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2. 서큐버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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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큐버스? (1)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은빛 포니테일을 따라 내려오는 가느다란 목선과 그를 뒷받침하는 슬렌더한 몸매. 그리고 보호욕구를 일으키는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를 가진 서큐버스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고.
누가 봐도 육감적인 몸매에 새초롬한 인상을 가진 고양이상의 붉은 머리의 서큐버스는 신기하단 표정을.
그 외에도 수많은 서큐버스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들을 감상하며 멍을 때리는 것도 잠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일단 천계는 아니야.’
계약을 위해 잠시 들렸었던 천계는 모든 감각이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살아있는 거로 봐서는 분명 이곳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 천계에 도착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 있었는데.
‘천계에 서큐버스가 존재할 리가 없지.’
서큐버스가 어떤 존재인가. 천계의 쫌생이들이 극혐하는 행동들을 골라서 하는 족속들이다.
리치와 싸우기 전에 통성명을 할 정도로 관대한 천사들이 서큐버스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죽이려고 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하여튼 여기가 천계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인간들이 주를 이뤄 생활하는 중간계, 혹은 악마들과 마수들의 세계인 마계. 두 곳 중 하나라는 건데.
마계라면 영락없이 서큐버스의 노예가 되겠지만, 중간계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곳이 어디인지 고민할 틈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수십의 서큐버스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깐.
지금까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고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 자세를 잡으려던 순간.
그들의 필두에 있던 은빛 머리의 서큐버스와 눈이 마주쳤고.
“붉은 달의 주인이신 리에나 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내뱉었다.
‘붉은달과 리에나?’
머리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단어를 몇 번 입안에서 굴려보자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감정을 숨길 새도 없이 입안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저 서큐버스의 입에서 새어 나온 단어가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있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서라도 벽에 있는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져서일까 몸은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고급 대리석 바닥과 진한 입맞춤을 나누려는 순간.
포옥.
푹신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감싸 안은걸 느낄 수 있었다.
넘어지기 전에 순식간에 눈앞을 스쳤던 붉은 머리,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살의 내음. 내 머리가 기대고 있는 이게 무엇인지는 예상이 갔다.
평상시라면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고 눈앞의 여성에게 사죄를 건네는 게 맞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금욕적인 생활을 한 건 저번생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인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고싶지는 않았다. 아니 살아서도 안 됐다.
나는 몸의 움직임을 제어하지 않고 본능에 맡겨버렸고.
“앗… 하아….”
그 결과. 이름 모를 서큐버스의 입에서 열띤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나의 몸도 어느샌가 달아올랐고, 치마 속에서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있던 손과 가슴의 굴곡을 따라 내려가고 있던 입술의 템포를 한층 높여나가려는 순간.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는 인상을 와락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랫도리에 반응이 없어.’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렇지만 실제 몸으로 겪어보자 충격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이걸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영원한 동반자를 더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삶을 준거에 감사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나의 이런 반응을 다른 의미로 착각했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은빛 머리의 서큐버스가 붉은 머리의 셔큐버스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데보라, 리에나님이 불쾌하니 여기니 비켜.”
그러자 데보라라 불린 서큐버스는 자신의 속옷 속에 들어가려던 나의 손을 빼낸 뒤 자세를 바로잡아주고는 은빛 머리의 서큐버스를 바라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샤를, 퀸께서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상대가 나여서 그런 거야?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이익….”
샤를이라 불린 서큐버스가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며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나에게도 귀엽게 보이는 그 표정은 데보라의 입을 막기에는 위력이 부족했고, 그녀는 코웃음일 친 채 수위를 점점 더 높여갔다.
“그러니까 그 빈약한 몸매 좀 어떻게 하라 그랬잖아. 네가 아카데미에서 남자랑 대화 한 번을 못 나눈 이유가 있다니깐.”
“그러는 너는 뭐가 잘났다고 난리야! 누가 보면 남자 백 명은 따먹은 서큐버스인줄 알겠어? 남자들이 도망가서 흡정한번 못해본 주제에.”
그러나 데보라의 폭언에 맞서 샤를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치부를 꺼내 들었고.
우우우우웅
이제는 말싸움을 넘어 점점 더 격해질 거 같은 상황에 개입해야 함을 느꼈다.
마법의 전조 증상만으로 대기의 흐름이 넘실거리는 거로 봐서는 고위급의 서큐버스들이었고,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지금의 몸뚱이로는 그녀들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휘청거리며 두 서큐버스들의 사이로 들어가 입을 열었다.
“둘 다 멈춰봐.”
