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026. ‘엑스트라’는 ‘주인공’에게 ‘희망’을 제시한다(2)
거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여학생 못지않게 당당하게 자신에게 강압적인 말투로 명령을 하는 은현의 태도에 여학생은 인상을 찌푸렸다.
멀리 있을 때는 딱히 의식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 팔을 뻗기만 하면 바로 닿을 거리에서 여학생은 눈앞의 은현의 커다란 신장에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었지만 애써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은 은현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은현의 위압에 살짝 위축되어 주춤한 태도를 보였지만, 여학생은 시간이 지나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행색의 은현에게 어째서 겁을 먹었던 것인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었음에도 여학생이 행동을 하지 않자 은현은 한 번 더 그녀를 도발했다.
“혹시 키 차이 때문에 워터볼을 발현시켜도 내 얼굴에 가져다 댈 수 없어서 그런 건가? 그런 거라면 자.”
그렇게 말하며 은현이 또 한 번 비아냥대며 무릎을 구부려주었다.
여학생과 눈높이를 맞춰주자, 안 그래도 은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학생이 제대로 그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감히!”
에린에게 장난을 걸었을 때보다도 빠르게 똑같은 워터볼을 구현한 여학생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은현의 머리에 워터볼을 들이 밀었다.
“아!”
은현이 자신과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자 에린이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당장 은현에게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남은 두 여학생이 에린의 양 팔을 붙잡으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이거 놔!”
아까보다 더욱 거세게 저항하며 노려보는 에린의 행동이 아까 전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던 것과는 달라 보였기에 두 여학생들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했다.
두 여학생들은 그대로 팔에 힘을 주며 거칠게 뿌리치는 에린의 팔을 놓쳐버렸다.
구속에서 자유를 찾은 에린이 다급하게 은현을 도우려했지만 의외의 상황에 에린은 행동을 멈추고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것은 마법을 발현시킨 여학생 또한 마찬가였다.
은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었고 여학생의 손 위에 있는 워터볼 속에 잠겨있는 은현의 얼굴은 평온함 자체였다.
마치 물속에 잠수하고 있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
애초에 숨만 참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양팔을 붙잡히고 거칠게 숨을 내쉬며 패닉상태에 빠졌던 에린이 은현처럼 간단하고 냉정하게 ‘숨을 참는다.’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워터볼 속에서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현이 이내 눈을 뜨고는 손가락 너머에 마법을 발현시킨 여학생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는 싱긋 웃어보였다.
이내 덥석 여학생의 목을 한손으로 붙잡고는 간단히 들어올렸다.
“카…학!”
은현에게 목을 붙잡혀 들어 올려 진 여학생은 더 이상 마법의 유지를 할 수 없게 되어 아까 전의 에린처럼 은현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물의 장막이 깨져 담겨져 있던 물이 그대로 은현의 몸을 적셨다.
은현이 가녀리고 앏은 목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자, 여학생의 기도가 압박당하여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하고 헉헉대고 있었다.
여학생의 가녀린 양팔이 힘없이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은현의 팔을 때렸고 괴로움에 양다리가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사람은 말이지 이렇게 기도를 압박당하면 호흡을 못하게 되고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죽어.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비슷하게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데. 부디 내 호의를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네.”
“커흐흑!”
“그, 그만둬!”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여학생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은현을 말리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다가왔다.
은현의 팔을 붙잡으며 억지로 손을 떼어내고는 자신들의 우두머리의 여학생을 구해내려고 했지만 두 여학생이 은현의 팔에 매달렸음에도 은현의 팔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뭐가 이렇게 단단해?!”
오히려 은현의 팔을 억지로 내리도록 만들려는 과정에서 돌덩이 마냥 미동도 않는 은현의 팔에 두 여학생이 경악할 지경이었다.
“왜 그래?”
“뭐?”
“이건 너희들이 말하는 ‘사교 활동’이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잘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왜 말리려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을 본 두 여학생은 은현이 다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현은 지금 아까 전까지 에린을 괴롭히고 있었던 상황을 마법이 아닌 자신의 무력으로 재현하고는 저런 말을 지껄임으로써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다른 이도 아니고 귀족 영애를 이런 식으로 위협하다니, 대담하다 못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행위를 대놓고 저지를 생각을 하다니, 어떻게 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살…려…줘….”
은현의 손으로 목이 졸려 기도를 압박당하고 있는 우두머리 여학생은 어느새 눈에 흰자위를 드러내며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힘겹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입에서 게거품을 흘리고 있는 여학생의 상태는 다른 누가 봐도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만….”
에린은 안정된 호흡을 되찾자마자 힘겹게 입을 열고는 작게 중얼거렸지만, 은현은 흘끗거리며 에린을 바라보았다.
다른 여학생들은 아직도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해!”
에린이 다시 한 번 목청을 높여 크게 소리를 치자 그제야 손의 힘을 풀어 우두머리 여학생을 놓아주었다.
“커헉! 콜록! 콜록!”
손을 놓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진 여학생이 간신히 호흡을 되찾으며 거칠게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몸이 몇 차례 들썩이며 기침을 토하는 여학생의 상태를 살피던 두 여학생이 질린 시선으로 은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이러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왜? 저 여자 부모한테라도 일러바치게?”
“하! 이 사실이 알려지면 너는 물론이고 너희 집안이나 너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끝이야!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재밌네. 일러봐.”
“뭐…?”
