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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화 〉182. 소녀의 논공행상(2) (182/730)



〈 182화 〉182. 소녀의 논공행상(2)

“…지금 뭐라고 했지?”

에린의 돌발 선언에 한 귀족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못들은 것인지 재차 확인하는 귀족의 질문만 봐도, 에린의 발언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

에린이 대답하지 않자, 귀족이 짜증을 내며 소리를 쳤다.

“대답해라! 감히 왕국의 영예로운 귀족의 작위를 마음대로….”

“야. 입 안 다물어?”

일리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노발대발하는 귀족의 말을 끊었다.

“크…으!”

“우리 애가 지금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신중히 고르고 있잖아.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양반이 젊은 아가의 의견도  기다려줘?”

이윽고 에린을 흘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많은 귀족들의 탐탁치 않아하는 시선을  몸에 받으면서, 잔뜩 위축되어 있던 소녀가 처음으로 귀족들의 시선을 당당하게마주보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녀의 성창을 처음부터 지켜봐왔던 일리아나는 그런 에린의 성장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아마 대견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  만이 아닐 것이라고 일리아나는생각했다.
흘끗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검은 구슬을 한 번 응시하고는 다시 준비를 마친 표정을 짓는 에린을 바라본다.

“자, 아가. 말해볼래? 왜 이 왕국의 귀족의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 거니?”

“…많은 분들이 왕비님이 내리신 결정에 불만을 가지고 저를 바라본 시선들을 느꼈어요.”

모두 하나 같이 에린의 남작의 승급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심지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에린을 옹호했던 젊은 귀족마저, 디아네 왕비가 에린의 작위를 승급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린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귀족이 되고, 조금씩 페르니아스 왕국 안의 귀족 사회에 녹아들어봤자, 자신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이테르 안에서의 겪었던 멸시와 배척이 연장  뿐,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에린은 잘 알고 있었다.

“무늬만으로 챙겨주고,아무도 존중해주지 않는 지위와 명예에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에린의 남작 위계로의 승급을 반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왕비가 직접 공인했기 때문이다.
왕비의 결정을 뒤집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린의 작위를 인정하는 것뿐이지, 결코 에린을 인정해서가 아니다.
에린은 이대로 귀족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둘러싼 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잘 안다.
자신의 오빠인 엘빈이 그랬기 때문이다.
엘빈은 피나는 노력 끝에 아이테르를 졸업하고, 평민이나 다름없는 준남작의 가계의 신분으로 메이거스 궁정마법사단에 입단하는 성공한 인생을 보여주었으나, 그곳에서 경험한 것은 아이테르에서 이어진 멸시와 배척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린을 위해 끝까지 버티려고 노력을 하다가 끝에는 망가졌다.
달리 의지할 곳도 없었고, 다른 선택도 없었기에 벌어진 망가진 인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에린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은현이 깔아주고, 제시해주고 있는 길을 고를 수가 있다.

‘도망이라고 해도 좋아. 나는 내 방식대로 오빠의 명예를 되찾을 거야. 거기에 이 나라의 귀족의 지위 따위는 필요 없어.’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 반납하겠습니다. 왕비님께서 복위시켜주신 준남작의 작위도 돌려드릴게요.”

애초에 미성년자인 에린에게는 명예나 이름만 있는 허울뿐인 작위였다.
따로 금칠을 해두고 실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작위를 버리는 데에 있어서아무런 망설임이나 미련도 가지지 않았다.

“후후후.”

에린의 발언을 듣고 일리아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아냈다.
이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한 뒤에서야 입에서 손을 떼고 입을 연다.

“그렇다는데. 왕비님?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사람처럼 현금 보상으로 바꿔주는 게 어때?”

“…….”

디아네 왕비가 일리아나의 비아냥에 대답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며 에린을 노려보았다.
에린도 왕비의 시선을 받고 살짝 몸을 떨었지만, 아까처럼 몸이 위축되지는 않았다.

‘신기해. 현이 생각을 하고, 일리아나님이 옆에 있다는  의식하고 나니까, 몸의 떨림이 멎었어.’

최근에는 그토록 염원했던 엘빈까지 한 번 만나게 되면서 에린의 멘탈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이  원인 중 하나다.

