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201. 결혼식
“…엄청나군.”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수천의 금화들의 산에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물론,아브로스까지도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족히 3,000닢은 넘어 보이는 데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엘레노아의 중얼거림에, 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 합해서 금화 3,645닢입니다. 백금화로 36닢하고도 좀 남네요.”
공작령에서 운용되는 1개월 치의 예산이 백금화 100닢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단기간 안에 백금화 30닢이라는 액수를 벌어들인 은현의 수완이 얼마나 굉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사기 같이 느껴지기도 했는데…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엘레노아는 금화의 산을 보고, 마음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마나스트림의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은현이 뿌린전갈에 낚여 아르미타스 공작령을 찾아온 10명의 왕당파벌의 귀족들은 모두 10배에서 15배에 달하는 비싼 가격으로 치료제를 구입했다.
혹시라도 그 귀족들이 왕가에 건의해서 자신들이 사기를 주장했다고 고발을 하지는 않을지 우려를 표한 것이다.
“왕가에 저희의 행각을 찌르지는 못합니다. 애초에 치료제를 독점하기 위해서 공작령을 몰래 찾아왔던 건 그들이니까요.”
“그건…그렇죠….”
“게다가 저희는 페르닌에 금화 1닢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에 막대한 물량을 풀어, 마약에 중독된 귀족 자제들을 구한 선인들입니다. 고맙다고 감사를 받아도 모자랄지언정,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죠.”
심지어 치료제의 가격도 재료비만을 감안한 것이며, 조제를 시행한 은현과 세실리아의 인건비, 유통비는 일절 포함이 되지 않은 가격이라는 점도 함께 제작에 동참한 세실리아에게서 공인을 받은 내용이었다.
공작가문에 칼을 들이밀었던 귀족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혀 엿을 먹이고, 동시에 치료제를 독점하려는 수작질을 하지 못하도록 막대한 물량을 일제히 생산해내어 페르닌에 풀었다.
‘지금 수도에서는 배임횡령을 주도한 애슈턴이 있던 가문이라는 오명은 이걸로 어느 정도 씻어낼 수 있겠지.’
“하지만…왕당파벌의 귀족들이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알고 가만히 있을까요?”
“많은 귀족 자제들을 구한 공작 가문에 대한 귀족들의 인식이 떡상을 했으면 했지, 이 시점에서 공작가문을 건드리는 건 대가리가 비었다는 걸 스스로가 증명하는 꼴입니다.”
“…떡상?”
은현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단어에 엘레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엘레노아의 우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건 또 아니죠.”
제 자식들을 살리기 위한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알렉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구걸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뭐 인식이나 공훈 같은 부분을 제쳐두고서라도,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귀족들이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작가문에 보복을 해오기 쉽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
“공작님이 군무장관의 자리에서 사퇴를 하기는 했다지만, 아직 공작가문의 영향력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명 중 4명은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에 동참했던 사실이 리오드에게 적발되어 왕가에 벌금을 내야하는 상황이라, 이번 사건을 통해서 재정적인 여유가 더욱 쪼그라들었죠. 이외에도 오히려 이번 마약사태를 기점으로 많은 귀족들이 우왕좌왕하고 페르닌의 현재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곧바로 공작가문에 보복을 해오지는 못해요.”
지금은 혼란을 수습하고 어지러워진 왕국의 전체적인 체제를 다시 굳혀야하는 시기이다.
쓸데없는 공작가문에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작질을 걸어오는 자잘한 트집들은 크게 신경을 쓸 것도 못됩니다. 오히려 밟아주고 이쪽에서 더더욱 치고나갈 수 있는 구실을만들어주게 되는 발판이 될 겁니다.”
머리를 굴릴 줄 안다면, 제대로 된보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알렉스. 지금부터는 네 역량에 달렸어.”
“알고 있어.”
은현과 알렉스에게 속아 넘어간 귀족들이 계획할지도 모르는 보복에 대해 제대로된 대비책을 세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자금이 생겼다.
“그리고 고아원의 설립. 약속 지켜라.”
“물론이지.”
개인적으로 왕당파벌의 귀족들이 무릎을 꿇으며 치료제를 구걸했을 때를 떠올리고,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나아가서 가문을 끌어내리려 했던 귀족들에게 큰 엿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은현에 대한 보답으로는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아원 건설에 필요한 자금과 유지비까지 제공을 한 셈인데 거절을 할 수가 있을까.
