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237. 소모품은 인격체로(1)
“사도의 권속….”
은현은 스쿨드가 일리아나에게 제시했다는 제안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너처럼 신과 연결된 게 아니야. 정확히는 너와 연결이 된 셈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은현처럼 세 여신과 직접적인 연결이 된 것이 아니라, 은현을 통해서 세 여신 중 ‘스쿨드’의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난 말이지. 내 영혼에 장난질을 치지만 않겠다면, 너와 함께하면서 유용한 말로서 움직여주겠다고 말했어. 그래서 그분이 해주신 제안이 이거야.”
법칙에 위배 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범위로 성사된 이 제안은 편법에 가까웠다.
은현은 고민에 빠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는 건지….”
[아마 스쿨드 나름대로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겠지.]
“효율인가요?”
[마녀 아이가 다른 신의 눈에 들어 정말로 아이처럼 신의 사도가 되었다면, 과거의 아이처럼 제약으로 묶이면서 행동을 강제당하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되는 걸 염려한 스쿨드가 먼저손을 쓴 것이지. 마녀 아이의 염원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도와줄 수 있도록.]
확실히 자신과 평생을 함께하는 권속이 된 일리아나는 은현을 통해 여신의 권능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으면서, 자유 의지를 보장받은 특수한 경우가 되었다.
[아이의 몸속에 있는 신력이 점점 성장을 하면서, 강해졌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던 편법에 가깝지.]
“스쿨드님이 이렇게 나서주신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이제는 아이를 믿겠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
영혼에 걸려있던 제약을 풀어주고, 신들의 방식이 아닌 은현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지지하겠다는의미다.
갑작스레 스쿨드가 협조적인 태도로 보여준 호의에, 은현은 선뜻 고맙다는 생각을 품기 어려웠다.
은현은 신들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대륙을 포함한 세계의 유지이며, 거기서 이용되는 인간들은 모조리 소모품의 취급과도 같다.
그 인간들의 카테고리 안에는 세 여신의 사도인 은현도 마찬가지로 포함되어 있다.
은현과 신들의 관계는 언뜻 보기에는 신들의 뜻을 대신 수행하는 대리인과도 같지만, 그것은 그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직업일 뿐, 신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이 좋아질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호의를 보내오고, 한 개인의 인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베르단디가 매우 특수한 경우.
그렇기에 때문에 스쿨드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리아나의 ‘은현의 권속화’가 매우 껄끄러웠다.
[아이의 그 생각은 이해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걸었던 제약이…그만큼 아이를 괴롭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베르단디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번만큼은 스쿨드의 호의를 믿어줄 수는 없겠느냐?]
“직접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어요. 스쿨드님과.”
뜻밖의 부탁에 베르단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직접 말이냐? 하지만….]
“아뇨. 제가 직접 신계로 가고 싶습니다.”
[아이가 직접….]
베르단디는 골똘히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와 스쿨드와 함께 상의를 해보아야겠구나. 나는 먼저 올라가 보도록 하마.]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현의 반응을 확인하고, 베르단디의 영체라 희미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은현은 일리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몸 상태는 어때?”
“음…꽤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졌어.”
손바닥 위에 작은 불덩이 마법을 발현시키는 일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은현과 엘레노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식도 없이, 마력만으로…마법을…?”
“이건….”
“후후, 대단하지?”
술식의 생략.
그것이 불러오는 여파는 작은 게 아니다.
마법의 발동 원리는 만들어둔 술식에 마력을 부여하고, 그 술식에 맞는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
설명만으로는 간단하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이 마력을 조작할 수 있는 양, 술식의 구축 속도에 따라서 등급이 나눠지고, 수준이 갈린다.
한 자릿수부터, 네 자릿수까지의 하위 마법은 캐스팅하는데 필요한 마력의 양이나, 술식의 구조도 상위계에 비하면 그리 복잡하지않은 편.
많은 마법사들이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서 네 자릿수에 도달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위의 단계인 다섯 자릿수부터는 ‘재능의 영역’, 일곱 자릿수부터는 ‘깨달음의 영역’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사고가 확장됐어. 머릿속이 굉장히 넓어진 느낌이야.”
