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7화입니다.
비올렛은 식당에 들어섰다. 변함없이 휘영찬란한 곳이었으나 그것에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평범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으려다 문득 고개를 들어 상석을 바라봤다. 항상 먼저 자리하고 있던 알폰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은?”
“주인님께서는 집무실에서 드신다고 하셨어요.”
“...그럼 부관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오늘은 혼자인가...”
비올렛은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착석하자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음식을 날랐다. 온갖 산해진미가 식탁 위로 펼쳐졌으나 표정은 여전히 침울하기 그지 없었다.편지를 쓰며 흘러넘쳤던 감정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표정이 안좋으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딱히. 그럴 일이 있을까.”
있다면 있겠지만 이제와서 그런 것들로 침울해 할 리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겪었다. 하지만 비올렛은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고기를 썰었다. 한동안 식탁 위로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후우…”
비올렛은 스테이크를 절반 정도 남기고 식기를 놓았다. 그 모습에 샬럿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더 안드시는 건가요?”
“...넌 밥 먹었냐?”
“메이드 되는 자로서 모시는 분 보다 먼저 식사를 할 수 없는 없죠.”
“요컨데 안먹었다는 소리잖아.”
“그렇죠?”
쓸데 없이 늘려 말하고 있어. 짜증나는 얼굴로 노려보니 무슨 문제가 있나요? 라는 표정으로 갸웃거린다. 얄밉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으나 곧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너도 앉아. 같이 먹게.”
“죄송하지만 아무리 비올렛이라도 그 부탁은 들어 드릴 수 없어요.”
“왜?”
“그야, 저는 메이드니까요.”
“나는 노예인데?”
“그리고 주인님은 비올렛을 잘 모시라고 했었죠.”
어쨌든 같이 동석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비올렛은 샬럿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고기로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나이프로 그것을 내려찍었다. 작은 소음을 내며 손잡이를 제외한 부분이 박혀들어갔다.
벽에 도열해 있던 시종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프를 들어 들어올려진 스테이크를 한 입에 씹어 삼켰다. 그리고는 나이프를 식탁 위로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됐어.”
냉랭한 어투로 그런 말을 내뱉은 비올렛은 곧장 식당 문을 닫고 사라졌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나이프가 들어 갔던 자리에 구멍이 난 채로 깨지지 않은 접시가 보였다.
접시를 깨지 않고도 구멍을 낼 정도라. 새삼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일취월장 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샬럿은 그것보다도 방금 전 식당을 떠나던 비올렛의 표정이 눈에 남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
“하아…”
비올렛은 나무에 머리를 박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그녀는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혼자 먹기 어쩐지 청승맞은 기분이라 같이 먹자고 했다가 거절당한게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짜증을 냈단 말인가. 다시 한 번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기둥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오늘따라 감정이 멋대로 날뛰는 것 같았다. 가슴이 술렁거리고 눈을 깜빡거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기분. 비올렛은 금방 원인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릴과 헤어진 그 날부터 드문드문 솟아오르던 감정이었으니까.
외로움이었다. 무척이나 지독한 외로움. 비올렛은 본래 외롭다는 감정을 알지 못했다. 외롭다는 것을 느끼기보다는 분노로 스스로를 태우며 움직였기에 그런 것을 느낄 세도 없었다. 이곳에 와서도 얼마간은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알에리 저택에서 이릴과 재회하고 다시 이곳으로돌아왔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나날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커다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텅 빈 옆자리와 홀로 산책을 하며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폰스와 몸을 섞을 때 만큼은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다른 것이 제 몸을 잠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열흘 전의 이야기였다. 대련의 패배를 명목으로 행해지던 그것은 알폰스가 중도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비올렛은 무릎을 끌어 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무기력함이 몸을 지배한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공기가 차가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야.”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들어 발치에 떨어진 것을 보니 뭉친 종이었다. 제게 이런 짓을 할 놈이 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시선을 들어올리니 창가에 몸을 기댄 채로 내려다 보고 있는 알폰스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저곳이 집무실이었던가. 비올렛은 뚱한 얼굴로 그를 노려다보며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곤 던졌다. 높이가 좀 되었으나 던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맞추지는 못했지만. 얄밉게 고개를 트는 것으로 피한 알폰스를 바라봤다.
가만히 있던 사람을 종이로 맞춘 주제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비올렛 역시도 뚱한 얼굴로 노려보기만 했다. 서로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올렛이었다.
“뭐. 용건이 있으면 말해.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네가 먼저 보고 있었잖아."
"내 집무실 근처로 온건 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거든?"
유치하기짝이 없는 대화였으나 어쩐지 한편으로 편안함이 느껴졌다. 비올렛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며 말했다.
알폰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냐.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흥.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뭘 하건 신경쓰지 않지만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이 가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일정은 무슨. 어차피 검술 지도랑 대련 밖에 안하면서… 아."