“…그 악마가 데려 왔다는 아이들인가.”
엘레노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아브로스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악마를 공작령 안에 들여놓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으시다면….”
아브로스는 20년 전, 제국과의 전쟁에서 하급 악마들과 교전을 치러본 적이 있는 세대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던 알렉스나 엘레노아와는 달리, 악마에 대한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위험한 존재가 자신의 영지 안에 있는 것을 허락하는 것에는 큰 결심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은현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다. 나는 이제 실무를 떠난 몸이니까. 알렉스가 허락했다면 내 쪽에서 그 선택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
“아버지….”
씁쓸한 얼굴로 대답하는 아브로스의 얼굴을, 엘레노아가 안쓰러운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브로스는 군무장관을 사퇴함과 동시에, 비공식적으로 공작령의 실권 또한, 소공작인 알렉스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그 선택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알렉스와 엘레노아도, 자신들의 아버지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는 이제 괜찮아요…. 이제 곧 결혼도 하고 행복해질 예정인데….”
“아니, 엘레노아. 이건 내 마음의 문제다. 딸인 너에게 신경을 쓰게 만들어 미안하구나….”
배임횡령을 저질렀던 애슈턴의 죄를 덮어 눈을 감는 것을 선택했고, 소공작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으로 처벌을 그쳤던 어리석은 선택으로 깊은 후회와 죄책감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 현재 아브로스의 심정이다.
아브로스는 지금 심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알렉스는 아브로스의 선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공작위를 물려받고, 아버지의 완전한 은퇴를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비공식적으로만 실권을 넘겨받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 책임과 죄책감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아브로스는 은현을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악마의 존재를 용인하는 이유는,개인적으로 널 믿고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그 신뢰가 너무 무겁습니다만….”
“이 정도의 신뢰에 호응할 마음도 없이, 내 딸을 데려가려고 했던 건가?”
“…….”
은현은 할 말이 없어져 입을 꾹 닫았다.
그 옆에서 엘레노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간소한 크기의 신전의 안쪽, 입구에서부터 직선상으로 자신의 앞까지 깔려 있는 붉은 융단 위에 서서, 은현은 자신의 두 아내가 될 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 되냐?”
“…그럼 안 되게 생겼냐? 지금?”
“그냥 평소처럼 웃으면서 여유로운 면상으로 농담이나 던질 줄 알았지. 무슨 신전 앞에 세워진 동상 마냥 몸이 딱딱하게 굳었네. 아주.”
작은 키 때문에 따로 마련된 발판 위, 주례석에 서서 잔뜩 굳어있는 표정의 은현의 얼굴을 보고 아니에스가 비아냥댔다.
“…….”
불멸에 가까운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이 순간의 기분을 누가 알아 줄 수 있을까.
은현은 슬쩍 하객석을 바라보았다.
왜소한 신전의 안에 마련되어 있는 조촐한 규모의 하객석에 참석해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공작가문의 사람들인 적은 규모로 채워져 있었다.
은현이나 일리아나의 인맥이라고 해봐야, 리오드 부부의 일가와 제라드 뿐.
공작가문의 인맥을 동원한다면 이 작은 규모의 신전 따위는 꽉 채우고도 남을만한 대규모의 인원을 불러 모을 수도 있었지만, 워낙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남의 주목을 받는 것을 꺼려하는 은현과 일리아나를 배려한 작은 규모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예외라고 해봐야 은현과 자주엮인 것을 시작으로 일리아나의 첫 제자라고 할 수 있었던 유리아 왕녀뿐이었다.
“흥.”
순간 은현과 눈이 마주친 리오드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읽는 것은 아주 쉬웠다.
‘어서 와라. 결혼이라는 지옥에.’
“…….”
이내 조촐한 하객석들이 시끄러워지면서, 은현은 시선을 옮겨 붉은 융단이 깔려있는 입구의 끝 쪽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반투명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고, 천천히 은현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엘레노아는 아브로스의 한쪽 팔을 끼고 함께 걷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가족이 없었던 일리아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녀의 옆에서 혼자 걸어오는 모습이 당당했다.
“와, 와아….”
