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하드랭크 게임
한마디로 레벨이 승급되면 될수록 더 빠른 승급이 가능할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지금 그것을 몸소 겪고 있으니 나로서는 내 생각이 맞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전에 내가 죽인 도태자가 4급이었지만 10년 동안 브론즈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라면 그는 정말 자질이 형편없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물론 실버 티어로 승급되고서도 어느 정도 레벨에 멈춰져 있다면 그 또한 거기까지가 자질의 한계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력과 자질 그리고 운이 어느 정도 맞물려야 성과를 낼 수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얍삽한 행동으로 레벨을 올리는 것도 자질의 한 부분이라 생각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살아남아 어떻게든 레벨을 올리는 것이 최종 목표였으니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 이제 호위 개미들을 모두 처치한 세 신수가 어느새 내게 다가와 있었다.
“모두들 수고했다.”
카오오오.. 크아아앙.. 끄르르릇..
세 신수가 나를 보며 괴성을 한번씩 질러대자 나는 곧바로 신수들을 소멸시켰다.
불개미들과의 전투가 제법 길어져 자기장의 위치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 우선이라 곧바로 맵을 열어보니, 자기장은 2키로 미터 뒤까지 다가와 있었고 안전지대까지는 아직 220여 키로 미터나 남아 있었다.
사실 많은 시간이 지체됐는데도 자기장이 아직 2키로나 남았다면 그리 빠른 속도로 좁혀져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생존자수 또한 확인하니 벌써 72명이 죽고 겨우 28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지급품이 떨어진 다른 두 장소도 이곳과 다를 바 없었던 모양이군.’
헌데 내가 있던 장소에서 생존자는 나까지 포함해 6명인 반면 전체 생존자수가 28명인 것을 보니, 다른 두 곳보다 불개미와의 사투가 훨씬 위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안전지대까지 아직 220여 키로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겨우 28명만이 생존해 있다는 것은, 하드 맵에서는 그만큼 생존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는 법.
단점이라면 플레이어들 외에 다른 적들이 또 있어 하급 레벨자일수록 생존 확률이 그만큼 적다는 것이었고, 장점이라면 운이 따라준다면 하급 레벨들 또한 조금은 쉽게 경험치를 올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위 레벨자들이 더 유리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어 곧바로 킥보드를 다시 꺼내 안전지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곳에도 다른 생명체들이 있으려나?’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 거렸다.
내 자신에게 의문을 표시했지만 역시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저 숲에도 다른 존재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100%라고 확신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까마득한데 이 넓은 지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플레이어를 만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헌데 알 수 없는 존재가 안전지대까지 거저 가라고 편의를 봐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상위 레벨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경험치 올리기가 한결 쉬운 생명체를 만나는게 낫다고도 생각됐다.
문제라면 이제 한시적이지만 동업할 플레이어들이 없으니 또다시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놈들을 만난다면 혼자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는게 아이러니였다.
1시간 이상을 달려가는 사이 초원지대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어쩐지 더 불안하기만 했다.
하긴 그 동안 계속 싸웠으니 쉬면서 도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어 좋기는 했다.
‘이번 게임에서는 어떻게든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10등 안에 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문득 내가 처치하지 않아도 플레이어들이 다른 생명체와 싸우다가 죽어나간다면,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수를 감안했을 때 어쩌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7레벨 정도에 운이 따라준다면 이제 순위권에 도전해 봐도 그리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를 더 달리자 마침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제법 넓은 산맥이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곧바로 초입으로 들어서니 겉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숲은 그리 많이 우거지지 않아 걸어서 전진하는 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간간히 공터까지 나타나 마치 산책하듯 화살표 방향으로 전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데 우거진 숲은 아니었지만 나무들의 높이가 모두 최소 50여 미터는 훌쩍 넘었고, 그 굵기 또한 세 사람이 얼싸안고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무척 굵어, 밑에서 보자니 그 거대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비단 한두 그루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나무들이 그렇게 거대해 수명이 족히 수백 수천년은 된 듯싶었다.
한마디로 숲 전체가 느티나무들로 이루어진 어찌 보면 무척이나 고풍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숲이었다.
곧바로 주위를 경계하며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니 이제 높은 나무의 무성한 나뭇가지에 햇빛이 가려 조금은 어두워져, 을씨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이거 분위기가 영 아닌데..!’
나뭇잎에 햇빛이 가려 음침하면서도 찜찜한 분위기에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청각을 곤두세운 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계속 이런 분위기라면 차라리 빨리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가는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만약 동업자라도 있다면 경험치는 둘째 치고 서로 죽여 외톨이가 되지도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삭막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헌데 한참을 달리다시피 전진하고 있는데 문득 귓가에 요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쿠쿵.. 쿵..쿵..
처음에 그 소리는 아주 미약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두 귀에 아주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맵에서 나타나는 생명체는 그 누가 됐든 나 자신 이외에는 모두가 적이다.
