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

김우영의 입가에는 그 어떤 때보다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며 그녀의 몸과 하나라도 되려는 마냥 강하게 짓누르며 몸을 겹친다. 안정수가 보고 있는 시야에선 두 사람이 이어진 하반신만이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을 것이고, 이렇게 몸을 강하게 짓누르며 포갠다면 자신의 몸에 가려 그녀의 몸은 일절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애처롭게 허공에서 흔들리는 아내의 다리나 보면서 아내의 몸에 내 욕망이 울컥울컥 쏟아지는 걸 손가락 빨면서 보고 있으라고.’

김우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귓가에 울리는 정나은의 달콤한 숨결과는 정반대의 잔인한 이야기를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 암고양이 많이 만족스러운가봐?”

“하아, 하아, 하아…….”

안정수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이기에 그에겐 들리지 않는다. 김우영이 갑작스레 말을 걸어오자 정나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한 박자 늦게 의아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비몽사몽간에 시작된 관계였고, 오랜 정사로 인해 체력이 확 떨어진 그녀는 아직 제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그녀의 의식을 때려 깨우듯 김우영이 강하게 허리를 내려찍기 시작하자 정나은의 신음소리는 한층 높아지며 헐떡거림이 심해진다. 그렇게 일정하게 허리를 내려찍으며 그녀의 귓가에서 김우영이 자꾸만 말을 걸자 드디어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하아……대, 대체 얼마나 한 거야?”

김우영은 그녀의 첫 마디에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나 시야를 가린 상태로 시간을 잊을 만큼 오랜 정사를 나눴더니 첫 마디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물어왔다. 안정수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의 의식을 흐리게 하는데 주력한 보람이 있었다.

“후욱! 후욱!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

연신 그녀 위에서 허리를 놀리며 대화를 시작하자 정나은은 그가 주는 쾌락에 헐떡이면서도 그의 영문 모를 말에 몸으로써 의아함을 표한다. 김우영은 아랑곳 않고 허리를 연신 찍어 내리며 속에 담아둔 잔인한 말을 조용히 토해낸다.

“끌끌끌 지금 이 자리에 남편이 있는 건 알고 있어?”

“…………뭐?”

달콤한 신음소리와 힘겨운 헐떡임만을 토해내던 그녀의 입에선 너무나 늦게 의문어린 말이 토해져 나왔다. 파르르 떨리던 허리도, 허공에서 애처롭게 흔들리던 그녀의 두 다리도 마치 정지버튼을 누른 것 마냥 뚝하고 멈춘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반응을 개의치 않고 김우영은 더욱 강하게 허리를 내려찍을 뿐이다.

“…….”

안정수의 눈에는 기묘할 정도로 이상한 광경에 비춰지고 있다. 김우영이 더욱 강하게 허리를 내려찍는 것과는 달리 침대 위의 여인은 마치 굳기라도 한 것 마냥 그의 허리의 힘이 주는 반동을 제외하곤 쩍하고 얼어붙은 것이 안정수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

“……큭!”

김우영의 억눌렸지만 즐거운 목소리가 새어나옴과 동시에 얼어붙은 것 마냥 멈춰있던 정나은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힘이 들어가며 경련하듯 떨린다. 갑자기 그녀가 몸에 강하게 힘을 주자 그녀의 몸이 주는 쾌락이 터무니없이 강해진 것에 김우영은 더욱 즐거워하며 미친 듯이 허리를 놀린다.

“……무, 무슨 소리를!”

“쉬이잇!”

초조함이 절절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 당황해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걸 김우영이 조용히 하라는 소릴 급하게 하자 정나은은 입을 앙 다물며 두툼한 입술을 파르르 떤다. 김우영이 힐끗 돌아본 안정수의 모습에선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은 기색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변화를 눈치 챈 모양이다.

생기를 잃어가던 그의 눈빛이 강한 빛이 스며든 것이 보인다. 그 강렬한 눈빛과 자신의 눈이 마주치며 잠시 허공에 맞부딪힌 순간 그 속에 숨은 강한 의지를 엿보았다.

‘두 번째 고비군.’

자신이 준비한 덫이 그녀를 덮치기 전 남편이 난입해 와도 끝. 정나은이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끝. 그렇기에 김우영은 대화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정나은의 몸에 계속해서 쾌락을 때려 박으며 속삭인다.

“남편은 지금 내 밑에 깔려 있는 여인이 자신의 아내인지 추호도 모르고 있으니 들키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

“그, 그게 무슨…….”

검은 안대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초조한 눈빛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김우영은 남편과 하룻밤의 불장난을 하는 사이라는 것과 오늘 이것도 그 중 하나라는 걸 간략하게 설명한다.

“하아, 하아, 하아…….”

정나은은 자신의 설명을 들으며, 충격적인 사실에서 오는 괴로움에 의한 헐떡임인지, 자신의 심리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몸속에 퍼지는 쾌락이 주는 달콤한 헐떡임인지 모를 숨을 토해내며 귓가에 울리는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모습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쾌락이 아닌 두려움에 떠는 것 같은 정나은의 다리를 안정수는 빼놓지 않고 살피고 있다. 다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선 그녀의 다리나 두 사람이 이어진 하반신만이 보일 뿐이라 더욱 자세한 반응을 보기 위해선 다가갈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아까 그의 눈빛은.’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던 김우영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눈빛은 아내의 의도를 알고 싶으면 끝까지 지켜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안정수는 그의 눈빛 때문이 아닌, 아내의 의도를 알고 싶다는 절절하기 까지 한 맨 처음 자신의 심정을 따르기로 했다.

“……해서 지금에 이르렀지. 어떤가? 남편과 원수의 품에 번갈아 안긴 기분은?”

“……하아! 하아! 하아!”

김우영의 설명을 전부 들은 정나은은 아무런 말도 안하고 한층 거칠어진 숨결만을 토해내고 있다.

“아, 아냐. 그럴 리 없…….”

“아니긴. 우리 암고양이 스타킹에 끼워져 흔들리는 게 뭔지 알아?”

정나은은 그제야 정신이 몽롱할 때 신겨졌던 스타킹에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러운 재질의 작은……그렇다 주머니?

‘이, 이게 뭐지?’

정나은은 눈이 보이지 않아 다리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최대한 집중한다. 그럴수록 김우영이 자신의 몸을 꿰뚫는 감각도 선명해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몸은 쾌락에 헐떡이는 것이 슬플 뿐이다.

“이, 이거……콘돔?”

“한 번에 맞추는군. 그래. 남편과 내가 우리 암고양이를 안을 때마다 쓴 콘돔을 끼워 넣은 거지. 끌끌끌 몇 번이나 번갈아가며 안은 것 같아?”

정나은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저 작은 주머니가 전부 콘돔이라는 것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정확한 개수는 모르겠지만 절대 김우영 혼자서 쓴 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사랑하는 남편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그 사실만으로도 정나은은 온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끼며 가빠지는 숨을 주체할 수 없다.

