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221. 사전 준비(1)
달의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엘프 여왕, 레지나를 비롯해 마을의 중대사를 논하기 위해 모여있는 원로 엘프들이 모여있는 장소,
‘숲의 회랑’은 달의 마을의 수장이자, 엘프 여왕이 마을의운영을 많은 엘프들과 운영하기 위한 궁정회의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은현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우리 쪽에서도 세계수의 힘이 감퇴 된 원인을 찾아봤습니다.”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은현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 엘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인간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부터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엘프 여왕인 레지나를 포함해, 많은 원로엘프들이 은현에 존대를 하고 있었기에, 젊은 엘프들도 거기에 따라 대응했을 뿐.
“이곳에 체류한지 약 1개월이 지나면서, 세계수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조사를 해봤죠.”
“도대체 무슨 수로….”
딱히 은현과 그의 두 아내들을 비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계수의 힘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재능은 엘프들 사이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다.
은현의 정체를 모르는 젊은 엘프의 입장에서는, 은현이 하고 있는 말이 사기꾼의 사탕발림만큼이나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몇 백 년을 살아온, 자신보다 긴 시간을 보내며 세계수를 지켜온 여왕과 원로들이 찾지 못했던 원인을 느닷없이 달의 마을을 찾아온 인간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은현이란 인간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달의 마을에 정착해 지금의 원로 엘프들과 인연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능력과 가치를 제대로 가늠해볼 계기가 없었던 젊은 엘프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자신의 윗세대, 부모와 조부모에 해당하는 엘프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했던 대단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지겹도록 들어왔었다.
그렇기에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지금껏 숨어 살면서 세상과 인간들에게 엮이지 않는 폐쇄적인 방침 속에서 예외로 두고 무조건 적인 신뢰를 보내올 수 있는 것일까.
“엘레노아.”
“네.”
은현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고 엘레노아가 앞으로 나서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회의장의 중앙에 놓여있는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딸깍
“허억!”
잠금장치를 풀고, 상자의 뚜껑을 개봉하자 상자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짙은 사기(死氣)를 느끼고 몇몇 엘프들이 숨을 삼키며 놀란다.
모두 과거에 이 기운을 접해본 적이 있었던 원로 엘프들이었다.
철컥!
사기가 다시 빠져나오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엘레노아가 곧바로 상자를 닫아버리고 재빨리 잠금장치를 잠가버리자 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던 원로 엘프들이 뒤늦게 숨을 내쉬었다.
“후으….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계수의 영역 안으로 감히 그런 불경한 기운을 가지고 오다니….”
“그만.”
“…폐하.”
날카로운 표정으로 은현을 추궁하던 원로 엘프의 말을 레지나가 손을 내저어 제지시켰다.
레지나 또한 이번 건은 무조건 적으로 은현을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은 표정으로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설명해주세요. 무슨 의도로 그 부정한 기운을 달의 마을 안으로 가져오신 거죠?”
“여왕님을, 그리고 여기 있는 엘프분들을 모두 납득시키기 위함입니다.”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공식 석상의 자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해당하는 레지나를 지켜보는 많은 엘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은현은 전처럼 친숙한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사용했다.
“…납득?”
무엇을 납득시키려 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레지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은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고 엘레노아가 테이블 위에 올려준 사기가 담긴 상자의 뚜껑을 툭툭 건드렸다.
자칫 잘못하면 무슨 일이 생기면서 상자 자체가 부서져 버리고 안에 있던 사기가 바깥으로 퍼질 것을 경계하던 원로 엘프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먼저, 여러분들이 불안해하시기에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정한 사기를 담고 있는 이 상자는 안전합니다.”
카앙!
“절대로 부서지지 않죠.”
상자를 쥐고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생기는 쇳소리에 엘프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이 상자는 저와 제 아내들이 이 사기를 봉인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상자입니다.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깨지지 않도록 설계하여 제작하였으니,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자를 만들어서까지 굳이 달의 마을 안으로 반입하여 숲의 회랑에서 저희들에게 보여준 이유가 뭔가요?”
“이걸 발견한 건, 달의 마을 안으로 진입하기 전 외곽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이 사기를 품고 있는 매개체를 발견할 수 있었죠. 몇몇 원로 엘프분들께서는 이미 짐작하신 것 같군요.”
“사기…매개체….”
은현이 제시한 키워드들을 입에 담으며, 이런 수작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설마…다크엘프의…?”
“맞습니다. 다크엘프들의 특기인 ‘저주’의 주술이죠. 그리고 이게 세계수의 힘을 조금씩 깎아내고 있었던 원인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저주나 부정한 기운이라도, 세계수의 힘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세계수의 힘이 미치지 않는 외곽에 이런 걸 설치한 거지요.”
“……?”
“다크엘프들이 노리던 건 직접적으로 세계수에 타격을 주는 게 아닙니다.”
은현은 손가락을 바닥에 가리켰다.
“…땅?”
“네. 이 마을 전체를 수호하고 있는 세계수가 자리 잡고있는 이 대지.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이 ‘달의 마을’ 전체를 노리는 거죠.”
“아….”
레지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작게 탄식했다.
이전 은현에게 했던 자신의 말.
-선생님의 말씀대로, 세계수의 힘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로 인해 세계수의 축복을 통해 계약했던 정령들이 모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게다가…동시에 세계수의 축복으로 풍족했던 대지들까지 조금씩 메말라가고 있죠.
하지만 그것이 원인과 결과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경우라면.
