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0)

01

후.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샜다. 작은 입술이 입 안으로 말려들어 간 탓에 하얗고 가지런한 앞니가 살짝 드러났다. 아랫입술을 잠시 질겅이던 해율은 이내 숨을 작게 삼키고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암전시켰다.

‘이번 달도 빡빡하네.’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은행 앱에 뜬 잔액이 그 크기를 저절로 불릴 리가 없었다. 어제 봤던 숫자가 오늘 더 줄어 있다면 모를까. 잔액은 아무리 봐도 그 숫자 그대로였다.

해율은 복잡한 머리로 단순한 셈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통장에 든 잔액은 97만 5천 3백 원.

이번 달 월세는 65만 원.

식비는 대충 10만 원 안쪽에서 해결할 수 있다. 그래, 여기까지는 얼추 계산 안에 들어왔다.

하지만 가스비와 전기세는 어쩔 것인가. 남들이 들으면 코로 웃을 금액이라 하더라도 해율에게는 만 원 단위의 금액조차 쉬이 볼 액수가 아니었다.

그나마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게 다행인 일이었다. 그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최상위권의 대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막막함에 숨이 턱 막혀 와서 가슴을 탁탁 쳤다. 설상가상으로 빚까지 떠안고 있는 터라, 마치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막막함을 매달 느끼고 있었다. 이자까지 꼬박꼬박 갚아 나가고 있었지만, 합법적인 루트로 이용한 대출이 아니었기에 이자는 한없이 불어났다. 원금까지는 까마득했다. 이자가 터무니없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성실히 갚고 있기 때문인지 다행히 업자들이 독촉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매달 갚아야 하는 돈임은 분명했다.

해율은 가지런한 생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아무래도 식비를 좀 더 줄여야겠다. 값이 싸고 양이 많은 학생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는 하던 그녀였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조차도 요원했다.

아무래도 아르바이트를 좀 더 늘려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떠오른 이번 학기 시간표는 그녀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조 모임만 벌써 세 개였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는 게 시간 대비 버는 돈으로 따지면 더 효율적일 테지만, 전액 등록금을 받고자 대학교를 하향해서 지원한 탓에 해율이 그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한번 한 학생을 맡으면 부모님도 만족할 정도로 성적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해율의 단정하고 곱다란 외모를 보며 첫인상으로는 일단 믿음직스럽다고 하는 학부모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어떤 학부모들에게는 과외를 시키는 목표가 단순히 성적을 올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국내 제일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 과외 선생을 두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리 과외를 늘리고 싶다고 해도 해율이 맡을 수 있는 건 한 학기에 한두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해율이 다니는 대학교는 국내 중상위권에 드는 학교이긴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교가 아닌 이상 학부모들의 선택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받는 아르바이트 액수만으로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빠듯했다.

빚만 아니었더라면 좀 더 여유로웠을까. 아니. 해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조차 미련스러웠다. 빚은 이모를 살리는 데 필요한 돈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남기고 간 빚은 이모가 악착같이 일해서 겨우 갚아 나가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고작 중학생이었다. 미성년자인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뿐인 혈육인 이모밖에 없었고, 심성이 착하고 몸이 여린 이모는 하루에 잠자는 시간만 빼고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이모에게 있어서도 해율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 고단함이 이모를 좀먹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에 자신을 맡아 키워 준 이모는 신장에 병까지 얻었다. 병명은 이식이 필요한 말기 신부전이었다.

해율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간간이 하며 살림에 보태려 했지만, 이모는 공부에 집중하라며 해율을 말렸다. 이모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율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기치 못한 병으로 얻은 빚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시원으로 다시 들어갈까.’

거기까지 생각한 해율은 이내 속으로 도리질을 치며 그 생각을 접었다.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 빠듯하던 새내기 시절, 멋모르고 고시원에 들어갔다가 괜히 불쾌한 기억만 갖게 되었다. 싼 가격에 혹해 낡은 고시원에 덜컥 들어갔지만, 그 고시원은 공간이 제대로 나뉘어 있지 않아 부엌은 남녀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을 향해 끈적한 시선을 보내오는 남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익숙했다. 하지만 냉장고에 넣어 둔 반찬의 양이 조금씩 줄어 가던 것이 그 고시원에 살던 어떤 남학생의 짓이라는 것을 안 해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고시원 주인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였다. 신고를 할까도 싶었지만, 괜히 소란을 일으켜 고시원 영업에 피해를 주느니 그냥 자신이 그곳에서 나오기로 했다.