‘아, 아냐. 아닐 거야. 그, 그럼 남편이 아니라면…….’

정나은은 남편이 아니라면 설마 김우영 외의 다른 남자가 자신을 안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뜨거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낀다. 그렇다면 명백하게 그는 제3자의 개입이라는 조항을 어긴 셈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말하려는 걸,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김우영은 차갑게 속삭인다.

“아니, 절대로 이 방에 있는 건 나와 남편과 당신뿐이야.”

“아, 아냐. 절대…….”

“그래서 우리 암고양이는 우리 사랑하는 남편의 품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내 품의 구분이 가능했나?”

정나은은 그의 차가운 말이 비수가 되어 자신의 몸을 관통한 것 마냥 아프게 들린다. 정나은은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비몽사몽 했던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그럴 리……아, 아냐. 아닐…….’

정나은의 필사적인 감정과는 다르게 몸이 기억하는 건 오로지 환희와 쾌락뿐이었다.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뜨거웠던 열기와 헐떡임. 절절한 쾌락과 달콤한 환희.

그리고 머릿속을 새하얗게 불태운 절정.

익숙해져버린 김우영의 품. 

더욱 익숙한 사랑하는 남편의 품.

정나은은 그 둘의 품의 감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새기고, 떠올리고, 비교하려고 노력할수록 감각은 예민해져가고 예민해져가는 몸은 끊임없이 쾌락을 때려 넣는 김우영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몸은 달아오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구분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남편의 품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남자의 품을 비교하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오늘 밤만큼은 아무리 되새겨도, 떠올려도, 비교해도 모르겠다. 너무 들떴던 자신에 대한 벌일까? 이젠 다른 남자의 품이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에 실의에 잠기려는 정나은에게 김우영의 차가우면서도 잔인한 말은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은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사랑하는 아내가 짓눌려 헐떡이는 걸 지켜보고 있지.”

“…………하악! 하악! 하악!”

정나은은 그의 말을 끝으로 터져 나오는 숨을 주체할 수 없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고 싶지만 안대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칠 때로 지친 몸에 그녀는 힘을 불어넣어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세워 방 안의 다른 기척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귓가에 울리는 김우영의 욕망어린 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고, 그의 열기, 그의 체취, 그의 품, 자신을 꿰뚫으며 서로에게 달콤한 쾌락을 끊임없이 쑤셔 넣는 걸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정나은은 아무리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도, 기척에 귀를 기울여도, 울리는 건 둔탁한 타격음과 강렬한 힘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달아오른 몸만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질 뿐이다.

마치 이 세상에 둘만 남아있는 것처럼…….

“푸, 풀어줘. 아, 안대하고 수, 수갑.”

정나은은 이 숨 막히는 감각이 무섭다. 세상이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강렬한 감각과 그럼에도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이 무섭다. 남편이 이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김우영은 그 어느 때보다 약해진 정나은의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약해진 그녀의 모습과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힘이 들어가 비록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의해 경련하고 있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쾌락과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정나은의 두툼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내려다보며 잠시 허리를 멈추고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두터운 안대에 손을 뻗는다.

“그러도록 하지.”

김우영은 그녀에게 이 짧은 시간을 느끼라는 듯 의도적으로 아주 천천히 안대를 벗긴다. 두터운 검은 안대 아래로 빛이 살짝 새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 빛에 움찔거리는 정나은의 반응을 즐기던 김우영은 정나은의 다급한 목소리에 손을 멈춘다.

“아, 아니, 자, 잠깐만.”

“……끌끌끌 이제 와서 무서운가 보지? 안대를 벗는 순간 남편의 얼굴이 보일까봐?”

“…….”

김우영은 다시금 허리를 놀리며 그녀에게 제대로 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정나은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마지막 반항어린 말을 토해낸다.

“이, 이게 다 안대를 하고 수갑을 채워서야. 저, 절대 내가…….”

“끌끌끌 아니. 안대를 했다고 해도 사랑하는 남편의 품과 외간 남자의 품을 구분 못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건 네가 쾌락에 미쳐 스스로 외면한 것뿐이야.”

김우영은 일부러 도발하는 말을 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전부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건 먹혔는지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오기가 실린다.

“어서 수갑 풀어. 이제 이 내기는 끝이야.”

“……사랑하는 남편에게 돌아가는 걸 그 수갑이 막고 있는 것 같아?”

김우영은 침대에 구속된 장난감 수갑에 손을 뻗어 살짝 힘을 줘 당긴다. 그러자 곧이어 뚝 하는 사슬 끊어지는 소리가 맥없이 들리며 순식간에 정나은의 두 손은 자유를 되찾는다.

“…………어?”

안대를 쓰고 있어도 그녀가 얼마나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간다. 김우영은 그녀의 몸에 사라지지 않을 쐐기를 깊고, 깊게 박듯 강하게 내려찍으며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 선언하듯 조롱한다.

“사랑하는 남편의 품도 구분 못하고, 이런 싸구려 장난감 수갑에 묶여 스스로를 구속한 건 결국 네 년이야. 네가 남편에게 느끼고 있는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주는 이 쾌락과 똑같을 뿐이지. 안 그래? ‘우리’의 아내 씨?”

“…….”

정나은의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리던 정나은의 몸이 서서히 힘이 빠지는 걸 느낀다. 김우영은 이걸 노린 것이다. 

안정수와 정나은.

두 부부는 서로 기묘하리만치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고, 의심이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 절대적인 사랑이 결국 자신이 주는 ‘사랑’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만 깨닫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밖에서 공격해서 안 된다면, 안쪽부터 스스로 무너지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든든하고 듬직하던 남편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이 지금에 이르러선 그 어떤 것보다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고 그녀를 무너뜨릴 것이다.

김우영은 그 어느 때보다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그녀 얼굴에 씌워져 있던 검은 안대를 벗긴다. 천천히 드러나는 정나은의 얼굴.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달아오른 뺨에 붙어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여자로써의 진정한 얼굴이 거기에 숨어 있었다. 두꺼운 자존심이란 가면 속에 숨어있던 그녀의 연약하고, 물기 어린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본 순간 김우영은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쾌락을 느끼며 쐐기를 내리 꽂듯 허리를 힘껏 내리찍으며 그동안 참고, 참은 하얀 욕망을 힘껏 그녀 안에 쏟아낸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그 어느 때보다 짜릿함을 느끼며 자신의 욕망을 토해내고 있는 김우영의 질척한 눈동자와 가면이 완전히 벗겨져 여자로써 연약하고, 물기를 잔뜩 머금어 아름답게 빛나던 정나은의 눈에서 그 빛이 사라지는 것이 대조된다.