“후후, 설마 아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 걸? 왕비가 인정을 했음에도 다른 귀족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라…. 이건 완전 왕비의 권위를 다른 귀족들이 우습게보고 있다는 뜻 아니니?”

“네? 아니. 저는 그렇게까지 말을 할 생각은….”

에린이 그렇게 말할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에린이 발언한 내용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왕비마마! 저희는 절대로….”

“입 다무세요!”

이빨을 꽉 깨물며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디아네 왕비의 손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17살의 나이 어린 소녀의 눈에 왕가의 권위가 그렇게 볼품이 없어보였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왕국에서 평민과 귀족 간의 신분의 차이는 명확하다.
평민이나 다름없는 준귀족의 신분, 게다가 성년도 차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귀족의 작위를 준다는 것에는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  맞는 공훈을 세우고, 무엇보다 왕비가 공인한 일인데, 그 결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의 태도가, 정치에 어두운 나이어린 소녀가 지적해올 정도로 알기 쉬웠다는 것이 왕비에게는 심히 불쾌했다.
결국 에린의 발언은 자신의 공훈과 작위를 인정하지 않는 귀족들을 비아냥댄 것과 동시에 개판인 이 나라의 왕가의 권위를 돌려 깐 것과 다름이 없다.

“저, 저는 그럴 의도로 말한  아니에요! 일리아니님!”

자신의 발언과 일리아나의 부채질로 궁정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자, 에린이화들짝 놀라며 일리아나에게 말했지만, 일리아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 그리고 나도 왕가에 한 가지 이야기 할게 있었는데.”

“……?”

“나 곧 페르닌 떠나. 실질적으로 마법도서관장 자리도 은퇴할 예정이야.”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째서…!”

 귀족이 뜬금없는 일리아나의 은퇴소식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나 곧 결혼하거든. 남편 따라서  곳도 이주할 생각이니까. 적어도 왕가에 미리 이야기는 해두는 게 맞으니까 얘기하는 거야.”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째서….”

“약속은 무슨 약속. 게다가 갑자기라니. 내가 페르닌에 와서 왕국의 요청을 받고 체류한지 15년도 넘었어.”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맡아오기도 했고, 이제는 은현과 함께 사적인마법 연구에 전념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일리아나는 꽤 오래전부터 이러한 준비를 조금씩 해오고 있었다.

“메르비스마법도서관도 왕국 안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다져놨고, 내가 없어도 당분간은 어느 정도 굴러가겠지. 지금의 메르비스라면 사이먼 그 영감이 맡아도 되겠지.”

메르비스의 공사가 시작될 때부터, 원래 마법도서관장의 자리는 궁정마법사단장인 사이먼의겸직으로 내정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일리아나에게 넘겨준 것이 15년 전, 당시의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현재의 왕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마녀님의 이주는 페르닌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부디 적어도 3년,아니 내년까지 만이라도….”

“야.”

다급하게 그녀를 설득하려던 귀족의 말을 끊고, 일리아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내가 왜 왕국의 상황을 신경써줘야 해?”

“그, 그것이….”

“알아.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까. 그동안 내 동의도 없이, 내 이름을 팔아서 ‘대영웅이 둘이나 있는 국가’,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라는 전력을 둘이나 보유한 강대국’이라는 점을 앞세워 재미 좀 많이   모르는 것도 아니야.”

“…….”

“마법도서관의 운영. 솔직히 싫지는 않았어. 나름대로 적당한 봉급과 마법지식을 마음껏 탐구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으니까. 페르닌에 체류를 요청 받았던 것도 리오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했던 일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것뿐이야.”

합당한 대가를 주고받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계약을 했을 뿐이다.
그 시간보다 은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해진 지금, 일리아나에게는 더 이상 메르비스의 업무와 페르닌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대놓고  남편을 무시하고 씹어대던 너희들에게 이득이 되는 꼴을 내가 언제까지고 계속 참아줄  알았어?”

“크…으.”

몇몇 귀족들이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신음을 참는 소리를 내뱉는다.
그들 대부분이 공개재판이나 궁정회의장에서 당시에 은현을 무시하거나 폭언을 내뱉었던 귀족들.
너무나도 안일하고, 짧은 생각으로 내뱉은 그때의 말들을 일리아나는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자신의 관심사 이외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 스스로의 호불호에 대한 경계가 굉장히 확고했다.
심지어 굉장히 뒤끝이 긴 편이다.

