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008. 신목(神木)의 유령(1) (8/730)



〈 8화 〉008. 신목(神木)의 유령(1)

은현이 ‘마녀의 연인’이 되었지만 두 사람의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평소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리아나는 현재, 맡고 있는 왕립 마법도서관의 공적인 업무를 제외하면 타인과 사적인 만남을 가지는 일도 극히 드물었으며, 집에서도 20년 간 어떻게 살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개차반의 의식주 생활은 은현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녀의 조수’라는 공적인 직함과 함께 일리아나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처리하는 것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되살아났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할지 의미를 잃고 방황하던 은현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지금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좋은 동기가 되고 있었다.

“현아. 일 하나만 맡아줘.”

연인이 되면서, 은현의 비밀의 일부를 알게  일리아나는 일부나마 그의 속마음과 심정을 읽을 수 있었고, 방황하고 있는 그를 걱정했기에 은현에게 일을 시키기로 마음을 먹은 결과였다.

“…일?”

최근에는 왕국 측에서 대영웅인 ‘검은 마녀’에게 비밀리에 요청해 오는 일들을 그녀 대신 조수라는 직함을 이용해 은현이 처리해주곤 하고 있었다.
단지 최근, 이 2주 동안 끝이 보이지 않았던 마법도서관의 서적 정리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일을 맡기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묘한 일이 하나 생겼거든.”

“흐음, 그래? 또 무슨 일이 생긴 건데?”

은현은 팔짱을 끼며 계속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한 귀족 영애 하나가 실종됐어.”

“단순히 실종 하나로 네가 나한테 일을 시키진 않겠지?”

일리아나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는 은현을 보며 이마를 짚으며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실종된 여학생이 조금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더라고.”

“흐음.”

“2주 전에 있었던 헤르샤 준남작 횡령 사건 기억해?”

은현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니아스 왕국 수도, 페르닌에서 있었던 한 공무원의 대규모의 배임, 횡령 혐의가 걸렸던 사건이었다.
일개 공무원하나가 왕국 예산의 회계 장부를 조작해 약 3년간 국가예산의 일부를 가까이 빼돌렸다.
이후 헤르샤 준남작, ‘레니온 헤르샤’는 처형을 당했다.
집안의 남매 중 오빠인 ‘엘빈 헤르샤’는 아버지가 은닉한 금화를 가지고 도주하여 기사단의 추적을 받는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은현은 여동생인 ‘에린 헤르샤’는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오빠는 도주했기 때문에 홀로 남겨졌다고 소문이 났던 것을 기억해냈다.

“알기야 알지. 꽤 시끄럽지 않나? 귀족도 아니고 준귀족인 말단 공무원이 거금의 금화들을 빼돌렸다는 것 때문에.”

국가의 예산을 그대로 갈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것은 국가의 재정 상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왕국의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될 터였다.
귀족도 아닌 그저 행정처리만을 담당하는 허울뿐인 귀족인 말단 공무원이 국가예산의 일부를 빼돌리는 간  작업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은현은 아마 더 상위 귀족에 해당하는 윗선의 수작질의 결과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다.
설령 정말로 그 준귀족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그런 미친 짓을 감행했다면 그는 대단한 배짱을 가지고 윗선을 구워삶는 훌륭한 수완가가 아닐까.

“실종된 여학생이 그 준귀족의 딸이야.”

“흐음.”

이 사건 얘기를 꺼낼 때부터 대강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랄까.
은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나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종이 됐는데?”

“3일 전, 갑자기 행적을 감췄어. 쥐도 새도 모르게.”

은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일리아나에게 말했다.

“지금 그런  묻고 있는  아니잖아.”

일리아나는 은현의 눈초리를 받으며 쓰게 웃었다.

“미안해. 그런데 정말로 단서가 없어.  아이를 본 목격자도, 정황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거든.”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은현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공적인 면에서 일리아나가 말도  되는 소리로 자신에게 장난을 칠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이 정도 단서만 가지고 사람을 찾아야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겨우 이정도 정보가지고 사람을 찾으라는 비양심적인 명령은 일리아나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은현은 조용히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대신 이상한 소문 하나는 건졌지.”

“소문?”

“아이테르의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여학생이 있다는 소문.”

“아이테르면  나라의 학교?”

“응.”

아이테르 왕립학교는 정확히는 나라의 핵심인물인 귀족들과 왕가, 대부호의 기부금과 국가 예산으로 귀족가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다.
입학의 조건은 일정량의 기부금을 낸 대부호나, 왕국의 귀족가의 자제들, 타국의 귀족가의 자제들까지 유학생으로 오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들었다.

“실종된 에린 헤르샤라는 여학생도 아이테르의 학생인가?”

“맞아. 일단은 아버지가 준남작의 신분이었으니까.”

페르니아스 왕국에 ‘준남작’이라는 신분은 귀족은 아니되, 귀족의 대우를 받는 평민들에게 수여하는 작위이며.
준남작의 작위를 받은 대부분은 왕가의 궁정에서 근무하게 된다.
레니온 헤르샤의 직업은 국가에 종속된 군대의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인사계 공무원이었다.
동시에 그가 회계정보를 조작하여 대량의 금화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일단 ‘준남작’의 신분도 엄연히 작위를 부여받은 귀족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오빠인 엘빈 헤르샤나 동생인 에린 헤르샤가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현은 그보다도 학교의 건물 옥상에서 여학생이 투신자살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조용하다고?”

