라시르는 왕족들을 보호하는 기사단이었다고 들었는데…어째서 토벌 원정에?’

이런 쪽의 토벌 임무는 아르티아 쪽이 전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에린에게는 아르티아가 아닌, 크라시르라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아가씨, 아는 사이들인가?”

“그렇긴 한데요….”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에린의 뒤를 따라온 전직 사기꾼 모험가인 지스의 질문에, 에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이테르에서 쫓겨나고 어디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모험가 일을 하고 있었군.”

“쫓겨났다라….”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디아네 왕비가 하사했던 정식 작위를 거절하고 평민의 신분이 된 에린은 아이테르에 다닐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인 ‘귀족의 가계’를 만족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아이테르에 다닐 수 있는 자격 또한 잃게 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린은 스스로 그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권위를 걷어차고 평민의 길로 돌아서는 것을 선택한 것이지,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됐구나.”

어찌 되었든 크게 상관없는 정보였지만, 멋대로 와전된 자신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듣게 되니, 헛웃음이 나왔다.

“뭐가 웃기지?”

생각보다 여유가 넘치는 에린의 모습이, 학생이었을 때 타인의 시선에 잔뜩 위축되었던 과거의 모습과는 현저히 달라서, 빌라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에린은 적당히 대꾸하고는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빌라드의 동료 기사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중심에서, 아까까지 무릎을 꿇으며 핍박받고 있던 한 여성 마법사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칫했다.
 여성의 얼굴 또한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마르바?”

“읏…!”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았다는 것에, 마르바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에린의 시선을 피했다.

“음? 아아!”

에린의 시선을 피하는 마르바의 행동의 이유를 생각해보았던 빌라드가 이내 그 이유를 깨닫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다시 자리로 복귀하여 애써 고개를 돌려 에린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마르바의 머리채를 붙잡아 강제로 끌어올렸다.

“아악!”

“생각해보니까, 아이테르에서 널 가장 주도적으로 괴롭혔던 것도, 이 년 아닌가?”

낄낄거리며 억지로 마르바의 눈을 에린에게 마주치도록 하면서 그녀의 자존감을 짓밟음과 동시에, 에린의 반응을 살핀다.
에린은 표정 자체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배급받은 스프가 담겨 있는 그릇을 쥐고 있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어떻게 제어하지 못했다.

“이 년 말이야. 우리 백작 가문에 종자로 팔려왔어. 그것도 지 아버지의 손으로 말이지.”

“…….”

빌라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마르바가 백작 가문에 종자로 팔려오게 된 경위를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애슈턴의 계략으로 에린의 아버지인 레니온 헤르샤를을앞세운 왕국의 예산을 빼돌리는 데에 공모했던 정황이 드러났던 마르바의 아버지, 베르만 자작은 횡령했던 금액의 몇 배나 되는 액수를 벌금으로 왕가에 납부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러 집안의 가계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졌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것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르바는 제국의 잔당인 흑마법사가 뿌린 마나스트림이라는 마약 사건에 잘못 엮이면서 베르만 자작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이후, 베르만 자작은 오르바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자신의 딸을 가문에 종자로 팔아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대량의 자금 원조를 받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위였다.

“워매….”

옆에서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지스가 ‘뭐 저딴 집안이 다있냐?’라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빌라드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꼴이 참 가관이지 않아? 널 그렇게 무시했던 여자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꼬라지를 보니까 기분이 어때? 통쾌한가?”

빌라드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거칠게 끌려다니고 있는 마르바에게는 더 이상 과거에 자신을 괴롭혔던, 신분의 차이를 들먹이며 자신을 철저하게 몰아붙였던 오만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착용하고 있는 장비 자체는 굉장히 질 좋은 상태였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 듯 홀쭉해진 볼과 눈 아래를 잠식한 다크서클은 그녀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르바의 내면 속에서, 참을  없는 수치심과 굴욕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지만, 에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어.”

“뭐?”

 대답이 굉장히 의외였기 때문일까, 빌라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무 생각도  든다고. 걔가 너희 집안에 팔려간 게 뭐? 내가 왜 기쁨을 느껴야 해?”

과거에 자신의 인생과 트라우마 속에 깊이 관여했던동급생의 몰락은 신기하게도 에린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자업자득으로 인해 만들어진 현재의 마르바의 몰락은 일말의 동정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사고방식은 자신의 성장이 원인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존재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정의 고장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린은 지금  상황을 굉장히 한심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집안의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한 사람의 존엄과 인격을 짓밟고 그릇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 행동들을 통해서 희열을 느끼고 있는 광경.
에린은 그 광경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저급해.”