김우영은 한 방울의 욕망이라도 더 토해내려는 듯 허리를 움찔움찔 떨며, 온 몸에 힘을 잔뜩 줘 하얗고 끈적한 욕망을 강하게 쥐어짜내며 맥동하는 욕망의 창을 통해 그녀의 몸속으로, 몸속으로 울컥울컥 쏟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몸 안에서 그 맥동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정나은의 몸은 일정하게 움찔움찔 떨더니 모든 체력을 소진한 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저 김우영 아래 짓눌린 채 실 끊어진 인형마냥 그 사지를 침대 위에 파묻는다.

그리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안정수의 눈은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져 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쳤지만 안정수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함이 서려있다. 곧이어 그의 얼굴은 마치 원하는 대답을 찾은 것 마냥 점점 편안하게 풀어진다.

‘……그랬구나. 넌 지금까지 참았던 거구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힘이 들어간 모습이나 쾌락이 아닌 두려움에 떠는 작은 떨림을 안정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끈덕지게 버텨왔던 사랑하는 아내가 모든 걸 포기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 때문이구나…….’

그녀 혼자였다면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는 그런 여자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 사랑하는 아내를 믿지 못하고 의도를 확인하고 싶다는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확인하려고 한 결과. 결국 그녀가 자신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지…….’

안정수는 외간 남자에게 짓눌려 그의 욕망을 받아내고 있는 모습을 흐려져 가는 시야로 지켜보고 있다. 너무나 지쳤다. 거진 2주를 잠시도 쉬지 않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알아달라고 아내에게 격렬하게 호소한 것도 모자라 자신 때문에 그녀가 힘겹게 버티던 걸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어 무너져 내린 모습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다. 그건 그녀에게 뿐만 아니라 지칠 때로 지친 자신에게도 마지막 쐐기가 되어 힘겹게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게 만든다.

‘조금만 기다려 줘 곧…….’

사랑하는 아내의 의도를 알아낸 것은 좋았으나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독 밖에 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자신이 지고 갈 뿐이다. 안정수는 흐려져 가는 시야 속 짓눌린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해둔 걸 실행으로 옮기자고 결심하곤 실신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이고 울려 퍼지던 수많은 소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방 안을 지배하고 있는 건 은은한 열기와 야릇하고 비릿한 향기뿐이다. 기분 나쁜 정적이 지배하는 방 안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은연중 들린다.

“……후우~”

김우영은 많은 게 담긴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몸을 느끼듯 몸을 포갠 채 자신의 몸을 비빈다. 아직까지 이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하반신. 사지가 풀린 정나은의 가랑이에선 어느새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김우영은 분명 콘돔을 했음에도 어떻게 된 일일까?

‘흠~아쉽군. 우리 남편에게도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살짝 뒤를 돌아보자 안정수는 모든 걸 불태운 듯이 너무나도 지친 모습으로 조용하게 잠들어 있었다. 김우영이 준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전 사내 부부 모임에서 정나은을 탐할 때 사용했던 구멍 난 콘돔.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구멍 낸 콘돔 덕에 그녀가 가장 약해진 이 순간에 하얀 욕망의 쇄기를 그녀의 몸속 가장 깊은 곳에 꽂아 넣은 것이다.

“…….”

빛을 잃은 정나은의 텅 빈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본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녀는 텅 빈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바, 반지.”

“응?”

“내, 내 결혼반지…….”

마지막 구원의 실을 찾기라도 하는 듯 간절한 목소리. 김우영은 그런 정나은의 간절함에 간결하게 답해준다.

“이미 돌려줬는데?”

“…….”

영문 모를 소리에 정나은은 텅 빈 눈동자로 하염없이 김우영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김우영은 그녀의 시선에 답해주듯 몸을 일으킨다.

이어져 있던 두 사람의 하반신이 떨어지자 왈칵하고 더욱 하얗고 진득한 욕망이 정나은의 가랑이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곤 김우영은 보란 듯이 그녀의 앞에서 다 쓴 콘돔을 벗겨낸다. 그리곤 그 콘돔을 거꾸로 뒤집더니 질척한 하얀 액체와 더불어 안에서 툭하고 질량 있는 것이 정나은의 배 위에 떨어진다.

“아까부터 돌려줬었어.”

정나은은 무언가가 자신의 배 위로 떨어지는 감각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본다. 미미한 열기를 지닌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가 하얗고 질척한 액체에 더럽혀진 채 자신의 배 위에 놓여 있다.

“……아, 아아.”

정나은은 떨리는 손으로 배 위에 떨어진 자신의 반지를 주워든다. 찬란하게 빛나던 은색의 반지는 더러운 액체로 침식당한 것 때문인지, 아름답던 반지의 빛이 어쩐지 퇴색되어 보인다. 하지만 정나은은 그런 결혼반지라도 소중하다는 듯 왼손 약지에 떨리는 손으로 끼우려고 하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은색의 결혼반지는 떨리고 힘없는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 침대 저 편으로 데구르르 굴러간다.

정나은은 침대 끝자락까지 굴러간 결혼반지를 힘겹게 몸을 일으켜 엉금엉금 기어가며 그 반지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 반지에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갈 듯 앞으로 쏠린다. 그 덕에 정나은의 소중한 결혼반지는 그녀의 손에 의해 침대 밖으로 튕겨져 나가 바닥을 데구르르 구른다. 그리고 그 반지가 떨어진 곳에는 죽은 듯이 잠든 한 남자가 있었다.

“…….”

정나은의 눈은 더 할 나위 없이 커진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 지금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남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남편에게 ‘우리’의 사랑도 보여주자고.”

김우영의 장난기 어린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섬뜩하다. 정나은이 반지를 잡기 직전을 노리고 김우영은 그녀의 몸 안에 자신의 욕망의 창을 박아 넣었다. 그렇기에 이젠 허리만 놀리면 정나은이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쾌락으로 물드는 얼굴을 잠든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렇기에 김우영은 지체 없이 허리를 놀리며 둘의 사랑의 형태를 안정수에게 보여준다. 그런 둘의 사랑을 정나은은 보여줄 수 없다는 듯 무너지듯 침대 시트에 상체를 숙인다. 하지만 김우영이 그녀의 양 팔을 잡아 당겨 상체를 억지로 들게 해 더욱 깊이 허리를 쳐 올리기 시작하자 정나은의 모습은 더 이상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흔들리는 침대시트. 울려 퍼지는 둔탁한 타격음. 괴로움에 헐떡이던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열기를 더하게 되고, 바닥에 떨어진 타액으로 더럽혀진 은색의 결혼반지에는 정나은의 표정이 단편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점점 쾌락으로 물들며 초승달 같은 호를 그리는 연분홍빛 미소를…….

깊은 어둠이 가장 진해지는 새벽녘.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감싸인 멋들어진 호텔은 어둠에 잠겨있다. 한 호텔 방에는 아직도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광란의 밤이 끝을 고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삐걱거리는 침대의 비명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밤새 울려 퍼졌던 둔탁한 타격음은 묘한 찰진 타격음으로 바뀌어있다. 철썩, 철썩하는 무언가가 올라타 엉덩이를 내려찍는 소리.