오히려 그것을 권장하는 은현의 태도에 우두머리 여학생을 부축하던 여학생이 도리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이 남자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정말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야할 거야. 너희가 이 아이한테 하고 있던 짓도 전부. 공작가가 비호하기로 한 아이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작가에서도 무슨 반응을 할지 아주 궁금하네.”
“읏…!”
여학생은 말문이 막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자신들이 에린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대외적으로 이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나야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여학생은 간신히 짜낸 반박을 입에 담았다.
“귀족 영애를 죽일 뻔한 건 경우가 틀려.”
“사교모임 활동이었다니깐.”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끝까지 그 주장을 고수하는 은현의 태도는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안 죽였잖아.”
“하?”
“너희도 이 아이를 안 죽였고.”
‘그러니까 살려준 거야.’라는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은현의 말을 들은 여학생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즉 만약 거기서 은현이 제지 않고 선을 넘었고 혹시라도 에린의 죽음이라는 결말로 이어졌다면 정말로 귀족 영애를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었다.
“미친 새끼….”
“귀족가의 아가씨라기엔 너무 거친 말이네.”
끝까지 은현은 여학생에 대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화만 돋우게 되는 것에 여학생은 이를 갈았고, 또 다른 여학생 또한 기가 질린 표정으로 진심을 담은 욕설을 입에 담고는 우두머리 여학생을 부축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
뒤뜰에는 은현과 에린,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에린은 은현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고개를 떨구고 침묵하고 있었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던 것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 졌다.
이것은 놀람, 수치심, 자존감의 하락 등 다양한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상냥했던 은현의 사나운 부분의 일부를 목격한 것에 대한 낯섬과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만약 자신이 말리지 않았다면 은현은 정말로 그 여학생의 목을 졸라 죽일 생각이었을까?
에린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은현을 대해야할지 몰라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혼자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자신의 어깨를 덮는 무언가를 느끼며 에린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꺼냈는지 은현이 검은색 코트 하나를 양 손에 쥐고는 에린의 어깨에 걸쳐준 다음 단추를 잠가주고 있었다.
“아….”
에린은 그제야 물에 빠진 생쥐마냥 홀딱 젖어 새하얀 셔츠 너머로 자신의 속살과 속옷이 보이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내, 내가 할게!”
에린은 몸을 숙여 코트의 단추를 잠가주는 은현과 황급히 거리를 벌렸고 스스로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코트를 입었다.
은현은 거리를 벌리고는 허둥대는 에린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
에린은 아까 전 자신을 괴롭혔던 여학생들에게 지었던 조롱과 멸시가 담긴 비웃음이 아닌 순수한 웃음을 짓는 은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르다.’
무언가 다르고 오늘 보여준 은현의 모습은 굉장히 무섭고 낯설었지만, 지금 자신을 보고 웃음을 지어주는 은현은 평소대로의 은현이라는 것에 에린은 왠지 모를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고, 고마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린은 은현의 눈치를 보다가 그제야 여학생들에게서 자신을 구해줬던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전했다.
“사실은 그냥 지켜볼 생각이었어.”
“응….”
“근데 그냥 더는 그런 꼴 보기 싫더라.”
“응….”
에린은 은현의 말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혼자 해보겠다고, 버텨보겠다고, 계속 학교를 다녀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을 들켰다는 것에 안 그래도 바닥을 치던 자존감이 더 곤두박질을 치는 기분이었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응?”
에린은 상냥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은현의 손길을 느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쓰레기 같은 건 이 세상이지.”
에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은현의 말을 멍하니 들었다.
“엘빈을 다시 보고 싶지?”
“…응.”
에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하고 싶은 말도 있지?”
“응.”
“이제 괜찮다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
“응.”
에린은 재차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것은 에린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책감과도 같다.
자신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저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만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오빠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오빠한테만 의존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이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에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다.
안 좋은 생각은 안 좋은 상황을 유발하고, 그 안 좋은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며 또 안 좋은 생각을 만들어내 또 다른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나 마찬가지.
은현은 에린이 스스로 이 고리를 끊어내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이미 자존감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연약한 소녀는 그럴 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현은 처음으로 ‘에린’이란 ‘주인공’에게 개입한 것이다.
지금 소녀에게는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었다.
엘빈과도 같은 버팀목이 필요했기에, 은현은 입을 열었다.
“널 키워줄게.”
“에…?”
“엄청 힘들 거야. 배는 고프고, 춥고, 피곤하고, 몸이 엄청 아플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한심한 네 자신을 바꿀 마음이 강하게 남아있다면.”
에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은현을 응시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날 믿고 따라와. 너에게 내가 길을 만들어 줄게.”
“아….”
은현은 웃고 있었다.
꼴사나운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경멸이 아닌, 괜찮다는 상냥한 미소.
그 미소를 본 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자신을 무시했고,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건 내지 않았다.
건 내기는커녕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조롱할 뿐, 모두가 ‘너는 이 세상에서 필요 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틀렸다고, 자기 자신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만은 아직 늦지 않았다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해준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고마운 말이 아닌가.
에린은 눈물을 글썽이고는 눈을 뜨고 2주 만에, 처음으로 기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베르단디는 기쁜 얼굴로 은현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에린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기특한 사도의 기특한 행동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현의 이 행동이 소녀에게 어떤 성장과 변화를 가져올지 걱정을 하면서도 그보다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오늘도 ‘엑스트라’는 ‘주인공’에게 ‘희망’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