두 신부의 모습을 보고 에린이입을 다물지 못하며 감탄사를 흘렸다.
“예쁘다….”
오늘, 이 장소에서,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모습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둘의 모습을 보고 하나의 감정이 싹트기까지.
‘부러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에린 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만큼 이 신전 안에서 히로인이나 다름없는 두 여성에게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하, 위험하네….”
“……? 뭐가?”
무심코 은현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아니에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느낀 것이 아닐까?
아니에스를 포함한 팀원 중에서 가장 직감과 감지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 은현이.
자신이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아니에스는 생각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내 은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든 드레스…. 잘 만들었어도 너무 잘 만들었잖아. 보기만 하는데도 빛이 다 나오고 있네. 역시 사람은 옷걸이가 좋아야 해.”
“…이런 병X새끼가?”
걱정해서 손해만 봤다는 생각과 함께, 아니에스가 은현을 한심한 종자를 바라보듯 쳐다본다.
마침내 세 사람이 은현의 앞에 당도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 뻗은 은현의 손에, 아브로스는 엘레노아의 손을 건 내주었다.
“딸을 잘 부탁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엘레노아.”
“네. 아버지.”
“꼭 행복해야 한다.”
“저도 명심할게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딸의 모습을 보고, 아브로스는 천천히 걸어가며 혼주석에 앉았다.
“드디어 이 날이 왔네.”
“그러게.”
작게 중얼거리던 일리아나가 동조하며 대꾸하던 은현의 손을 깍지를 끼며 맞잡았다.
“나한테는 꿈만 같았던 순간이야.”
“그 정도야?”
“한 번은 깨져 버려서 도저히 현실로는 이룰 수 없었던 순간이니까.”
“…….”
마음도 제대로 전하지 못해보고, 전쟁터에서 은현을 떠나보내야 했던 일리아나였던 만큼,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다른 누구보다도 남달랐다.
“네가 그렇게 떠나고, 수십, 수백 번을 상상하고 꿈속으로만 꿈꿔왔던 순간이었어.”
“미안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던 것을, 일리아나에게 답을 해주지 못하고 떠났던 것을 은현은 자신의 최대한의 마음을 담아사과했다.
“괜찮아. 이렇게 다시 돌아 와줬으니까. 다 용서해줄게. 오히려 내 옆에 와줘서, 내 마음을 받아줘서,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해. 너를 되살려주신 네 여신님께도 정말 평생을 감사하면서 살 거야.”
[고맙구나. 이걸…이런 미래를 원했다. 나의 아이가 행복해지는 미래를….]
허공에서 일리아나의 독백을 들은 베르단디가 기쁜 미소를띄우며 말했다.
일리아나는 은현의 손을 깍지 낀 손을 풀고, 자신과 엘레노아가 걸어왔던 입구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도망치려면 저기야.”
선심을 쓰듯이 절대로 골라서는 안 되는 선택지를 굳이 열어주는 일리아나의 태도에 은현이헛웃음을 지었다.
엘레노아 또한 피식 미소 짓기는 마찬가지.
“이제 와서 둘을 두고 갈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럼 됐어.”
“무슨 당연한 소리…읍!?”
순식간에 은현의 옷깃을 붙잡아 잡아당겨 그대로 입술에 키스를 해오는 행동에 신전에 있는 모든 하객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나, 갑자기 무슨….”
자신의 입술에 들어오는 기습 키스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은현이 일리아나의 눈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강한 욕구와 집착의 감정이 깃들어 있는 마녀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오싹한 기분이 등골을 시리게 만들었다.
“우린 분명 도망칠 길을 제시해줬어. 우리를 선택한 건 너야.”
“하, 하하….”
“이젠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야.”
“저도 요.”
두 여자의 결의를 실시간으로 확인한 은현은 마른 웃음을 흘리며 두 신부의 손을 하나씩 맞잡았다.
“아니, X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니에스가 인상을 찡그린다.
“절차도 싹 다 무시하고 니네끼리 입술 박치기로 짝짜꿍 할 거였으면, 난 도대체 왜불렀냐?”
어젯밤부터 처음 해보게 되는 주례를 계속 연습했던, 자신의 노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아니에스는 신전의 대주교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는 거친 욕을 내뱉으며 툴툴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