찰진 타격음이 울릴 때마다 흩날리는 아름다운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올려다보고 있는 김우영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뽀얀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칼과 아름다운 상체 라인이 주는 뒷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탄력적인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김우영의 허벅지와 부딪히며 찰진 소릴 낸다.

‘끌끌 장관이군. 이런 걸 원했지.’

몽롱하게 풀린 흑요석 같은 눈동자, 달콤한 여인의 숨결, 흩날리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자아내는 탐스런 두 젖가슴은 그녀가 자신의 몸 위에서 허리를 놀릴 때마다 김우영을 즐겁게 해준다.

그 아름답고, 풋풋한 싱그러움과 정복욕을 자극하는 농익은 자태를 자랑하는 도도한 절벽 위의 꽃은 스스로 자신의 몸 위에서 그 허리를 놀리고 있다. 시야 한 편에 보이는 그녀의 남편만 보면 없던 힘도 생기는 걸 느끼며 그에게 과시하듯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껴안곤 남의 꽃에 자신의 하얀 씨앗을 마음껏 토해낸다.

“꺄흐으으응!”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정나은의 귀여운 신음소리와 함께 얽혀오는 그녀. 마치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기듯 부드럽게 팔과 다리를 사용해 김우영을 휘감는다. 듬직한 이의 품에 의지하듯 정나은의 고개는 그의 어깨를 파고들며 달콤하고 지친 숨을 토해낸다. 김우영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정나은의 고개를 들게 해 그녀의 두툼한 입술에 자신의 입을 포갠다. 얽혀오는 그녀의 혀와 달콤한 숨결을 느끼며, 자신의 품에 안긴 금단의 과실을 독식하려는 것처럼 더욱 자신의 품 안에 가둔다.

한참을 이어진 채 움찔거리던 두 남녀는 곧이어 떨어진다. 김우영 역시 더 이상의 힘은 남아있지 않다는 듯 침대 위에 쓰러진다. 그리고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침대 위에 널브러진 정나은에게 말한다.

“더럽힌 건 스스로 닦아야지?”

“……네.”

김우영의 말을 단번에 이해한 정나은은 공손한 대답과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의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파묻는다. 곧이어 그의 가랑이 사이에선 핥는 질척한 소리와 함께 정나은의 고개가 조금씩 흔들리며 무언가를 소중하게 머금는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고개는 김우영의 가랑이 깊은 곳에 파묻혀 언제까지고 벗어날 줄 모른다.

결국 절벽 위에 핀 도도한 꽃은 꺾여버렸다.

화창하게 내려쬐는 햇살이 눈부신 오후.

도심지에 보는 이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늘어선 커피 전문점에는 오늘도 사람이 북적이고 있다. 커피 전문점은 만남의 장소로도 유용하기에 사람 만나는 일이 잦은 사람들 사이에선 길 찾기가 쉽고, 상대방과 바로 대화 나누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쪽쪽.”

은은한 커피 향이 가득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이 커피 전문점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삼삼오오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 가하면 명백히 사람을 기다리는 눈치의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 속에서 커피를 즐기는 것이 아닌 마치 피로한 몸에 당분을 억지로 밀어 넣어주듯 마시는 피곤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앉아있다.

입구 쪽을 살피는 기색이 명백한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자신이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느라 정신이 없는 안정수이다.

그 날 이후로도 상당히 바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나름 숨기려고 옷도 신경 쓰고, 외모에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게끔 한 듯싶지만 그럼에도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상당히 피폐해 보인다.

북적이는 커피 전문점 안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선 별 다른 감흥이 없어 보인다. 마치 눈앞에 드리워진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사람들의 대화소리, 행복한 웃음소리 속에 파묻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커피 전문점 입구를 바라보던 안정수의 눈에 만나려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잠시 이체가 감돈다.

“아, 여기입니다.”

입구에 선 채 이리저리 카페 안을 둘러보던 여성을 향해 안정수는 소리 높여 그녀를 부른다. 안정수의 목소리를 들은 여성은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온다. 안정수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을 재빨리 눈으로 살펴본다.

‘……힘들겠군.’

안정수는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여성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여성은 무리처럼 보인다. 그녀의 모습 중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우아한 걸음걸이와 정숙하면서도 고급스런 분위기의 옷차림이었다. 주기적으로 관리 받는 것 같은 단정한 헤어스타일이나 부드러운 인상. 사람을 대함에 있어 호감을 주는 여유 있는 미소는 현재 그녀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다는 걸 절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안녕하세요. 그쪽이 말씀하신…….”

“아, 예. 안녕하신가요? 안정수라 합니다.”

안정수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며 맞은편에 앉는 그녀의 외모를 더욱 뜯어봤다. 윤기가 도는 머릿결, 향기로운 여성용 화장품의 냄새, 작지만 여유 있는 미소가 걸린 입술, 어두운 톤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일체형 원피스는 그녀의 정숙한 이미지를 더욱 끌어올려 준다. 그럼에도 완곡하게 드러난 가슴 라인이나 의자에 앉을 때 살짝 엿보인 부드러울 것 같은 엉덩이 라인은 과연 김우영의 입맛을 자극하는 여인임에 틀림없다.

‘그와 엮었던 적이 있는 여성이지만 이 사람도 틀렸군…….’

안정수가 찾고 있는 여인의 절대조건 중 하나가 바로 과거에 김우영과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다. 그리고 믿기 힘들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여성도 김우영과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가졌던 여성인 셈이다.

첫 번째 조건을 만족했지만 그녀의 분위기나 눈빛, 김우영을 향한 감정 등을 비록 이야기 나누지 않았어도 느낄 수 있다. 결코 김우영에 대해 적대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란 것을.

‘김우영 그도 어떤 의미론 정말 대단하군.’

안정수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눈앞에 있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이 여인은 틀렸다고 결론 내렸기에 안정수는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김우영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감돌고 있다.

안정수가 그 날 이후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성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의외로 그와 엮였던 여성을 찾는 건 쉬웠다. 

너무 많았으니깐…….

하지만 더 의외인 건 지금까지 그와 엮였던 여성들은 의외로 그에게 크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 없다는 점이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과정이 어떻든 지금에 이르러선 그와 엮인 걸 크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안 그랬으면 이렇게 자신을 만나러 나올 리 없으려나?’

그와 엮였던 여성들의 소재를 알아낸 뒤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그의 화제를 꺼내기도 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용하기도 하고, 만남을 종용하는 등 갖은 노력이 뒷받침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이렇듯 자리에 나왔다.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모든 여성들이 경계하고, 꺼려했지만 안정수 역시 폼으로 영업사원을 하는 건 아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설득 등은 그도 상당한 수준이기에 이렇게 단순 만남까지 이끌어 내는 건 쉬웠다.

