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183. 악마소환의 그림자(1)
“후우….”
궁정회의를 마치고, 궁정 안을 걷던도중, 디아네는 피곤한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한숨은 뒤에서 걷고 있던 시녀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피곤에 찌든 기색이었다.
“바로 침소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노곤한 몸을 이끌고 침소 앞에 도착한디아네는 시녀의 배웅을 받으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의 시중으로 간편한 네글리제로 갈아입고 시녀는 왕비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퇴실을 알렸다.
고개를 끄덕여 시녀의 퇴실을 허가하고, 시녀가 나가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아….”
피곤함에 절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눕힌다.
아직 해가지기 전, 저녁식사의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정회의에서 느낀 굴욕감과 분노는 디아네의 마음을 너무나도 지치게 만들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 군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읏!”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던 디아네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네글리제로 드러난 자신의 피부를 이불로 감추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은발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근위기사를 부르지 않으시는 군요. 좋은 판단입니다.”
국왕과 1왕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이밀 수 없는 왕비의 침실에 태연하게 침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디아네는 입을 꾹 닫고 은현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대는…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들어온 건가요?”
“당연하죠. 여기서 왕비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요. 이곳은 나의 침소에요! 외간 남자가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곳이 아니라고요! 근위를 부르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디아네는 가슴에 차오르는 다양한 감정에 조금씩 손을 떨었다.
궁정내부에 침입하여, 그 중에서도 가장 경비가 엄중한 왕비의 침소에 들어와 태연히 디아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이 돋는다.
은현의 수준이 이 궁정 안을 지키고 있는 그 어떤 근위기사들보다 높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이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근위를 부르려는 낌새를 취하기만 해도, 은현이 그 이전에행동을 옮겨 자신을 제압하리라.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고생해서 왕비님을 만나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은현의 태도가 디아네의 심기를 더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제가 왕비님을 몰래 만나 뵙기 위해 이곳에 온 이유는 급히 알려드려야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은현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디아네에게 건 냈다.
“이건….”
자연스레 서류의 가장 위, 제목을 읽은 디아네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서류의 내용을 재차 읽어나갔다.
“‘베스타 신전의 물자 지원 계약서’….”
그 내용은 베스타 신전의 하르칸 주교가 페르니아스 왕국에 신전의 이름으로 대량의 물자를 기부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이다.
그 아래에는 하르칸 주교와 현국왕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마침 그 날짜도, 같은 해에 린데발트 령이 이교도로 몰려 숙청이 되기 이전의 시점.
디아네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설마….”
“제가 이걸 어디서 발견했는지, 궁금하시지 않나요?”
“…….”
“이번에 왕국에 마약을 퍼뜨린 주범, 그자의 은신처입니다.”
“그게 무슨….”
“정확히는 미르바빌라 제국 궁정마법사인 람펠 매버의 아들인 란델 매버의 은신처죠.”
“……!”
멸망한 제국의 궁정마법사의 이름까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제국의 궁정마법사라는 사실 만으로도 디아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정말 이상하죠? 어째서 베스타 신전과 페르니아스 왕국 사이에서 체결된 외교문서가, 전혀 뜬금없는 제국 잔당의 은신처에서 나왔던 걸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을 해오는 은현의 태도가 굉장히 아니꼬웠던 디아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굳이 질문을 해오는 은현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얘기하세요.”
“제국의 잔당들이 아직 남아있고, 계속해서 악마소환의 숙원을 풀려고 하고 있어요. 거기에….”
미소를 지었던 은현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나라도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죠.”
“…….”
상상도 하기 싫었던 가능성의 제시에 디아네는 이를 갈았다.
게다가 더욱 위험한 상황인 것은 연루된 것이 다름 아닌 이 나라의 국왕이다.
“이건 단순한 제 추측이지만, 아마도 국왕폐하께서는 신전의 지원을 받아 나라의 재정을 보강하는 조건으로 린데발트령의 사건을 불문에 부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르칸 주교의 뒤에는 제국의 잔당이자, 악마소환이 목표인 흑마법사가 있었던 거죠.”
은현이 이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이전 하르칸 이 아니에스에 의해서 파문을 당하기 이전, 그의 기억을 읽어 들였을 때, 란델이나 다른 흑마법사와 조우했던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아의 납치 사건 때, 린데발트령에 하르칸의 아들인 바르크가 나타나면서, 이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란델에게 이용을 당했던 건, 아마 바르크였겠지.’
중간에 바르크를 세워두고, 바르크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주교직의 위세를 빌려 린데발트령을 이교도로 몰아 숙청이 되도록 유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
바르크가 어떤 대가를 받고 란델과 협력을 했는지까지는, 은현도 알 수 없었다.