투덜거리던 비올렛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 요즘 왜 대련 중에 그만 두는 거지?"
"너도 몇 번이나똑같은 공격을 받다 보면 날 이해하게 될 거다."
은근히 변화가 없음을 지적하는 말투였다. 어찌 보면 타당한 말이기도 했으나 비올렛은 금세 이상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기에는 여태까지 아무렇지 않게 했었잖아."
"내 입으로 지겨워 졌다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나 보군."
"지겹다고?"
"그래. 상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에 맞는 공격을 해. 무식하게 힘만 믿고 날뛰기만 하다간 평생 날 못이길 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간다. 창문이 혼자닫히며 완전히 두 사람 사이가 차단되었다. 비올렛은 잠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가 곧 분노하며 몸을 일으켰다.
"야! 내가 왜 널 못이겨! 너 같은 건 금방 따라잡을수 있거든?!"
그리고는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창문으로 다시 나타난 알폰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주군."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렀다. 고개를 돌리니 부관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서류 한 장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드니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용사 일행, 요르하 백작을 참살하고 바제리 영지로 진행 중]
"흔적을 쫓고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알폰스는 다른 서류를 손에 들었다. 그곳에는 용사 일행의 행적이 적혀 있었다.
보름 전, 황궁에 머무르고 있다고 알려진 그들이 알에리 영지에 나타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알에리 후작은 모가지가 따인 후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아무리 용사라고 할 지라도 상대는 기사 중의 기사의 칭호를 받은 알에리 후작이었다. 게다가 의식 또한 성공적으로 마쳤을 테니 전성기의 육신이나 다름 없었을 터. 용사라고는 하나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농민이었던 햇병아리가 알에리 후작을 잡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이 현실이 되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에리 후작은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저잣거리에 효수되었으며 정보원이 그것을 눈으로 확인까지 했다고 했다.
단순히 용사 뿐만이 아니라 황실까지도 엮여있다는 뜻이었다.
'주모자는 황태자겠군.'
황실의 어른인 그를 감히 노릴 수 있다면 황제나 황태자 밖에 없었다. 황제는 지병으로 앓아 누웠으니 당연히 남은 것은 황태자 뿐이었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관은 그리 말하며 편지를 건넸다. 그것을 뜯어 안을 살피니 꽤 급박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보낸 이들은 바제리 백작과 늙은이들이었다.
내용을 간략히 추리자면 다음과 같았다. 황실에서 각기 가문으로 '자비'를 담은 경고를 보냈고 당연히 역모와 엮여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가문들은 충성심을 다시금 증명하기 위해 알에리와 엮였던 이들을 축출해내기 시작했다.
성공한 가문도 있었으나 실패한 가문들도 있었다. 가문을 휘어잡는 것에 성공한 바제리 백작과 늙은이들은 사병을 한데 모아 용사 일행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자신도 와서 도우라는 내용이었다.
“어리석은 짓이군.”
황실이 엮여 있는 것이 분명한 싸움이다.용사 일행만 있는 것이라면 승산이 있을 지언정 황실이 군대를 움직인다면 제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한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알에리 후작마저 죽어버린 마당이다. 알폰스는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것을 불태웠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은 저들이 죽겠지만, 그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다. 그들이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내뱉을 게 분명 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추적자를 가지고 있는 듯 했으니 머지 않아 이곳으로 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만…”
부관이 말을 흐리며 편지를 건넸다. 알폰스는 그것에 찍혀 있는 인장을 보며 헛웃음 지었다. 장미에 휘감긴 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가 보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안에 적혀 있을 말 역시도 말이다.
[어리석은 놈.]
“정말 변하지 않는 분이시군.”
중얼거리며 종이를 불태웠다. 하기사, 제국의 삼공작 중 한 사람이다. 지금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마무리 될 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알폰스는 웃었다.
‘아버지, 제가 순순히 죽어줄 것 같습니까?’
아직 그에게는 보답해야할 것이 잔뜩 남아 있었다. 그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샬럿.”
“네, 주인님.”
허공에서 샬럿이 나타나 시립했다.
“바제리 백작과늙은이들을 도와. 단, 네가 전면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다. 최대한 네 몸을 보존하도록 하고 혹여 용사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도록 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을 준비해라.”
샬럿의 몸이 흠칫거렸다.
“그 말은 즉…”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다. 그곳에서 일이 끝나고 나면 해야할 일을 하고 와라.”
“...알겠습니다.
“부관, 용사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바제리 백작이 사망했을 때의 대책을 마련해라.”
“알겠습니다. 헌데 비올렛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올렛?”
갑작스레 나온 이름에 알폰스가 뒤늦게답했다. 부관은 표정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부족하지만 전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군과 검을 맞댈 수 있는…”
“아니, 비올렛은 제외한다.”
“주군.”
“그 녀석은 약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즈음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렇게 말했다.
부관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