엘레노아의 눈에는 술식도 없이 그저마력을 조작하여 마법을 발현시킨 것으로 보였지만, 은현의 눈에는 마력의 조작과 술식의 전개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 이루어졌기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한계를 넓혀주셨구나.’
은현이 밀려 들어오는 정보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사고 가속’과는 달리 일리아나가 부여받는 ‘사고 확장’은 말 그대로 머릿속의 사고의 한계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했다.
말 그대로 빠른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은현과는 달리, 일리아나는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량이 터무니없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천명이 넘는 엘프들의 대량의 마력을 조작할 수 있었던 건 이것 때문이었구나.”
“맞아. 처음에는 진짜 머리가 깨져서 죽을 뻔했는데, 그분의 도움으로 사고가 확장되면서 나중에는 여유롭게 세계수의 부활 작업을 처리할 수 있었어.”
“…너한테 딱 맞는 힘을 받았구나.”
지금의 일리아나라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술식도 간단하게 전개를 시켜 고위급 주문을 펑펑 쓰고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텔레포트 같은 고위주문을 사용하는데도, 남들보다 매우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그 인터벌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수준.
대륙에 존재하는 열 명의 고위 자릿수 마법사들을 모조리 무릎 꿇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농담 삼아 던졌던 말들이 이제는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너무 무모하셨어요.”
엘레노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 위에 걸터앉아 일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정신이 붕괴되어 폐인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었던 무리하게 감행한 도박수를 일리아나가 자상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 못마땅했다.
“미안해. 그래도 내 나름대로 원하는 게 있었기 때문에 실행한 거야. 다음부터는 이렇게 무리하지는 않을게.”
일리아나가 이렇게 무리를 감행해야만 했던 이유는 은현과 비슷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신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 지금에서는 이렇게 살이 떨리는, 목숨을 건 도박을 또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일리아나는 싱긋 웃으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거침없이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와, 이제는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되었음을 직시하게 된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둘의 모습을 보고 아쉬운 표정을 짓던 엘레노아가 일리아나의 손을 깍지를 끼며 맞잡고, 입을 열었다.
“저도 당신의 아내인데…. 그 권속화라는 것, 저에게는 불가능한 건가요?”
“음…일단 나도 설명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불가능할 거야. 엘레노아한테는 이미 모시고 있는 여신이 계시니까.”
“아….”
은현의 말뜻을 깨달은 엘레노아가 작게 탄식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엘레노아는 비공식적이지만, 베스타여신이 점찍어둔 사도 후보다.
베스타 여신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여신의 사도 후보를 가로채는 것만 같은 행위가 좋은 인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을 중간에 두고 매개체로서 활용하여 일리아나를 사도의 권속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정작 중간에 끼어있던 은현이 이 처리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후후, 괜찮아. 엘레노아.”
일리아나는 깍지를 끼고 있던 엘레노아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몸을 품에 끌어안았다.
“뭘 그렇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괘, 괜찮아요….”
속내를 들킨 것이 부끄러웠던 엘레노아가 얼굴을 붉힌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즐긴 일리아나는 이내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아직은 이곳에 있을 거야. 네 요양도 필요하고.”
“난 괜찮은데?”
“내가 싫어. 적어도 완전히 쾌차할 때까지는 안 떠나. 그리고 해야 할 일도 있고.”
“흐응?”
엘프들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후처리에서 굳이 은현이 무언가를 도울 필요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레지나가 도움을 요청해온다면 들어줄 의향도 있었다.
게다가첫 출진으로 활약했던 엘빈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것이나, 다른 용무들도남아있다.
“앨리스의 눈.”
“아.”
“고칠 방법, 찾아봐야지.”
“후후, 그렇네.”
일리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함께 했던 팀 막내의 눈을 치료하겠다는 결정을 싫어할 리가 없다.
“나도 빨리 회복해야겠네. 그러면?”
기껍게 받아들인 일리아나는 보기 드물게 굉장히 의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너, 캐릭터가 좀 바뀐 거 같다?”