“솔직히 진짜로 이해가 안됐어. 도대체 왜 현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걔가 아무리 왕국의 중대사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고 활동을해왔다고 하더라도, 현이가 개입하면서 해결된 사건이 한 둘이 아닌데. 너희들 얼굴에 달려있는 눈과 귀는 도대체 어디에 쓰는 거야?”

일리아나의 질문은 분노나 경멸의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이나 슬픔 같은 감정도 아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궁금해 내뱉는 질문.

“페르닌의 귀족들을 습격한 악마를 잡은  현이의 제자인 에린이었지.”

처음으로 은현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사건을 언급한다.

“사령술사와 마수들을 토벌하는 원정에도 참전했고.”

일리아나는 그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원정에서 은현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펼쳤는지에 대해서는 리오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원정에 참여했던 아르티아 단원들도 은현에 대해서는 언제나 ‘단장의 친구’라는 입장보다, 한 명의 강력한 검사로서 그를 대우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전선에서 함께 싸워왔던 이들은은현의 무력을직접 경험하고 그를 존중 또는 존경하는 태도를 취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테이블 위에 앉아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는 궁정귀족들이다.

“게다가 약혼자인 우리 엘레노아까지 직접 되찾아오는 모습까지 보여줬는데.”

어째서 아직도 은현의 가치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지, 일리아나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으….”

귀족들 몇몇이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들은 그제 서야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은현이라는 존재는 별다른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고귀한 신분도 아니고, 뛰어난 무력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지위와 공적을 쌓는 성격도 아니기에 그의 능력이 왕국에 제대로 드러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 인식의 차이가 비틀려 있었음을 뒤늦게 자각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귀족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은현의 첫인상은 ‘마녀의 연인’, ‘마녀에게 빌붙은 기둥서방’ 등, 오로지 일리아나의 명성에 빌붙어 이권을 노리는 보잘것 없는 남자였다.
출세의 의욕도 없고, 겉보기에  볼일이 없는 남자가 무엇을 하든, 어떤 공적을 올리든, 그것이  대수겠냐고 생각했던 것이 큰 원인.
그렇기 때문에 일리아나가 그런  볼 일 없는 남자를 위해 페르닌을 떠나 이주할 생각 자체를가능성에 염두 해두지 않았다.

“후, 후작 어떻게든 마녀의 설득을….”

최후의 방법으로 일리아나의 친우였던 리오드에게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해봤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단호한 리오드의 의견에 설득을 요청한 귀족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올리비온 후작! 마녀의 이름이 대륙에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아시지 않소! 어째서 그렇게 간단히 포기를  수가 있는 것이오!”

“타인의 힘을 빌려서 이뤄낸 것의 가치는 그 타인이 사라지는 순간,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지는 법이지. 일리아나가 없으면 이 나라의 운영이 그렇게도 힘들어지는 건가?”

“후작은 기사단장이라는 직위만을 수행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국정의 운영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오! 지금 마녀가 이 나라를 떠나게 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손해들은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진다는 말이오!”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라는 전력을 둘이나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왕국에서 일리아나의 이탈은 그만큼 타격이 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꼴이 굉장히 우습군. 이 시점에서 책임을 묻는 건가?”

책임의 소지가 있다면 일리아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내세워 멋대로 국가사업을 벌인 귀족 측의 문제가 아닌가.

“크윽…후작!”

왕국를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응당 일리아나를 설득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리오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오드 또한, 일리아나 한 사람이 빠지는 것으로 경제적인 손실이 생겨나고, 그것이 왕국에 큰 피해를 끼친다면 그만큼 이 나라가 무능한 귀족들로 가득 찬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 아가의 이야기도 정리됐고, 내 쪽의 이야기도 전달이 끝났으니, 우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할게.”

아직 궁정회의가 모두 끝나지 않았음에도, 더 이상의 이야기는 쓸데없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리아나를 보고, 제라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누님은 어떻게 여기서도 저렇게 마이페이스를 지킬 수가 있으실까….”

주위의 분위기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저 무신경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생 마녀의저 행동에 맞춰 줘야하는 동반자가  은현에 대해 동정심이 살짝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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