‘하지만 조건에 부합하는 여성을 찾기 힘들군.’

안정수는 눈앞의 정숙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성과의 대화를 재빨리 마무리 짓고 다음 여성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고, 만남에 있어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좋은 만남의 광장처럼 쓰이는 오픈 형태의 카페였다. 안정수가 사람을 만남에 있어 굳이 이런 장소를 택하는 이유는 역시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함이다. 

‘이번에 만나는 여성은 꽤나 만남까지 이끌어 내는 데 힘들었지.’

안정수는 간단하게 요기를 채울 음식을 주문하고 상념에 잠긴다. 지금 만날 여성은 경계심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이 높은 것 때문에 안정수는 더욱 물고 늘어졌다. 경계심이 높을수록 그가 원하는 여성일 확률이 높기에.

“주문하신 음식입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 준 종업원에게 작게 감사를 표하고 요기를 채울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는다. 그렇다. 밀어 넣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 날 이후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에 있어 스스로도 힘겨웠기 때문이다.

“…….”

안정수는 입안의 음식을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섭취하며 아내를 떠올린다. 그 날 이후 아내와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둘 사이에 커다란 벽이 생긴 것처럼 묘한 거리감도 느껴진다. 아니, 그런 거리감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빨리 그를 떼어내야 하는데.’

안정수는 아내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숨 막히고, 어색한 분위기보단 아내의 상태가 신경 쓰인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아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치 의무적으로 행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사랑이 식은 것처럼 냉정하고 무덤덤하게 자신을 대한다.

‘하여간 사회생활이 익숙해지며 어른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는 게 더 능숙해졌단 말이야.’

두꺼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한층 익숙해진 아내.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더욱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에 더욱 필사적으로 변했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본능처럼 가면을 뒤집어 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는 게 오히려 감정을 더 알기 쉽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뜻일까…….

자신이 아무리 덜렁거리고 어리숙하다 해도 그렇게까지 얼굴에서, 몸짓에서, 분위기에서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몰려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아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깨지고 결국 본능에 몸을 맡겨 버린 것일까?

모를 일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부 틀렸을 수도 있고,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는 게 사람인데 타인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란 건 더욱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나누면 될 일인데 말이지.”

안정수는 음식을 의무적으로 먹으면서도 자괴감에 빠진다. 서로 소통이 부족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아니,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더욱 이야기를 나누는 게 힘든 걸지도 모르겠다. 문득 안정수는 피식하고 자조 섞인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도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지만.”

안정수는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서 많은 걸 조사했고, 아내와 김우영 사이에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알아냈다. 그렇기에 화가 났고, 그렇기에 미안했다.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던 도중 안정수의 우물거리던 입이 갑작스럽게 멈추며 더불어 다른 움직임도 함께 멈춘다.

‘…….’

아내에 대한 걱정에서 이어진 상념. 그러자 지금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란 생각에 이르자 안정수의 가슴은 크게 뛴다. 이제는 가슴 속 깊이 뿌리내렸던 배덕감이라는 감정은 그 날 활짝 만개한 이후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곤 하얗게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꽃이 시들 때에는 반드시 씨앗을 남긴다.

그리고 그 씨앗은 아직도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 이렇게 때때로 싹을 틔우려고 발악하는 걸 종종 느낀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지.”

배덕감이라는 감정에 몸을 맡겨 행동한 결과가 이 꼴이다. 이 상황에서도 아내를 향한 사랑이 식지 않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무섭다.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맞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무의미한 고민 끝에 얻은 건 단 하나다. 자신이 배덕감이라는 감정이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것처럼 그녀 역시 가슴 속 깊이 자신을 향한 사랑 외에 어떠한 감정이 싹텄을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차가우면서도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가지고 자신을 대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우고 있기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났다면 그렇게 힘겨워 할 리 없다.

그러길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일까?

나오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매듯 끊이지 않는 상념 속에 어느 새 약속 시간이 다됐다. 때마침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잘하면 될 지도.”

메마른 안정수의 눈에 이채가 감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찾은 걸지도 모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를 넣은 푸석푸석한 머리에 거칠지만 과거 뽀얗고 윤기 있었을 것 같은 피부, 전체적으로 작은 키지만 헐렁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평범한 옷차림 위로도 알 수 있는 탐스런 과실 같은 몸매. 동시에 피로해 보이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위태로운 분위기를 두른 그녀를 본 순간 안정수는 확신했다.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녀는 과거에 상당히 귀엽고, 애교 넘치는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분명 김우영과 엮이며 많은 게 바뀐 게 확실한 여성이라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이라고!

‘그렇다면…….’

안정수는 다가온 여성과 인사를 나누며 눈을 빛냈다.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여성임에 틀림없기에…….

고요하고 부드러운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길거리. 회식을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고, 2차를 외치며 화려한 길거리로 사라지는 이들도 있을 아직은 이른 시간. 길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모텔 중 한 곳에는 이른 시각부터 이미 손님을 받은 방이 있다.

“색-색-.”

어두운 방 안에 떠도는 여인의 고른 숨소리. 그리고 그 여인의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침대에선 부스럭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킨다.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이 곁에 잠든 여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자 고른 숨소리를 내던 여인은 그 온기에서 안심을 얻은 듯 살짝 미소가 떠오른다. 사랑스런 미소가 떠오른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안정수가 낮에 만났던 위태로운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쓰다듬던 사람은 놀랍게도 안정수였다.

침대에 잠든 여인은 그 동안 부족했던 사랑을 채운 것처럼 갈구하던 온기를 받은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어딘가 피로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부드러운 얼굴로 잠든 여인을 내려다보던 안정수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안정수의 모습은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동시에 그가 빠져나오면 흘러내린 침대 시트는 침대 위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인의 적나라한 모습을 들춰냈다. 그녀 역시도 알몸으로 잠들어 있던 것이다. 어렴풋이 방 안에 떠도는 야릇한 체취와 어쩐지 은은하게 남아있는 온기는 둘이 나눈 뜨거운 사랑을 짐작케 해준다.

“…….”

하지만 어쩐 일일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정수는 방금 전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쓰다듬던 조심스런 손길과 온기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다.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돌아갈 준비를 하자 침대 위에 잠들어있던 여성이 몸을 일으킨다. 알몸인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침대 시트를 탐스런 과실처럼 부푼 가슴까지 끌어올리며 조심스레 물어온다.

“가는 건가요?”

“예.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차가웠던 그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가 걸려 있어, 불안해하는 여인을 안심시키듯 살짝 키스를 나누곤 먼저 방을 나선다. 떠나기 직전 온기를 갈구하는 처절하기까지 한 애절한 여인의 감정어린 눈동자가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외면한 채, 아니 모른 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후우~”

모텔을 먼저 빠져나온 안정수는 어딘가 힘겨운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곤 불을 붙인다. 안정수의 모습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 마치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다잡는 그런 정나은과 비슷한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다.