엘레노아에게 성적인 집착을 보였던 그 성품으로 보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생각해봤자 기분만 나빠지는 문제였기에, 은현은 굳이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자세히 꺼내지 않았다.
“성직자가 흑마법사와 결탁해서 사람들을 이교도로 몰아 모조리 처형을 시키다니. 개판이 따로 없네요. 거기에 왕국도 자신의 영토의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음에도 이것을 묵인하고 있었고요. 세상 참 잘 돌아가요. 그쵸?”
은현의 비아냥에 디아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쥔 손이 조금씩 부들거리며 떨 뿐이었다.
“나한테…나한테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요!”
“알고 있어야죠. 당신은 이 나라의 어머니이니까.”
“나는…나는 몰랐어요. 폐하께서 이 사실을 묵인했다는 걸….”
“압니다. 왕비님이 왕국의 대리청정을 맡기 시작하신 시기는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이시니까요.”
“…….”
디아네는 이제는 병마에 시달려, 누워 있는 상태로 국정을 살필 수 없는 현 국왕의 모습을 떠올린다.
‘폐하는 린데발트령의 사건에 제국의 잔당과 흑마법사가 연관되었다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하지만 말이죠. 그렇다고 이 나라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공표한다면, 이 나라는 물론이고 베스타 신전도 끝장나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럼에도 공표할 생각이신가요?”
“공표 안 할 건데요?”
“…뭐라고요?”
“누구 좋으라고 공표합니까. 이 어마어마한 똥 덩어리를. 흑마법사의 경계심을 대륙 전체에 심어주는 데는 효과가 좋겠지만, 발표하는 순간 페르니아스는 물론이고,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베스타 신전의 권위도 함께 바닥으로 추락할 텐데. 아니에스에게는 이 사실을 말해둘 생각이지만. 대륙에 이 사건을 공표하는 건 얻을 것도 없는 자폭행위입니다.”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죠? 당신은 대체 나한테 뭘 바라고 있는 건가요!”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울분의 감정 속에서 디아네가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자신이결정하지도 않았던 결정들, 국왕이 저질러 놓은 사태에 대해서, 앞으로 자신이 감당하고 책임져야만 하는 무게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제가 왕비님께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왕비님은 지금 이 나라의 최고 결정권자이고, 이 나라가 흑마법사들에 의해 악마소환에 어떻게 연루가 되었는지 알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야 앞으로의 대응책도 생각할 수 있으실 테니까요. 왕비님이 어떤 선택을 내리던 제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은 아르미타스 공작 쪽의 사람이잖아요. 어째서 나를 배려해주는 거죠?”
디아네의 질문에 은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공작님과는 그런 주종관계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따님을 맡게 되었긴 하지만, 저와 공작님의 관계는 굳이 말하자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협력관계라고 해야 할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전 공작님 쪽의 사람이 아니에요.”
“……?”
이해 할 수 없는 설명에 디아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엘레노아와 약혼을 했으면서, 공작가문 쪽의 사람이 아니다?
은현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그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자신의 딸과의 약혼은 어째서 시켰던 것일까.
아브로스의 선택을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은 점은.
‘이 남자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당신의 목적은…도대체 뭔가요.”
“왕비님. 전 말이죠.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의 꼬라지를 보면 굉장히 힘든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해서 이 대륙 전체가 망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것은 은현이 가장 혐오하고 있는 ‘신들의 사고방식’과도 비슷하다.
결국에는 은현 자신도 오랜 시간 동안 주입된 그 혐오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그 과정에서 죽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은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디아네의 질린 시선을 받은 은현이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웃기죠?”
“재미있는 궤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궤변?”
“왕비님의 아드님이신 데미안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왕비님이 노력을기울여 만들어낸 지지 세력의 귀족들이 백성들을 보살피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훌륭한 귀족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사람들 중에는 말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눈을 감고 추악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비님이 데미안 왕자를 위해서 두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귀족들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것 처럼요.”
“나는…그들과는 달라요.”
“하지만 그 귀족들을 방치하고 지금의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왕비님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해오자, 디아네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제가 왕비님을 몰래 찾아온 이유는 린데발트령의 사건에 왕국이 어떻게 연루가 되었는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까 저는 이 나라는 망하든 말든 딱히 상관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게 지금 망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정확히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의미.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제국의 잔당들은 란델 매버 한 명 뿐이 아니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은현은 한 가지 떠오른 사실에 몸을 다시 돌리고 디아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싶습니다.”
“…뭐죠?”
“왕비님께서 애를 쓰면서 까지, 이 나라의 주인의 자리에 데미안 왕자를 앉히는 게 정말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이 나라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시나요?”
“…….”
벌레가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못하는 디아네의 얼굴을 확인하고, 은현은 피식 웃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대답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부디 이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속으로 빌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은현의 몸이 안개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