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2장. 운명의 시작.

차를 몰고 집을 나설 때 진우는 처가에 전화를 해서 출발한다고 알려주었다.

이미 처가에서는 처남이 현장으로 출발했다고 하고, 그렇지 않아도 편찮으시던 장인어른은 딸의 사고소식을 접하고 쓰러지셨다고 한다.

처가에 전화를 한 뒤에 그의 머리 속에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새삼스레 아내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우와 수진은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었다.

수진은 그가 졸업 후 첫째 직장인 한 영상 프로덕션에 다닐 무렵, 구성작가 보조 아르바이트로 고용되었던 국문과 3학년 여학생이었다.

진우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를 잊지를 못한다.

여려 보이던 얼굴에 가냘픈 체구의 그녀를 직속 상사가 제작회의에서 소개시켜 주던 때를..

그때 수진은 진우가 FD로 작업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둘은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진우를 사랑하게 된 그녀는 졸업도 하기 전에 진우와 결혼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딸이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도 작은 회사에 다니는 별로 장래성 없어 보이는 남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반대를 했었다.

일찍 아내를 여의고 애처로운 마음에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었던 만큼 기대가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진은 그 여려 보이던 외모와는 달리 단호했었고, 집안에서 허락을 해줄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진우가 그런 수진의 모습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낮게 말씀하시며 허락을 해주셨다.

"너도 니 에미를 닮았구나."

서울로 돌아오며 진우가 수진에게 묻자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엄마도 저처럼 평소에는 약하신 분이었데요. 하지만 꼭 결정적인..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정말 강한 모습을 보여주셨대요. 사실은.. 아빠와 결혼할 때도 그러셨다네요.."

그러면서 조용히 눈시울을 적시며 진우의 품에 안겨 있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나.. 나같은 딸 낳으면 어떻게 하죠.."

그래서였을까?

수진이 낳은 딸 지현이는 정말 그녀를 쏙 빼 닮았다.

딸아이는 진우가 수진의 남은 학업을 배려해서 졸업 때까지 미루어준 임신이었다.

수진은 빨리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장인어른의 마음을 생각해서 그가 고집했었다.

딸 지현이는 정말 어여쁜 아이였다.

수진을 쏙 빼 닮은 외모에 성격까지도 지 엄마를 닮았다.

그래서 어느 때 보면 둘은 모녀지간이 아니라 자매지간처럼 다정했다.

둘 사이에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가끔 진우가 소외감에 괜시리 질투가 날 정도였으니.

그런 지현이도 이제 좀 컸다고 제법 여자애 티가 나고 있었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갈 나이인데 벌써 가슴이 조금 봉긋해지는 것도 같았다.

한 번은 오랜만에 아빠랑 같이 목욕하자고 하니 "아이.. 아빠는 부끄럽게.." 하며 아빠 앞에서 새침한 태도를 보여주어 미소를 자아내게 하곤 했었다.

그래서 "요즘 애들은 이맘때 한다는데.. 혹시나?" 하고 아내에게 물어보니 아직 `초경'은 겪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딸내미를 데리고 같이 목욕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진우는 왠지 서운해지기도 하고, 또한 점점 아름다워지는 아내의 분신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단란했던 기억들은 이제 모두 안타까운 추억이었다.

진우가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처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미 아내의 시신과 딸아이는 강릉시내의 강릉의료원으로 이송되었다며, 그리고 직접 오라는 연락이었다.

평소에는 서울에서 서너 시간이면 될 거리였지만, 경황이 없는데다가 눈발이 세차는 등 날씨가 궂었으므로, 그가 강릉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진우는 몹시 피곤했고 배가 고팠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차를 병원 주차장에 정차를 시킨 뒤 처남에게 연락을 하였다.

주차장에는 이미 방송국과 신문사의 차량들이 눈에 띄었다.

잠시 로비에서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저 앞에서 걱정스런 얼굴의 처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형님.."

8살 손아래의 처남은 자신을 늘 형님이라 불렀다.

"아.. 처남.."

"정말이지.. 어떻게 이런 일이..  우..  흐흑.. "

처남이 말을 잇지 못하고 낮게 흐느꼈다.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가면서 그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발 이것이 꿈이기를. 악몽이기를.

그러나 하얀 천 아래에서 드러난 얼굴은 분명 사랑하는 아내 수진이었다.

진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어라 표현을 할 수 없는 그런 기분들이 복받쳐 올랐다.

그저 차갑게 굳어버린 그녀, 수진이의 얼굴만을 손으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하지만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잔인한 사실만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순간 진우가 주저앉으며 오열을 했다.

"흐 흐흐흑.. 아 아..  여보.. 수진아.. "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저 숙연히 같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아내 수진을 보냈다.

아니 보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 그만 고정하세요. 지현이한테도 가보셔야죠."

처남이 아직 딸 지현이가 살아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 그래.. 지현이가 있었지.."

겨우 정신을 차린 진우는 처남의 안내로 아이가 누워있는 병실로 갔다.

지현이는 아직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지.. 지현아.. 누 눈을 떠 봐.. 아빠가 왔어.."