만사에 귀찮은 태도를 보이고 워낙 나서는 것을 싫어했던 페르닌에서의 생활과는 정반대의 모습에 은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앨리스의 눈을 고치는 거잖아. 게다가 빨리 마법을 써보고 싶어.”
“아니, 변한 건 아니구나.”
힘을 부여받아 성장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그녀의 눈동자는 호기심과 기대가 가득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할 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귀차니즘에 가려져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가끔가다 보이는 그녀의 과감한 행동력이 나타난 것이다.
◆ ◆ ◆
[…왔군요.]
나란히 있는 세 개의 여신의 옥좌 중, 가장 오른쪽의 옥좌에 앉아있던 스쿨드는 조용히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사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경건한 자세로 자신의 여신들에게 인사한다.
“저의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베르단디가 은현의 영혼을 신계로 불러들인 것에 다른 두 여신이 동의했다는 것에 대해 표하는 감사의 인사다.
세 옥좌 중 두 자리는 비어있었으며,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스쿨드만이 은현을 맞이해주었다.
‘베르단디님은 안 계시는구나.’
우르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을 신계로 소환한 베르단디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조금 의아해했지만, 스쿨드가 말을 걸어오면서 은현은 여신과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담담하게 묻는 스쿨드의 발언에,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나의 사도의 권속화. 그건 정말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순수한 호의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호의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
[그대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에 내린 결정이죠.]
“…제 가능성?”
[베르단디 언니가 강력히 제안해서, 저와 우르드 언니는 그대의 영혼에 걸려 있던 제약을 풀어주긴 했지만, 그것에 관한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지 대해선 깊은 우려가있었습니다.]
영웅 후보이자 어렸던 레지나를 피신시키는 것이 아닌, 엘프들과 함께 전선을 참여하려고 했던 그때처럼, 혹시라도 사도의 임무보다 자신의 개인의 감정을 우선시한 행동을 취하면서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언니들과 저, 우리들을 원망하고 있나요? 그대의 영혼을 조작하고, 행동을 제한했던 것을.]
“…….”
은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그때 레지나의 피신 임무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자신이 다크엘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면, 실비아를 포함한 다른 엘프들을 아무도 죽지 않게, 모두를 구할 수 있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혹시라도 실비아를 포함한 엘프들을 구해내고, 오히려레지나를 잃으면서 엘프들이 희망을 잃는 암울한 미래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이랬으면 어땠을까?’ 가정을 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그때 그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거부하려 했던 것은 은현 자신이다.
사전에 몇 번이고 되물어본 베르단디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이고 사도의 역할을 받아들인 것은 은현 자신이다.
그것이 싫었으면 사도 같은 것은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이미 돌아가기 시작한 쳇바퀴는 도중에 이탈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로서의 입장은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은현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도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써, 은현은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스쿨드에게 말했다.
스쿨드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때문입니다.]
“네?”
[베르단디 언니는 그대에게 신들의 사고방식을 강요한 것이 못내 안타까워하셨죠. 우르드 언니는 한 인간 개인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는 것을 여전히 못 마땅해했지만 그대의 영혼의 제약을 푸는 것에는 동의했습니다.]
우르드와 스쿨드가 은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베르단디의 연정과도 같은 감정과는 다르다.
소모품으로써, 또는 그와 비슷한 도구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대리인.
[그대는 전에 베르단디 언니에게 말했다죠? 우리들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
은현은 얼굴을 굳히고, 과거에 베르단디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인간이 그 말을했다면, 많은 신들이 그 말을 듣고 분노했겠죠.]
비웃고, 조롱하며, 멸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는 다릅니다. 나는 나의 사도인 그대가 걸어왔던 고행의 길을 빠짐없이 보아왔던 여신입니다.]
세 여신 중, 베르단디에 이은 두 번째 여신인 스쿨드가 은현이 걸어왔던 길과 그가 이루어냈던 업적들을 인정했다.
[그대는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의 상체를 숙였다.
[그대의 영혼에 그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그대를 믿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아….”
[그대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순간을, 기다리겠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에 대해 여신이 보이는, 최고의 경의를 담은 사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