“세계수의 힘이 깎여나가면서 이 숲의 대지가 메말라가고 있던 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이 숲의 대지가 다크엘프들이 걸어둔 저주로 인해 메말라가면서 세계수가 힘을 잃고 있었던 거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말장난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저주’의 키워드를 먼저 제시한 시점에서, 레지나를 포함한 엘프들이 은현이 제시한 가설을 신빙성이 있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런 방법을….”
세계수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세계수의 영역이 닿지 않는 외곽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대지를 공략해온다는 발상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엘프들의 실책이다.
“하지만 세계수의 결계는 결계의 바깥에 있더라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크엘프의 존재를 감지해내는 특성도 있습니다. 이 저주를 설치한 것이 다크엘프들이라면, 어째서 설치할 때 들키지 않을 수가 있었던 거죠?”
“저주의 매개체를 굳이 저주를 만든 다크엘프가 운반할 필요는 없죠.”
“그 말은….”
엘프의 질문에 대답을 하던 은현은 이내, 레지나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여왕님. 제가 처음 달의 마을에 왔던 날. 인근에 위치한 촌락 마을의 인간들을 납치하고 있던 다크엘프들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그렇군요…. 빙의라면….”
다크엘프인 본체가 아닌, 인간의 몸에 빙의하여 그 저주의 매개체를 직접 옮겨 설치를 했다면, 세계수의 결계가 반응하지 못했던 것도 납득이 간다.
“선생님이 굳이 그 사기를 봉인하여 저희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곳의 엘프분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죠. 두 번째는 이저주를 지금 당장 없애선 안 된다고 또 다른 설득을 하기 위함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은현의 주장이맞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없애야 하는 위험천만한 저주임이 틀림이 없는데, 그것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두 번째 설득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달의 마을과 세계수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을 방치하자는 것과 똑같은 소리.
하지만 이 주장을 하고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은현이었기에, 300년 전의 그를 알고 있는 한 원로 엘프는 은현에게 그 의중을 물었다.
“여왕님도 아시다시피, 이 저주는 위험합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의 저주 하나로 달의 마을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을 안겨 줄 수는 없어요.”
“그 말은….”
“한 개가 아닌, 여러 개. 그것도 아주 많은 수의 매개체가 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죠.”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그 저주가 담긴 매개체들을 없애야….”
다급하게 중얼거리는 젊은 엘프의 말을 레지나가 끊었다.
“매개체에 담겨있는 저주는 함부로 해주를 해서는 안 됩니다.”
“여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레지나의 말을 받은 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기가 담긴 아티팩트를 꽉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저주는 해주를 하게 되면, 그 사실을 술자는 깨닫습니다. 즉 이쪽에서 저쪽의 수작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려주는 꼴이 되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 땅과 세계수를 좀먹는 이 저주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꾸하는 젊은 엘프의 말에 은현이 피식 미소지으며 저주의 매개체가 담긴 아티팩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이렇게 아티팩트 안에 봉인해두어 가져왔지 않았습니까. 저주를 건 술자가 눈치를 채지못하도록.”
“아….”
“이 저주가 담긴 매개체들을 없애지 말자는 제 제안은 ‘달의 마을과 세계수가 계속 피해를 입도록 방치하겠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저주를 해주하지 않으면서도, 손수 아티팩트를 제작하여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제시’해온 것이다.
이것이 은현이 사기가 봉인된 아티팩트를 이 자리에서 선보인 두 번째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께서는…선제 공격을 감행하실 생각이시군요.”
구태여 이렇게 번거롭게 저주를 없애지 않고 봉인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제작하면서까지 레지나와 다른 엘프들을 설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쪽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고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틈을 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것.
“정답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여왕의 티가 난다고 생각한 은현이 기특하다는 기쁨의 감정을 얼굴로 표현하자, 레지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밝아지셨구나….’
과거에 은현과 10년을 함께 살았던 엘프, 실비아가 죽고 나서 반즈음 여생을 포기한 것만 같은 쓸쓸한 얼굴로, 은현이 달의 마을을 떠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마음을 치유해주었던 것은 아마도.
‘저 두 인간들의 덕이겠지.’
검은 색조의 마녀 옷을 입고 있는 색기가 있는 여마법사와 새하얗고 신성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여사제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은 레지나는 이내 은현의 의중을 다시 한 번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싸울 생각이시군요.”
“맞아.”
“제가 말려도 소용없겠죠?”
“말릴 생각도 없으면서.”
담담하게 자신의 본심을 정확히 꿰뚫는 은현의 대꾸에 레지나는 미소지었다.
어떻게 자신이 은현을 말릴 수가 있을까.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려는 상황에서, 지금 은현은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하려 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때는 고를 수 없었던 그 선택지를 고르는 행동이 참을 수 없이 기쁘다.
은현을 그 선택으로 밀어 넣는데 원인이 되었던 것이 레지나 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레지나는 지금 은현의 선택에 큰 기쁨을 느꼈다.
“지금부터 엘븐가드에게 세계수의 외곽에 남아있는 저주의 매개체의 수거를 명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왕의 뜻을 따릅니다!”
숲의 회랑의 회의가 끝나고, 레지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엘븐가드들이 회랑을 빠져나갔을 때, 은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레지나.”
“네?”
공적인 회의가 끝난 은현은 다시 평소의 이름을 불렀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인가요?”
“이건 여왕인 너의 공인이 필요한 일이야.”
은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검은 구슬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