그러나 딸아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산소호흡기를 입에 댄 채로 누워있기만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깨어나려면 좀 경과를..."

옆에서 의사가 뭐라 설명하고 있었지만 거의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다만 딸아이가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온몸에 흐를 뿐이었다.

그렇게 진우는 중환자실 밖에서 딸 지현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지현이가 깨어난 것은 그가 의자에 기대어 깜박 잠들어 있던 때였다.

아이가 깬 것을 발견한 간호사가 그를 깨워주었다.

급하게 뛰어가 보니 지현이는 작게 눈을 뜨고 산소호흡기에 가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지 지현아.. 아빠야..  나 나.. 알아보겠니..?"

아이의 고개가 작게 끄덕거렸다.

"뭐..뭐라고 말 좀 해보렴.."

그러나 딸아이는 뭐라 말하려 하지만 매우 힘든 듯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응.. 뭐 뭐라고..?"

그때 담당의사가 이야기를 하자며 그를 바깥으로 불렀다.

의사는 지현이가 사고로 인한 쇼크로 일시적인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지현이는 한동안 말을 잃고 누워 있어야 했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진 후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그는 회사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이야기해 휴가를 얻고,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딸아이의 학교에도 연락을 해주었다.

처가에도 잠시 다녀왔는데, 장인의 얼굴은 몹시 야위어져 있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아직 버스회사, 사고차량회사와의 사고보상문제가 남아있는 데다, 이 때문에 사고유가족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지만, 그로서는 아내의 죽음을 가지고 길게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먼저 장례를 치렀다.

지현이는 조금씩 회복이 되는지 진우의 얼굴을 보면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안 나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딸아이에게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딸아이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슬픈 듯한 표정을 보면.

아마도 간호사들끼리의 대화나 친척들의 대화에서 짐작을 했으리라.

그리고 지현이가 다시 말문을 연 것은 아이가 깨어난 지 일주일 후였다.

침대 옆에서 아이를 돌보다가 깜박 엎드려 잠이 든 진우는 잠결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무심코 잠이 깬 그에게 바로 지현이가 눈물을 흘리며 조금씩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저.. 저.. 마 말이 나와요.."

"아..! 지 지현아..  이..이제 말문이 트였구나..."

그는 기쁜 마음에 딸아이를 꽉 껴안았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아 아.. 다행이야..."

그러나 진우는 곧 딸아이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의 말에 놀라 그대로 동작을 멈추어야 했다.

"여..여보..."

진우는 지금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딸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여보.. 저 저.. 수진이예요.. 당신 아내.."

그가 화들짝 놀라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 지현아.. 어찌된 거냐?  너..너 괜찮니..?"

진우의 얼굴에서 새파랗게 핏기가 가셨다.

혹시 아이가 사고의 쇼크로 정신이 이상해 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진우의 표정을 보며 딸아이가 다시 작게 말문을 열었다.

"저.. 미친 것 아니예요.. 저.. 수진이가 맞아요.."

"........"

"지금 어떻게 된 것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왜 지현이의 몸인지..?  하..하지만 나는 당신 아내 수진이에요.."

"...마 맙소사.."

진우는 지금 딸아이, 아니 자칭 아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누가 상식적으로 이런 말을 믿겠는가..?

그는 담당의사에게 이야기를 하여 딸아이가 정신적인 충격으로 문제가 있는지 정신과 진료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별 이상이 없다는 결과뿐이었다.

물론, 딸아이는 남들 앞에서는 자신이 수진이라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앞에서만 수진이라고 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지현아.."

"여보.. 제발 믿어주세요.. 저 저.. 수진이 맞아요.. 당신 아내.."

"허.. 이거야... "

"아무래도 제 영혼이 지현이 몸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지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렇게 이야기하던 딸아이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누가 믿겠니..? 네가 엄마라고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잖니.."

"그 그치만..  저.. 그럼.. 이런 것들 기억나세요..?  당신과 나 예전에..."

그리고 딸아이의 입에서 진우와 수진이만이 간직했다고 생각한 둘만의 비밀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결혼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 그리고 아직 지현이가 어렸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진우는 등골에 왠지 모를 스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호 혹시.. 설마..?  에이.. 아 아니야..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지현아.. 흠 흠.. 그 그래.. 그런 이야기를 알다니 놀라운데.. 하지만.. 평소에 너와 엄마는 서로 많은 것을 터놓는 사이였어.. 그러니 언젠가 엄마한테서 들었을 수도 있지.."

그는 동요를 애써 감추면서 침대 가에서 일어났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병실을 나가려 주머니에서 담배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곧이어 등뒤에서 들려온 말은 그를 꼼짝못하고 멈추어 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늘 나를 '작은 입술'이라고 불러주지 않았어요..?"

순간 진우의 가슴은 쿵쿵 떨려오기 시작했다.

'작은 입술'은 진우가 수진과의 섹스에서 절정에 오를 때면 항상 그녀에게 불러주던 애칭이었다.

"그 그걸.. 어 어떻게 저 아이가..?

아무리 아내가 딸과 터놓고 지냈다고 해도 어린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리 없었다.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뒤돌아서 조용히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서 설마.. 진짜로..!"

그것이 새로운 운명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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