“이로써 계획에 필요한 것은 전부 모았네.”

온기를 갈구하는 김우영에게 상처받은 여인. 김우영에게 받은 그런 사랑이 아닌 순수한 사랑을 원하는 그런 여인을 이용해야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무너질 것 같은 자신에게 채찍질을 한다. 어쩐지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보고 싶네. 뭘 하고 있을까?’

안정수는 어두운 도시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보일 듯 안 보이는 희미한 별빛을 찾아 헤맨다.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희미하게 보이는 너무나도 먼 별빛을 이정표 삼아 터덜터덜 걸음을 다시금 옮겼다.

안정수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훨씬 전. 정확히는 안정수가 계획에 필요한 여인을 만나며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금 불을 지피던 그 시각. 부드러운 황혼 빛이 은은하게 내려쬐는 저녁이라기엔 이른 오후 무렵.

두터운 커튼 너머로 은은한 황혼 빛이 스며드는 거실. 거실에 놓인 TV 옆에는 장식용 귀여운 토끼 인형이 놓여 있는 절제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그곳은 안정수와 정나은의 보금자리다.

TV 옆에 놓인 토끼 인형의 눈에는 거실의 전경과 열려있는 안방 문을 통해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선 정나은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 또한 토끼 인형의 눈에 비춰지고 있다.

달그락, 달그락.

음식을 만드는 식기의 소리와 열기가 은은하게 부엌을 통해 집안에 퍼진다. 오늘은 쉬는 날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퇴근이 빨랐던 것일까? 아직 저녁이라기엔 이른 오후임에도 정나은은 이미 편안한 평상복을 입고 저녁 준비에 한창이다.

틀어 올렸던 머리는 편하게 풀었고, 콧잔등 위에 걸쳐진 반무테 안경의 헐렁하게 흘러내린 모습은 평소 똑 소리 나는 그녀에게서 보기 힘든 멍한 분위기가 엿보여진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싸늘한 집안. 그런 싸늘함을 이기기 위해 그녀는 부드러운 크림색의 스웨터와 빛바래고 헐렁해져 입기 편안한 청바지를 입고 있다.

“…….”

싸늘한 집안 공기와 그녀의 딱딱한 무표정,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나, 둘 저녁상에 오를 음식이 만들어져 감에 따라 때때로 이 음식을 먹어줄 이를 떠올리는 지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곧이어 그래선 안 된다는 듯이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자책하듯, 벌을 주듯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부엌에 서서 기계적으로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을까? 정나은은 시계를 엿보곤 따뜻할 때 먹으면 맛있을 계란말이를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계란말이의 조리가 끝나갈 무렵 갑작스레 경쾌한 차임벨이 집안에 울려 퍼진다.

“……?”

정나은은 차갑던 무표정에서 살짝 의문이 떠오르며 조리하던 계란말이를 재빨리 마무리 짓고 불을 황급히 조절한 뒤 현관문으로 나선다. 곧이어 철컥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으로 나간 정나은의 뒷모습에선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토끼 인형은 마치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온 것처럼 움찔거리는 정나은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손님이 왔을지 궁금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토끼 인형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듯 곧이어 방문한 손님이 현관문을 통해 들어선다. 근래 들어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능글맞은 미소가 특징인 중년 남성이다. 토끼 인형은 순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과 함께 그녀가 가게에 찾아와 진열되어 있던 수많은 인형 중 자신을 선택해 주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가게를 방문해 자신을 데려왔던 순해 보이는 남자 외에 다른 남자가 이렇게 자주 들락거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

현관문에서 부엌으로 향하는 정나은의 모습에선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드러내기 싫은 것처럼,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가면을 뒤집어 써보지만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비틀린 미소는 존재하지 않을 토끼 인형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기묘한 열기가 담겨 있다.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며 때때로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와는 전혀 상반된 미소.

토끼 인형은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두 개의 미소가 똑같은 여인의 것이라곤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 토끼 인형의 의문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채 제집인양 성큼성큼 들어서는 능글맞은 중년과 방문한 손님을 내버려둔 채 부엌으로 가 조절했던 가스 불을 완전히 끄는 정나은의 모습을 감기지 않는 인형의 눈으로 바라본다.

저녁 준비가 한창이던 정나은은 한동안은 가스 불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하듯 가스 밸브까지 착실히 잠그는 모습에 토끼 인형은 의아해한다. 하지만 토끼 인형의 의문점의 해답은 고민에 이르기 전에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거리낌 없이 거실을 활보하던 중년 남성이 외투와 가방을 소파에 휙 던지곤 정나은이 있는 부엌으로 다가간다.

중년 남성은 가스 밸브를 잠근 정나은을 뒤에서 껴안는다. 예상한 일인 듯 놀란 기색도 없이 받아들인 그녀의 반응에 중년 남성은 실소를 하며 부드러운 크림색 스웨터 위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을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움켜쥔다. 크림색 스웨터 때문일까? 달콤한 마시멜로를 연상케 하는 속이 꽉 찬 그녀의 마시멜로는 중년 남성의 손을 통해 그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지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른다.

“…….”

고개 숙인 채 덤덤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던 정나은의 귓가에 중년 남성은 무언가를 속삭인다. 대화 내용이 궁금한 토끼 인형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눈조차 감을 수 없는 토끼 인형은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자신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는 중년 남성 쪽으로 고개를 향한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녀의 얼굴 표정이 토끼 인형의 눈에 보이는 가 싶었더니 금세 중년 남성의 얼굴이 그녀와 겹쳐진다.

남성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라고 말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의지일까?

토끼 인형은 알 도리가 없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한동안 겹쳐진 채 질척한 소리를 자아낸다. 그 와중에도 중년 남성의 두 손은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맛보듯이 더듬는다. 스웨터 위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스웨터 안으로 들어가 꾸물꾸물 징그럽게 움직이는 것이 옷 위로 알 수 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하반신을 더듬고 있었는데 헐렁해진 청바지여도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 한동안 청바지 위로만 더듬던 그의 손길이 결국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청바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읍!”

두터운 커튼 너머로 거실로 스며드는 오렌지 빛이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어스름한 그림자가 부엌에 더욱 짙어지며 드리운다. 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부엌에선 농밀한 키스를 나누는 질척한 소리가 새어나온다. 곧이어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들러붙은 채 서로를 탐하던 두 남녀가 드디어 떨어진다.