이후에 겨우 얻은 낡은 빌라 원룸은 한겨울에 동파가 되고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덥다는 것 외에는 그럭저럭 살아갈 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와 가깝다는 게 좋았다. 비록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어서 집 앞이 후미지고 으슥한 골목인 게 흠이긴 했지만 말이다.

‘과외를 하나 더 늘려야겠다.’

빚을 전부 갚기까지 머지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봉이 높지는 않더라도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한다면 지금의 이러한 고생도 전부 옛말처럼 느껴질 날이 올지 몰랐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해율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기해율!”

그녀를 부르는 활기찬 목소리에 해율이 고개를 돌렸다.

“진형 선배.”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오는 이는 해율의 과 선배인 김진형이었다. 그는 털털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듯 이가 보이도록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야, 여기서 멍때리고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었어?”

“아, 아뇨, 그냥. 별거 아니에요. 선배는 오늘 어쩐 일로 왔어요?”

진형은 막학기 재학 중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기로 이번 학기도 수업 하나만 듣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취준생에게서 볼 수 있는 초조함은 그에게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진형은 해율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 이미 그를 위해 안배된 찬란한 미래가 그가 사회에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는 다른 취준생들처럼 자소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거나 바쁘게 면접을 보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응, 교수님 좀 뵈러 왔지. 인사드리려고. 너는, 수업 가?”

“네.”

“이번 학기도 여전히 바쁘겠네.”

“안 그런 학기가 있었나요. 선배가 심하게 한가로이 다닌 거죠.”

해율의 덤덤한 대답에 진형이 돌연 웃음을 삼키듯 큭,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해율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넌 정말 여전하다 싶어서. 툭툭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은근히 맞받아치는 게, 참.”

“그런가요.”

해율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카락 몇 가닥 끝을 손가락으로 말았다. 그러자 진형이 다시금 씩 하고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게 네 매력이지. 뭐, 그런 면 때문에 너한테 쉽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말이야. 너 한창 새내기일 때 너랑 말 한번 섞으려고 안절부절못하던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와, 기해율 너랑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 네가 이 고충을 아냐? 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말은 그렇게 했어도 해율의 얼굴에 언뜻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장난스레 우는 시늉을 한 진형이 금세 무슨 말을 했냐는 듯 머리를 휙 쓸어 넘겼다.

“농담이다, 농담. 네가 이런 냉기 넘치는 성격 아니었으면 아마 학교에서 피바람이 불었을 거다. 그리고 네가 조금만 더 화려하게 꾸미고 다녔다고 해도 말이야.”

진형은 약간의 쓴웃음을 머금었다.

해율이 잠시 눈을 내려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단출한 차림이긴 해도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신의 빈한한 사정이 묻어 나오는 행색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작 문제는 이것이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차림이라는 데에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딱히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옷이란 건 그저 몸을 가리고 추위를 피하려고 입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옷차림새조차 그녀의 탐스러운 몸매를 가리지 못했다. 풍만하면서도 가녀린 해율의 몸 선은 어떤 옷을 입어도 뭇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것을 해율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진형은 굳이 그것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해율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진형은 해율이 그나마 대학교 안에서 마음을 열고 대하는 유일한 지인이었다.

“요새는 좀 어때?”

진형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해율의 사정을 멋대로 동정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해율은 굳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된 말로 꾸미는 데에 특출나지 않았기에 그저 단조롭게 대답할 뿐이었다.

“뭐, 똑같아요. 학교 다니고, 과외하고. 그냥 그러고 살아요.”

“그렇구나.”

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요? 회사 업무 배운다고 바쁘지 않아요?”

“야, 죽겠다. 우리 아버지는 이때만 기다린 것 같더라. 아주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사람 숨통을 꽉 조이는 게 프로야, 프로. 밑에 직원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제야 알겠더라.”

진형이 자신의 목을 장난스레 조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 과장된 몸짓에 해율이 입을 가리며 작게 후후, 하고 웃었다. 그러자 보조개가 옅게 패면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확 피어나듯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안개 속 실루엣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진형은 같이 웃음을 터트리다 그녀에게 맞춰 걸음을 옮기며 말을 얹었다.

“그리고 어차피 너 한번 만나러 오려고 했었어.”

“저요? 왜요?”

“음, 그게 말이야.”

진형이 드물게 말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러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해율이 너, 독일어 꽤 잘하지?”

“독일어요? 그냥……. 간단한 일상 회화 정도는요.”

“어이구, 겸손은. 너 저번에 교수님 부탁으로 독일 대학이랑 했던 교류회에서 통역도 맡았었잖아.”

“그건 교수님이 간단한 인사만 옆에서 도와 달라고 하셔서요. 어려운 얘기는 별로 없어서 괜찮았어요.”