아이테르는 이 나라, 페르니아스 왕국의 주인인 왕가와 귀족, 대부호의 기부금 및 예산으로 운영되는 왕립학교다.
왕국과 지역령을 이끌어갈 귀족들의 자제들의 예법, 문화와 역사, 마법과 검술 등 다양한 것을 가르치는 왕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그만큼 학교의 명예를 중시하는 곳인데, 그곳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학생이 나왔음에도 학교가 조용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은현은 일리아나의 의도를 이해했다.

“실종자인 에린 헤르샤에 대한 단서는 전혀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쪽을 조사해보라는 거지?”

일리아나는 두 사건이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와 관계된  가지의 기묘한 사건은 겉으로 보기엔 연관성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두 사건에 대한 소문이 동시에 터진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정답.”

일리아나는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맞춘 은현을 보며 칭찬의 박수 세례를 보냈다.

“그 투신자살 소문은 어떻게 난건데?”

“아, 그건 목격자가 있어.”

“목격자? 학생이 투신하는 걸 목격했다고?”

일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이 투신하는 걸 목격했다면 그 학생이 에린 헤르샤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있지 않나?”

“그게 말이지. 좀 이상하거든.  이렇게 됐으니 본인에게 직접 들어보자.”

“본인?”

똑똑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타이밍 좋네. 들어오라고 해.”

일리아나는 경쾌하게 울리는 노크소리를 들으며 입실을 허가했다.

“이쪽입니다.”

사서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한 소녀가 머뭇거리며 일리아나의 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리아나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소녀는 잔뜩 위축된 표정이었다.

“아…안녕하세요.”

“응. 안녕. 자리에 앉으렴.”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소녀는 일리아나의 미소를 보고는 순간 마음을 빼앗긴 것 마냥 얼굴을 붉혔다.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소녀가 소파에 앉았다.

“홍차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은현은 소녀가 관장실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일리아나의 조수’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재빠르게 홍차를 끓이고 소녀에게 건 냄으로써 긴장을 좀 풀어주도록 의도한 바였다.

“후우…….”

일리아나는 중앙의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소녀에게 물었다.

“이니스 말레누. 맞지? 한 밤중에 학교에서 투신자살을 한 여학생을 목격했다는 학생.”

“네…….”

여학생은 일리아나를 보며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하는 ‘검은 마녀’를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긴장할 법도 하다고 은현은 생각했다.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을까?”

“저, 정말로 믿어 주시는 건가요?”

“일단은 들어보고 판단해야지. 그걸 위해서 너를 부른 거란다.”

이니스는 일리아나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말 깜깜한 밤이었어요. 저는 찾아야할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몰래 학교에 잠입해야만 했거든요. 어떻게 담을 넘어서 학교에 들어갔고 혼자서 그 어두운 복도를 걸을 땐 너무 으스스한 기분까지 들었어요. 긴 복도를 걸어 목적지인 강의실 앞에 도착했고 저는 곧장 문을 열어 강의실 안에 들어갔어요.”

강의실 안으로 들어간 이니스는 창가 쪽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어두운  밤중에 혼자서 몰래 학교에 들어온 행동과 으스스한 분위기에 더욱 긴장하여 식은땀이 났다.
이니스는 땀을 식히기 위해서 바람을 조금 쐬고 싶어졌기 때문에 물건을 찾는 것을 잠깐 멈추고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고 찬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식히고 있던 와중에.
무언가가 이니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지면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과 함께 산발이 된 여자의 머리카락이 이니스의 얼굴을 간질였다.
정말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이었다.
추락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을 쳐다봤다.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이니스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보게 된 순간.

씨익.

여자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정확히 이니스를 보며 웃었다.
이니스는 자신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추락하는 여자를 보고 알 수 없는 소름을 느꼈다.
겁을 집어 먹으며 잔뜩 놀란 이니스는 창가 쪽에서 떨어지며 주저앉았다.
정신을 추스른  다시 창가 쪽으로 향해서 지면으로 추락하여 머리가 깨져있을 여자의 시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아래에는 여자의 모습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환각을 본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각이라기엔 자신의 얼굴을 간질인 여자의 머리카락에 대한 감촉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그녀는 찾아야하는 물건도 잊어버린 채로 헐레벌떡 학교를 뛰쳐나왔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침이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퀭한 눈과 피로감, 지워지지 않은 공포감을 이끌고 학교에 등교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인 학교의 모습에 이니스는 영문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직 자신만이 어젯밤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후 친구와, 교수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기사단을 찾아가 호소했지만 기사단 또한 그녀의 목격담을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헤르샤 준남작 일가의 사건과 여러 일로 기사단의 인력들 또한 매우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몇 일 뒤, 이니스는 에린 헤르샤라는 소녀가 학교에 나오지도 않고 있고, 아예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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