그리곤 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부엌에 비치되어 있는 식탁 위에 정나은이 털썩 쓰러진다. 중년 남성이 그녀와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를 잡아당겨 식탁 위에 엎드리게 한 것이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랄 만도 하건만 그녀는 그저 식탁 위에 엎드린 채 부족한 숨을 몰아쉴 뿐이다. 중년 남성은 정나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씩 웃은 후 그녀의 청바지를 확 끌러 내린다. 중년 남성은 청바지를 완전히 벗겨버릴 생각이었나 보지만 탄력적인 엉덩이 바로 밑 건강미 넘치는 허벅지쯤에 청바지가 걸린 채 더 이상 내려가질 않는다. 빛바랠 정도로 오래입고 헐렁해졌다 해도 청바지의 버튼과 지퍼를 풀지 않고 완전히 벗겨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중년 남성은 재미있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그녀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바지를 완전히 벗어버린다.

중년 남성은 능글맞은 웃음소리를 내며 허벅지쯤에서 걸린 청바지 때문에 한층 업 된 그녀의 탄력적인 엉덩이를 손으로 한번 내려치자 찰진 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읏?!”

움찔거리며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는 정나은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는다. 갑작스레 힘을 받아 덜컥거리는 식탁의 소리와 둔탁한 타격음이 화음을 이룬다. 중년 남성이 그녀의 허리를 양 손으로 붙잡아 고정시킨 뒤 허리를 천천히 놀리기 시작하자 덜컥덜컥 흔들리는 식탁과 그에 따라 정나은이 작게 헐떡이는 소리가 은은하게 섞이기 시작한다.

“……하아, 하아, 하아.”

덜컥덜컥 흔들리는 식탁, 부엌에선 절대 나지 않을 생소한 찰진 소리, 조금씩 커져가는 여인의 헐떡이는 숨소리. 은은하게 부엌에서 퍼지기 시작한 집의 안주인의 헐떡임은 점점 열기를 띄기 시작한다. 중년 남성은 식탁에 엎어져 있는 그녀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더욱 거칠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한다.

방금 전 서로 얽힌 채 키스를 나누던 때와는 달리 여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런 의지가 느껴진다. 마치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를 대하는 그런 느낌이 중년 남성의 눈빛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걸 행동으로써 보여주겠다는 듯 거칠고, 빨라진 허리놀림 외에 허리를 붙잡곤 고정시키던 한 손을 식탁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던 흑단 같은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곤 잡아당겨 고개를 억지로 들게 한다.

“아읏! 하으, 하윽! 하악! 하악!”

중년 남성의 한층 거칠어진 허리놀림과 그의 손에 의해 강제로 들려진 고개 때문인지, 정나은의 입에선 순간 고통어린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고통어린 신음소리는 금세 한층 깊고 야릇한 헐떡임으로 바뀌며 그녀가 느끼고 있는 쾌락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모조리 토해내고 있다.

여자에게 부엌이란 어떤 의미론 자신만의 성역이다.

현대에 이르러선 그런 의미가 소용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부엌이란 곳은 안주인의 싸움터이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녀만의 장소이다. 조리기구의 배치도, 자주 쓰는 조미료의 위치도, 그릇의 취향이나 수납장소 등 모조리 그녀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른바 여자의 작은 성인 셈이다.

남편도 들어오기 힘든 여자의 성역에 남편도 아닌 외간 남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흙 묻은 발로 성큼성큼 들어와선 작은 성의 여왕을 자신의 배아래 깔아뭉개곤 능욕하고 있다. 부엌에서만큼은 그 어떤 존재보다 도도하고 강해야 할 여왕은 외간 남자 아래 깔려 부끄럽게도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몸에서 터져 나오는 쾌락을 절절할 정도로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식탁이란 여왕이 갈고닦은 무기를 이용해 음식이라는 공격을 가족이나 손님 등에게 선보이는 자리임에도 그 위에 굴욕적으로 엎어진 채 오히려 자신이 도구 취급 받으며 자신의 성을 쳐들어온 외간 남자에게 성욕이란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

토끼 인형은 이 집의 안주인이 부엌에서만큼은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여인이 너무나도 손쉽게 장악당한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정나은의 그런 처지를 누군가가 안타까워 해준 것일까? 아니면 두 사람의 일그러진 사랑의 형태를 응원하기 위함일까?

거실에 스며들어오던 오렌지 빛 황혼은 더욱 짧아지며 집안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어스름하던 부엌에도 한층 어두워지며 거실로 스며들던 햇빛은 기껏해야 꽉 낀 청바지 때문에 버둥거리는 것도 못하고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다리와 힘이 잔뜩 들어가 근육이 터질 듯 솟은 중년 남성의 다리만을 비춰준다.

“하악! 하으읏! 하응! 으으응?! 햐으으으으으응!”

부엌에 짙게 깔린 어둠 속에 숨은 두 사람. 덜컥덜컥 거리는 식탁의 소음이 빨라짐에 따라 정나은의 야릇하고도 귀여운 신음소리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절정을 맞이한다. 부드러운 황혼 빛에 비춰지고 있던 두 사람의 다리. 꽉 끼는 청바지에 구속된 그녀의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며 힘이 잔뜩 들어간다. 여인이 절정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년 남성의 다리는 아직도 힘이 들어간 채 허리를 계속해서 놀리자 정나은의 양 다리는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쾌락에 인해 버둥거린다.

“……아, 아아앗, 햐으응?!”

더 이상 신음이라고도 하기 힘든 원초적인 쾌락에 어쩔 줄 모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어둠속을 울린다. 곧이어 중년 남성도 자신의 욕망의 종지부를 찍는 깊은 목소리를 토해내며 그의 다리도 움직임을 딱하고 멈춘다. 부들부들 쾌락에 떨리는 두 남녀의 다리는 아름다운 황혼 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인 느낌이다.

토끼 인형은 어두운 식탁 위에 몸을 포개듯 엎어진 두 남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그리움에 휩싸인다. 토끼 인형이 느끼고 있는 그리움이란 그녀가 내뱉는 달콤한 목소리와 숨김없는 모습 때문이다.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순한 인상의 남자와 그녀가 자신을 데려온 후에도 종종 안방에서 들리던 풋풋하고 행복어린 목소리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변했다. 분명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쾌락이 묻어났지만 오늘처럼 솔직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하물며 최근에는 순한 인상의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목소리마저 안방에서 흘러나오지 않은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자신을 데려온 정나은이란 여인은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바뀌었던 것일까? 아니, 분명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지금처럼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자신의 감정에도 솔직했던 여자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풋풋하고 모든 게 어른으로써 서툴렀던 그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래서일까?

토끼 인형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던 것과 저 중년 남성이 방문하고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일그러진 미소가 어째서 다시금 떠올랐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은 인형이다. 그저 지켜볼 뿐…….

“……하아, 하아.”

고요한 부엌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가 집안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갈 무렵, 그녀 위에 포개져 있던 중년 남성이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그러자 황혼 빛에 비춰지고 있던 그녀의 다리가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한차례 움찔거린다. 중년 남성은 그녀의 청바지에 손을 가져간다. 청바지의 버튼과 지퍼를 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툭 하곤 청바지가 완전히 벗겨져 버린다.