“기해율 너 진짜. 그래, 머리 좋은 것도 아무렇지 않게 으스대면 짜증 나. 근데 넌 좀 으스댈 필요가 있어. 유학도 한번 안 갔다 온 애가 그 정도인데. 유학 업체들 다 망해야지.”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해율이 옅게 웃으며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독일 출신 문학가들의 소설책을 즐겨 읽었다. 그 나이대가 소화하기 어려운 책들이었지만, 다행히 훌륭한 도서가 잘 갖춰져 있던 학교 도서관에서 짬짬이 빌려 읽었던 해율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어학 쪽에도 흥미를 키우게 된 해율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독일어를 독학했다. 나중에는 출판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버거운 그녀에게는 한 치 앞길도 어둠 같았다. 하물며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드넓게 펼쳐진 미래는 그저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래서 말인데, 해율아.”

“네?”

“너 독일어 과외 안 해 볼래?”

“과……외, 요?”

진형의 말에 해율이 커다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새까만 동공 위로 빼곡한 속눈썹이 춤추듯 나부꼈다.

“응. 사실 내가 예전부터 알던 지인인데, 대학생이고 나이는 너랑 같아. 개인적으로 독일에 관심이 생겨서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고.”

아.

해율이 입을 살짝 벌렸다.

진형의 오래된 지인이라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을 그쪽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쪽 사람이라 함은, 그와 비슷하게 부유하고 가진 것 많고 모자람이 없는 사람.

“대학생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생길 일이 뭐가 있다고.”

툭 던지는 말에 진형이 멋쩍게 웃었다.

“그놈 집에서 사업을 크게 하거든. 방산 쪽이긴 한데, 재단도 갖고 있어. 뭐, 아무래도 집안에서 이런저런 해외 사업에 발을 내밀다 보니까, 독일 쪽에 눈을 돌린 모양이야. 그 겸사겸사 이놈도 독일어를 배우려고 하는 거고.”

사족처럼 덧붙여진 진형의 말에 해율은 걸음을 이어 가며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런 사람이 전공자도 아니고 유학파도 아닌 저한테 굳이 과외를 배울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차라리 전문 강사를 고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현실적으로 그게 맞았다. 하지만 진형은 잠시 으음, 하고 말을 고르더니 걸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사실은 내가 널 추천했어.”

“네?”

해율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로 반문했다.

“네가 하는 말이 맞아. 제대로 배우려면 그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 그런데 내가 널 추천했어.”

“왜요?”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진형이 쓰게 웃었다. 해율은 아, 하고 목구멍을 울렸다.

진형은 그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어떤 의도로 이러한 선의를 베푸는지 해율은 단박에 알아챘다.

“쓸데없는 참견이세요.”

쌀쌀맞게 대꾸하는 해율을 향해 진형이 말을 고르면서 턱을 쓸다가, 이내 다시금 장난스러운 어투로 돌아가 툭툭 치듯이 이죽거렸다.

“에이, 선배가 쓸데없는 참견 좀 부리면 안 되냐? 너 독일어 잘하니까 내가 괜히 오지랖 좀 부려 봤다. 이미 말은 다 해 뒀단 말이야. 내 얼굴 봐서 가 주라, 응? 본격적인 비즈니스 독일어는 아니고 기본만 배우면 된다더라고.”

“선배.”

후우.

해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진형은 해율을 편견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그녀의 호감을 사려 무작정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딱 좋은 선배, 그 자리에서 해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넉살 좋게 그녀를 대했다. 그래서 해율은 자신의 사정을 배려한 그의 행동에 그다지 창피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까지 하는 진형의 행동에 조금 멋쩍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해율은 사실 절박했다.

당장 먹고살 돈이 부족했다. 이는 생계와 직결되는 일이었다. 수중에 돈이 없는 현재로서, 사실상 그녀가 이것저것 따질 처지는 되지 않았다. 해율은 선선히 눈동자를 들어 진형을 응시했다. 진형이 잠시 움찔하는 듯했으나 이내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걸치고는 시선을 마주했다.

해율이 달싹이던 입을 열었다.

“……그 과외, 얼마예요?”

* * *

“음. 주소가, 삼성동…….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해율이 휴대폰과 주위를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높다란 콘크리트 담장이 길게 뻗어 둥글게 감싸고 있는 이 단독 주택은 정문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새까만 출입문 앞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玄’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옆엔 그보다 더 작은 글씨의 도로명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러니 찾을 수가 있나.’