“뭐?”

“…뭐라고?”

에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발끈하는 빌라드와 기사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몸을 돌려 자신의 텐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아, 아가씨!”

황급히 에린의 뒤를 지스가 뒤따라 갔지만, 에린이 입에 담았던 한마디는 빌라드와 기사들에게 큰 파급력을 가져다주었다.

“야…멈춰.”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빌라드가 에린을 불렀지만, 그 목소리는 에린에게 닿지 않는다.

“멈춰!”

큰소리로 외쳤음에도 에린이 미동도 하지 않자, 빌라드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마법사에게 눈짓으로 에린을 가리켰다.
빌라드의 눈짓의 의미를 알아들은 궁정 마법사가 옆에 두었던 스태프를 집어 들고는 술식을 짜기 시작했다.

[한 자릿수 하위 마법]
[거스트 윈드]

“……!”

한곳에 주입된 마력의 존재를 눈치채고, 술식을 통해서 마법을 발현시키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에린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몸을 옆으로 틀어 발을 빼는 것으로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났지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에린의 손이 돌풍 속에 휘말려 손에 쥐고 있던 스프의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에린에게 들이닥치는 돌풍은 그저 아무런 위력도 가지지 않는 하위 마법이었지만, 악의적인 의도가 다분히 담긴 빌라드 일행의 질 나쁜 장난이었음은 명백했다.
에린은 바닥에 엎질러버린 스프를 보며, 망연자실 한 표정을 지었다.

“밥…. 내 밥이….”

“이런! 이걸 어쩌나! 귀중한 저녁 식사를 떨어뜨렸는데!?”

“이, 이런….”

지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에린의 눈치를 살폈다.
모그라프령에서 벌어질 전투에서 왕국의 기사단과 궁정마법사단은 중요한 전력이었으며, 저들은 모두 태생이 귀족이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진 모험가라고 하더라도 평민에 불과한 신분으로는, 일방적인 악의가 담긴 장난과 모욕을 받았다고 해서 거기에 발끈하여 일을 저지르게 되면 불리한 것은 모험가 쪽인 에린이다.

“당장 이곳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아까의 발언을 사죄해!”

의기양양한 빌라드의 높은 톤의 외침이 에린의 귓가에 꽂히자, 에린의 꽉 쥐어진 주먹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외모도 예쁘장한 것이 오늘 밤, 우리에게 아양을 떨어본다고 약속한다면 그 스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스러운 식사도 챙겨주지!”

“…….”

“아, 아가씨.  스프는 무사하니까 이걸 먹고 일단은 자리에서 빠지는 게….”

소녀를 먹을 것으로달랜다고 해서 소녀의 화가 풀릴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은 에린을 어르고 달래서  자리에서 피신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스는 판단했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것을 해야 하는지도 반즈음 이해가 가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소개받을 은현에게 사죄를 할 때, 가산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얍삽한 속내도 가지고 있었다.

“…아저씨.”

“엉?”

“현이…. 아니, 우리 스승님.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죠?”

“그, 그런데…?”

“나중에 증언 하나만 해주세요.”

“무슨 증언을….”

“지금부터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었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에린이 몸을 돌려 다시 빌라드 일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에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은 지스가 얼굴을 굳혔다.

“밥을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밥을….”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마차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탓인지, 피로와 공복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에린은 자신에게 악질적인 장난을 친 빌라드 일행을 잔뜩 노려보며 그들에게 접근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음속으로 피어오르는 짜증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가능하면 자신이 표현할  있는 최대한의 거친 말로 욕을 내뱉고싶은 충동이 잔뜩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가씨! 왕국 기사들과 문제를 일으키면…!”

지스의 만류를 들을 새도 없이, 에린은 움직였다.
다리에 힘을 모아 있는 힘껏 바닥을 차면서 빌라드를 향해서 도약하는 에린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주현성 극원류]
[궁신탄영(弓身彈影)]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빌라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에린의 고속 이동에 지스를 비롯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모험가들과 왕국 기사와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뭣…!?”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에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지금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에린을 계속 도발했던 빌라드였다.

“이…!”

허리를 비틀고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뒤로 끌어당기는 소녀의 행동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개 만도 못한 놈아아아아아!”

퍼억!

“커흑!”

잔뜩 화가 난 에린의 라이트훅이 빌라드의 왼쪽 얼굴에 정통으로 꽂히면서,  충격에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강하게 꺾였다.
짧은 비명과 함께 빌라드의 입속에서 튀어나온 세 개의 이빨이 허공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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