바닥에 떨어진 청바지 속에는 정나은의 새하얀 속옷도 함께 들어있었는데, 속옷 한가운데 부분은 질척거리고 밤꽃 향기가 올라오는 하얀 욕망의 덩어리와 야릇한 향기를 풍기는 투명한 액체와 함께 섞여 오렌지색 황혼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후우. 냅다 달린 것도 오랜만이군.”

중년 남성의 만족스런 말과 함께 식탁 위에 엎어져 있는 그녀를 바닥으로 내려 꿇어앉게 한다. 절정으로 사지에 힘이 안 들어가는지 정나은의 몸이 흐느적거리는 것이 황혼 빛에 단편적으로 보일뿐 그녀의 상반신 이상은 여전히 어스름한 어둠 속이다.

“알고 있지?”

중년 남성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정나은에게 다가가자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던 정나은의 손이 그의 하반신 쪽으로 올라가며 힘없는 목소리로 고분고분 대답한다.

“……네. 알고 있어요.”

그녀의 얼굴 그림자가 남자의 하반신 그림자 쪽으로 다가가더니 무언가를 핥고,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동시에 그녀의 흐느적거리는 손은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녀의 손은 상냥하게 그의 하반신을 감싸 안고 이리저리 부드러운 손길로 허벅지며 엉덩이 등을 매만져주고 있다.

“…….”

거실로 스며들고 있던 햇빛이 점점 짧아진다. 한동안 그렇게 들러붙어있던 두 사람은 곧이어 떨어지더니 흐느적거리는 정나은을 데리고 중년 남성은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문 닫는 시간도 아까웠는지 문도 닫지 않은 채 안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 곧이어 남은 옷이라도 벗는지 사락사락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가 벌어진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아아! 하아! 하아! 흐으응!”

또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한 그녀의 솔직하고 달콤한 신음소리를 토끼 인형은 들으며 그들이 머문 자리를 바라본다. 부엌에 떨어져 있는 중년 남자의 바지와 하얀 속옷이 들어있는 그녀의 청바지.

하얀 속옷을 적시고 있는 두 사람이 토해낸 욕망의 덩어리는 한데 섞여 야릇하고도 퇴폐적인 향기는 은은하게 부엌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곳에도 그녀의 새하얀 속옷을 적시고 있던 욕망의 덩어리와 똑같은 액체가 마치 함락당한 성의 잔해처럼 바닥에 남아있다. 점점 짧아지는 아름다운 황혼 빛. 두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는 그 아름다운 황혼 빛과는 달리 탁한 빛이 빛나고 있었다.

토끼 인형은 집안에 울려 퍼지는 둔탁하고 찰진 소리와 절절히 쾌락이 묻어나는 솔직한 정나은의 신음소리를 그저 묵묵히 들으며, 열린 안방 문틈 사이로 단편적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침대시트를 거실에 스며드는 황혼 빛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터운 커튼 너머로 스며들던 황혼 빛도 완전히 사그라지고 거실에 깔렸던 어스름하던 어두운 분위기는 완전히 새까만 어둠으로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안방에서 흘러나오던 둔탁한 살의 향연과 정나은의 달콤한 목소리도 곧이어 절정에 오른다. 해가 떨어짐에 따라 분명 집안의 공기도 더욱 차가워져야 정상이건만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뜨겁고, 야릇한 공기는 안방을 꽉 채우고도 거실 밖으로 흘러나와 온 집안을 조금씩 따뜻하고, 미묘한 공기로 바꾸고 있다.

“후우~.”

만족스럽고 열기가 느껴지는 남성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안방에서 알몸의 중년 남성이 어두운 거실로 나온다. 두터운 커튼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인공적인 불빛이 중년 남성의 알몸을 어렴풋하게 비춰주자 그걸 본 토끼 인형은 눈살을 찌푸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미약한 인공적인 불빛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온 몸이 땀과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어 그의 몸이 내뿜는 열기가 눈에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중년 남성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는 땀과 타액을 전혀 개의치 않고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곤 제집인양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중년 남성은 갈증을 해소해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마신 물을 싱크대에 올려두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중간에 걸음이 멈춘다.

“오호? 마침 출출했는데 잘됐군.”

중년 남성은 즐거운 목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집어 든다. 그의 손에 잡힌 건 한 눈에 봐도 부드러울 것 같은 샛노란 색의 계란말이였다. 토끼 인형은 그 모습을 보자 화들짝 놀란다. 그 계란말이는 분명 중년 남성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이 집에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을 데려와준 그 남자의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계란말이를 만들며 이걸 먹어줄 이를 떠올렸을 때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가 토끼 인형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더욱 초조해진다. 자신이 중년 남성을 막을 수는 없기에 현재 이 집에서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정나은이 있을 안방에 시선을 돌린다.

아까와는 달리 중년 남성이 안방에서 나오며 안방 문을 활짝 열어둔 채라 안방의 전경이 제한적이긴 해도 아까보다 훨씬 자세히 보인다. 열린 문을 통해 토끼 인형은 금세 그녀를 발견했다.

‘…….’

단편적으로만 보이는 침대 위에 나른하게 풀린 그녀의 한쪽 다리. 중년 남성과 같이 보이는 그녀의 다리도 땀인지, 타액인지 모를 투명한 액체로 번들거리고 있었고 힘없이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토끼 인형은 그녀가 지금 중년 남성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다.

토끼 인형은 안타까워하며 부엌으로 시선을 돌리자 중년 남성은 그런 토끼 인형의 마음도 몰라주고 금세 그녀가 만든 계란말이를 냉큼 집어먹었다. 계란말이 속에 담긴 그녀의 사랑도, 정성도 원하는 이에게 닿지 못하고 중년 남성의 뱃속으로 전부 사라져 버렸다. 계란말이를 다 먹은 중년 남성은 거실 벽에 놓인 시계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알 게 뭐냐는 표정을 짓곤 다시금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문 닫는 것도 귀찮은지 대충 휙 내두른 팔에 안방 문이 닫히려다가 제대로 닫히지 않고 살짝 틈이 벌어진다. 토끼 인형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안방에서 어두운 거실로 눈길을 돌린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의 몸에서 떨어진 액체가 뚝뚝 떨어져 있었고, 어쩐지 투명하기만 해야 할 액체들 중에는 어둡기에 더욱 눈에 띄는 탁하면서도 새하얀 색의 액체도 극소량 떨어져 있었다.

더럽혀진 거실을 내려다보고 있던 토끼 인형의 귀에 철컥하는 차가운 쇳소리가 들린다. 이 쇳소리는 현관문이 열릴 때 나는 소리임을 알고 토끼 인형의 시선은 현관문을 향한다. 그리고 현관문을 통해 들어온 너무나도 익숙한 한 남자의 얼굴에 반가움을 느끼며 움직이지 않는 손을 흔들어 반겨준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