가쁜 숨을 한 차례 내쉰 해율은 고개를 들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내부 정원에서 자라난 듯한 커다란 소나무가 그 푸르른 잎을 콘크리트 담벼락 밖으로 빼꼼히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저 풍성함과 나무 높이를 보아하니 정원의 크기가 얼마나 널따란지 퍽 가늠이 갔다.

심상한 눈빛을 곧 내린 해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여느 아침 드라마의 재벌가 주택처럼 우렁찬 고함과 같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제 귀에도 들릴 정도로 작게 띵동- 하고 청량한 음만 날 뿐이었다.

‘……아무도 없나?’

설마.

저녁 8시. 진형이 얘기한 시간은 지금이 맞았다. 날짜도 착각한 것 없었다.

그때, 과외 제안에 흥미를 느낀 해율의 물음에 진형은 화색을 숨기지 않으며 이것저것 과외 조건과 약속 장소 및 시간 등을 얘기해 주었다. 해율은 과외 조건을 듣고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그마치 과외비가 300만 원이었다. 그것도 단 10회에. 회당으로 치면 30만 원인 셈이었다.

진형이 사는 세계의 사람들이 돈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라고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해율에게 300만 원은 넉 달 치 월세를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저도 모르게 진형의 말을 귀담아 듣던 해율은 어느새 그가 건네주는 연락처와 첫 번째 수업 시간 날짜를 휴대폰 캘린더 앱에 받아 적고 있었다.

장소는 카페가 아닌 과외 받는 사람의 자택이라고 했다. 해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형이 먼저 그 사유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놈이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데를 질색한다면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수업받고 싶다고 했다고 말이다. 해율은 그저 그렇냐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형은 해율이 혹여나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집에 홀로 들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까 싶어 계속해서 안심을 시켰다.

해율은 괜찮다고 옅게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한다.

해율은 선배가 소개해 준 사람이니 믿는다고 말했다. 진형이 약간 쑥스럽다는 듯 다시금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신변의 안전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은 자신이 주소를 잘못 찾은 것 같다는 불안함이 먼저였다.

해율이 다시금 초인종을 누르려 손가락을 가져갔을 때였다. 돌연 벽에 붙어 있는 인터폰의 빛이 환하게 켜졌다. 해율이 깜짝 놀라 카메라로 눈을 돌렸다.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해율은 꼭 사람 눈처럼 생긴 새까만 카메라 렌즈를 빤히 응시했다.

그 순간, 철컹.

새까맣고 커다란 대문이 열렸다. 해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

전문가의 솜씨로 정갈하게 깎인 돌계단을 오르며, 해율은 속으로 감탄을 내질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이었다.

모던한 느낌을 살려 새로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았다. 디자인 자체는 세련되기 그지없었지만, 정원 곳곳에 그 깊은 세월과 역사가 묻어나는 뿌리 굵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라나 있었다.

정원 한편에는 또르르 물방울이 굴러가는 소리가 울리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 저택 자체는 정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야 했다.

‘역시 진형 선배 지인이구나.’

순간 진형이 말했던 이 집안에 대한 말이 떠올랐다. 국내외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무슨 재단까지 운영한다던……. 그러니 이런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 만도 하다.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마치 다른 차원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해율은 아름다운 정원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진형의 말로는 과외를 받는 학생이 해율과 동갑이라고 했다. 독일어 공부를 시작하기에 어리다면 어리고, 또 늦다면 늦은 나이였다. 아마 가볍게 취미로 시작하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해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2층 저택의 창문을 통해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외출할 때는 꼭 조명이 꺼져 있는지 확인하고 나가는 버릇이 있는 해율은 전기세 걱정 없이 집 안 곳곳에 인테리어 용도로 조명을 밝히는 이곳에 있는 것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이런 데에 살면 어떤 느낌일까.

괜히 허황한 생각도 해 보았다. 하루하루 전기세와 가스비를 걱정하고, 당장 오늘의 끼니를 때우는 데에 급급한 해율에겐 이런 곳에 기거하는 일 따위,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자유로운 미래보다 훨씬 더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신발 아래로 닿는 돌의 감촉마저 어색하게 느껴졌다.

열려 있는 현관문에 들어서며 신발을 벗고 손님용으로 보이는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내 커다란 내부가 시야에 훤히 드러났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해율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게 아니라 집주인인, 과외를 받기로 한 사람을 먼저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굵직하고 나긋한 저음이 귓가에 들렸다.

해율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고개를 올려다볼 정도로 키가 크고, 넓은 어깨를 가진 한 남자가.

그리고 해율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뵙겠습니다.”

눈앞의 남자는 해율이 알고 있는 남자였다.

“현우경이라고 합니다.”

현우경.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인, 현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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