아까부터 영 적응이 안 되던 미성의 목소리였지만, 그녀들은 신의 계시라도 들은 듯이 마법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솔직히 싸움을 걸거나 때려서 말리는 입장만 겪어봐서 화해시키는 방법은 서툴지만, 이 상황을 무난하게 넘길 정도의 지혜는 갖고 있었다.
팔을 뻗어서 샤를과 데보라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선 붉게 달아오른 그녀들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낮게 읊조렸다.
“나는 샤를이든 데보라든 각자 고유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싸울 필요가 있을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느낀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샤를과 데보라 두 명 다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한 명이 청순과 가련함을 추구한다며 한 명은 섹시함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그녀들의 외모는 내가 신세를 진, 이 몸뚱이의 주인을 제외한 그 어떤 서큐버스들 중에서도 특출났다.
서로가 말했던 인기가 없다는 소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약 그녀들이 인간 세상에서 흡정을 하려 한다면 자발적으로 생명력을 내놓는 남자들이 대륙 단위로 쌓일 것이라 예언할 수 있었다.
미의 기준이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여튼 그녀들은 진심 어린 말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싸움을 멈추고선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에나님….”
“퀸에게 인정받았어.”
그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대충 시급한 상황은 다 끝난듯했고, 나는 원래 하려 하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양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래서 거울을 좀 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지?”
* * *
생각의 정리를 위해 샤를과 데보라를 비롯한 모든 서큐버스들을 방에서 내보내고는 다시 한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후…. 예상은 했지만 믿기지가 않네.”
서큐버스들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걸 통해 현재 상황을 이해했다 자부했지만, 여전히 얼떨떨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야 당장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조각 같은 근육 가진 32살의 건강한 남성이었는데,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의 머리카락, 그 어떤 생물이건 시선을 빼앗을 것만 같은 신비한 분위기의 붉은 눈동자, 살짝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보기에 따라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외모.
마지막으로 굴곡이 심하지는 않지만, 그 어떠한 남자들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완벽한 바디라인과 백옥같은 피부까지.
거울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32년의 세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듯한 여성이 서 있었다.
색욕의 대악마, 서큐버스 퀸 리에나.
자신이 마주한 성숙했던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이 몸은 자신에게 저주를 내렸던 서큐버스 퀸이 틀림없었다.
기억이 온전치 못한 척 얻어낸 샤를의 정보에 따르면 자신 아니, 리에나는 인간계로 가기 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일부분의 힘을 담아뒀더랬다.
그리고 이후로는 잘 알다시피 전투가 벌어졌고, 내 입딜에 열이 뻗친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해가면서까지 내린 저주라는 건데.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단심문관은 악마를 멸하고 여자를 멀리하는 쫌생이들의 말을 떠받드는 사람인데, 그런 존재가 서큐버스의 수장이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정기를 흡수한다고 생각하면 충분한 복수가 되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이유가 어쨌든 더 이상 과거의 연연할 심적 여유는 없었다. 알고 있던 모든 게 부정당할 만큼 자신이 잠들어있던 시간은 길었으니까.
샤를의 말에 따르면 마계와의 전쟁에 포문을 열었던 붉은 달 전쟁 속칭 서큐버스의 난이라 불리는 자신과 리에나의 싸움은 이제 역사책에서나 나올법한 얘기였을뿐더러.
150년 전에 벌어진 대전쟁의 여파로 차원이 통합된 뒤 모든 종족이 종전을 선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도 있었다.
“하…. 300년이라.”
나는 착잡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입고 있던 네글리제 위로 담요를 두르고 발코니로 걸어갔다. 방이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인지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둠을 비추는 수많은 가로등과 과거보다 더욱 세련되어진 건물들.
이곳은 자신이 배웠던 마계의 척박하고 삭막한 대지가 아니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마치 전쟁 전과 같은 살아 숨 쉬는 도시의 야경이었다.
그리고 야경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밤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롭게 돌아다니는 수많은 종족.
그들은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못할 건 없나.’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전에 한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여러 개의 달 중 붉은 달을 향해 잠깐 고개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리에나, 네가 원하던 세상이 왔구나.”
붉은 달은 나의 말을 들은 것인지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었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이왕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최대한 즐길 만큼 즐긴 뒤에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네가 있는 곳으로 가주마. 그때는 원하는 대로 실컷 괴롭힘당해주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일말의 죄책감을 떨쳐내고, 자신이 300년 전의 이단심문관 이지훈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서큐버스 리에나 라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휘이이이잉
내 선언에 대한 대답 대신인지 갑작스레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살아생전에 대화를 오래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예상이 됐으니까.
분명 자기를 즐겁게 할만한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 오라는 거겠지.
그러나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하렘은 좀 그렇지. 나는 여자가 좋다고.”
그러자 심통이 난 듯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고, 정말 오랜만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