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뭐야. 여기 내 자린데.”
툭 던지듯 내뱉는 심드렁한 말에 고개를 들자, 강렬한 햇빛 아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각진 굴곡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서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미간을 좁히며 가느다랗게 떴다.
“학교 안에 내 자리 네 자리가 어디 있어?”
무심하게 맞받아치자 똑바로 선 남자애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
다시금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재차 물음을 던져 왔다.
“여기서 뭐 하는데?”
“뭐 하긴. 책 읽지.”
“무슨 책?”
궁금한 것도 많네. 그렇게 생각하며 실상 별 관심도 없을 것 같은 물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책표지를 덮고 앞으로 내밀어 제목을 보여 주었다.
“이거.”
무심하지만 솔직한 행동에 그의 미끈한 입꼬리 한쪽이 씨익 올라간다. 그가 제목을 눈으로 한 번 훑더니 중얼거리듯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재미없는 것도 읽네.”
“난 재미있어.”
그런 그를 보지 않고 다시금 책에 파묻듯 고개를 숙이며 하얀색과 까만색의 세상에 몰두한다.
“그딴 게 무슨 재미라고.”
그러자 날숨과도 닮은 권태로움을 내비치며 그가 털썩, 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너 몇 학년이야?”
“2학년.”
“나도 2학년인데.”
“그래.”
얼굴을 돌리지 않고 말을 끝맺자 이내 피식, 하는 웃음이 돌아왔다.
“…….”
책에서 눈을 잠시 떼고 그를 향해 고요한 눈빛을 보냈다. 눈이 부신 듯 감은 눈을 덮은 속눈썹이 촘촘했다. 빼곡한 그림자가 유려한 얼굴선을 간질이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그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를 담은 눈이 햇빛을 받아 엷게 빛난다.
“왜?”
“뭐가?”
“뭘 그렇게 보는데.”
웃음을 머금은 말에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 셔츠에 먼지 묻잖아.”
“아하.”
그가 그렇게 단발의 음성을 내뱉더니 턱을 한 손으로 받치는 자세로 옆으로 돌아눕는다.
“이러면 됐어?”
“별로. 그냥 그렇다는 거지.”
“신경 쓰여서 책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개의치 않는 그의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에 약간 얼이 빠진 것도 잠시, 다물고 있던 작은 입술이 이내 열렸다.
“그것보다는, 내가 책 읽는데 네가 자꾸 말 걸고 방해하는 게 신경 쓰여.”
“아하하.”
툭 터진 건조한 웃음이 구름을 가른 듯,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햇살이 옥상을 오롯이 비추었다. 쨍한 하늘 아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그곳에서 둘은 심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새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직시하는 무심한 눈동자와, 그를 마주하는 비뚤어진 미소.
먼저 눈을 돌린 건 그녀였다.
아까와 같이 무릎 위에 올린 책에 시선을 못 박은 상태 그대로, 바로 옆에 방만하게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무시한 채.
피식. 입에서 바람이 샜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야.”
“…….”
그때.
그가 불시에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눈앞의 글자들이 지렁이가 기어가는 모양으로 보일 지경으로, 일사병에 걸린 듯 머릿속이 하느작거렸다.
그 순간, 손이 뻗어 왔다. 그녀가 미처 몸을 굳힐 새도 없이 그 손이 새까만 머리카락 두세 가닥을 쓸어 뒤로 넘긴다.
“단추에 걸렸길래.”
나직한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문득 귓가가 뜨거웠다. 머리 위로 쏘아 대는 햇볕 때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마워.”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온 음성은 딱 세 글자였다.
“고맙긴. 너 그러고 있다가 쓰러진다. 책도 적당히 봐야지, 너무 보면 바보 돼.”
“쓸데없는 참견이야.”
단조로운 대화가 오간 후, 그는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묵직하고 알싸한 체취만을 옅게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옥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눈으로 쓰다듬다가 곧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리 위가, 한없이 뜨거웠다.
달아오른 귓바퀴를 작은 손으로 힘없이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