물론 지금 묵직한 발소리의 임자 또한 적인 것은 당연했다.
‘덩치가 거대한 놈인가..?’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한발 한발 들려오는 소리는 비록 지축이 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요한 적막 속에서 무척이나 거대할 것이란 느낌을 들게 했다.
‘어차피 경험치를 획득하려면 피할 이유는 없겠지.’
물론 꼬리를 말고 발소리 주인이 찾지 못하도록 은신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죽어나갈 수도 있어 저절로 랭크가 올라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언제 레벨업을 하겠는가.
또한 이제 7레벨이라는 자부심도 있었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오래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라지만 발소리 주인을 죽이고 경험치도 올리며 살아남으면 될 것이 아닌가.
발소리 임자는 마치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듯 들려오는 발소리가 한치도 흔들림 없이 마치 일직선으로 다가오듯 소리의 규칙이 일정하면서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것으로 보아 혹시 내가 어디 은신해 있다고 해도 놈은 나를 찾아낼 것만 같았다.
주위의 나무 크기나 발소리로 보아 놈이 거대한 덩치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어떻게 대처하고 처치해야하나 잠깐 마음속으로 작전을 짜며 놈이 오기를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놈의 거대한 무기와 부딪치지 않는 게 유리 하겠지? 그리고 놈의 덩치가 거대하니 아무래도 속도나 빠른 움직임으로 승부를 거는게 낫겠지?’
우선 큰 틀에서 두 가지 대책을 세운 후 나머지는 그때 상황에 따라 대처하기로 했다.
쿵..쿠쿵..쿵..쿵
잠시 후 마침내 나무들 사이로 언뜻 검은 그림자가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뭐야 저놈..?’
놈은 아주 오래전 중세시대의 전사들이 입었다던 박물관에서나 본 듯한 갑옷이라는 것을 입은 채 머리에는 투구까지 쓰고 있었다.
헌데 묵직한 발소리와는 달리 키가 2미터 남짓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았다.
속된말로 거대한 덩치일 것이라 생각해 조금 쫄아 있었다가 놈을 보자 곧바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데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놈의 온 몸은 검은 갑옷과 투구로 가려져 있었는데 투구 안의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마치 어둠 그 자체인 듯, 시꺼먼 공간에 눈이라고 생각되는 두 곳만 마치 작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 듯 시뻘건 안광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저놈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놈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눈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만약 놈이 생명체라면 아무리 나보다 상위 능력을 지났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아주 미세하게나마 기가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놈에게서 살아 있다는 기는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놈의 모습은 언젠가 미디어로 보았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말로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놈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있었다.
하지만 놈을 가리키는 명칭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
놈은 절대 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났다.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맵에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놈이 나타나니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하긴 물 불 바람 대지의 속성을 이용한 공격과 변형인간 그리고 그림자 술사 등 갖가지 직업이나 불개미니 오우거장갑 등 별별 능력자와 희한한 생물이 등장하는 곳에 이런 놈이 나타난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가 나타나든지 처치해버리면 그만이겠지.’
맞는 말이다.
어떤 괴상한 놈이 출연하든 나는 그저 그런 놈을 처치해 경험치만 획득하면 그만이다.
놈이 입고 있는 검은 갑옷은 비록 변색이 되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단단해 보였고 무거워 보였다.
‘저런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제대로 싸울 수나 있으려나..?’
한순간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놈의 손에는 무척 넓고도 긴 검 또한 들려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 길이가 2미터는 되어 보여 그 또한 무척 무거워 보일 것 같았지만, 놈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거뜬하고 여유 있게 한손으로 들고 있었다.
문득 저리 무거운 것들을 입고 들고 있으니 그런 큰 발소리가 난 것은 아닐까 생각됐다.
이때는 나 역시 우선은 오러검을 생성시킨 채 놈과 대치하고 있었다.
놈과의 거리는 20여 미터.
할 말도 없었지만 하고 싶어도 놈의 얼굴에는 입이 없으니 할 수가 없었다.
헌데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잠시 대치하며 시뻘건 두 눈빛을 빛내던 놈에게서 한순간 마치 쇠가 갈리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키기기기긱!”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 ‘이제 싸우자’ 라든가 아니면 ‘이제 넌 내 손에 죽을 시간이다’ 하고 한다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놈을 만나고부터 역시 저런 놈을 처치하면 과연 경험치는 얼마나 주어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싸워보면 알 수 있겠지.’
맵의 특성상 강약의 법칙에 따라 놈이 보스 개미보다 강하다면 경험치가 더 주어질 것이요 만약 보스보다 약하다면 적은 경험치일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했다.
이때 괴성을 한번 지르고 난 놈이 드디어 두 눈을 더욱 새빨갛게 물들인 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놈이 일반 검에 비해서는 거대하기까지 한 대검을 마치 단도를 든 듯 가볍게 치켜들고 곧바로 나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쿠쿵 쿵쿵..
헌데 놈의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 한순간 내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작전을 바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