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6화입니다.
비올렛은 익숙한 진검의 무게를 느끼며 눈을 떴다. 열 발자국 되지도 않는 짧은 거리에 상의를 탈의한 모습의 알폰스가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할 때 목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손속을 두는 행위 역시 하지 않았다.
그 변화가 기꺼웠다. 자신의 실력이 그만큼 일취월장 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비올렛은 숨을 낮게 내쉬며 자세를 잡았다. 가장 처음 그에게 배웠던 1번 자세. 맞은편에서도 같은 자세를 취한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자신의 것보다 훨씬 안정되었고 정교한 모습이었다.
그것에 기죽지 않는다. 눈을 한번 깜빡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때. 비올렛은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검을 크게 들어올려 휘두른다. 내려 벤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작을 패버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알폰스 역시도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상단을 방어하며 하체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방어를 위한 자세가 완성되자마자 둔중한 충격이 팔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전력을 실어 날린 일격에 무릎이 흔들리고 자세가 무너진다. 비올렛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나갔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공격을 받아 넘기며 방어에 집중하는 알폰스의 모습은 어찌 본다면 불리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급해지는 것은 비올렛이었다. 처음 일격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족족 검로를 예상해서 맞받아치는 통에 긴장을 늦추는 순간 당하는 쪽은 자신이었다.
캉-! 다시 한번 검이 부딪쳤다. 이번에는 튕겨나오거나 흘려지지 않았다. 힘겨루기를 하듯 서로의 몸을 붙여 맞붙었다. 가가각-! 검날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누구 먼저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런 단조로운 공격만 계속할 거냐."
"내가, 뭘하든 무슨 상관이야!"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전력으로 일격을 가격하는건 분명 상대의 허를 찌르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싸운 상대에게 그런 짓을 한다면 분명 역으로 당하는 건 네가 될 거다. 비올렛.”
“닥쳐!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소리친 비올렛이 흡 힘을 주며 검을 튕겨냈다. 다시금 공방이 이어졌으나 알폰스의 말대로 단조로운 상황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헉, 허억."
땀이 턱을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런 모습에 반해 알폰스는 땀을 조금 흘리고 있을 뿐 숨이 차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올렛은 턱을 훑어 털어내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알폰스는 그녀를 바라보다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하지."
"뭐?"
"그런 꼴로 더 해봐야 발전하기는 커녕 퇴보만 반복하게 될 거다."
"야, 야! 어디가!"
"쉬어라."
알폰스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비올렛이 뒤에서 소리쳤으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냐고, 젠장…"
비올렛은 홀로 남아 연무장 바닥을 차며 중얼거렸다.
알에리 저택에서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생활하는 것은 딱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커다란 식탁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 알폰스에게 검을 배운 뒤 대련을 한다. 거기서 패배를 하면 그 날은 하루 종일 침실에 붙잡혀 나올 수 없었다.
물론 매일 그런 것을 반복하는 건 아니었다. 변덕이라고 할 지 알폰스가 대련 도중 포기하는 일이 생겼다. 그렇게 되면 그 날은 온전히 자유였다. 당연히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비올렛은 어쩌다 한번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는 했다. 겨우 정원을 걸으며 나무 아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정도였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상했다. 벌써 열흘이 넘게 대련을 하던 도중 포기를 말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째 이렇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그알폰스가 열흘째 섹...스를 안할 녀석이 아니지.'
떠올리려니 부끄러운 말이었으나 사실이었다. 비올렛이 아니라면 샬럿과 몸을 섞어댔다. 가끔 셋이서 할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가 이틀 이상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벌써 몸을 섞지 않은지 열흘이 되었다. 이즈음 되니 비올렛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디 다쳤나?"
"네? 누가요?"
"알폰스 녀석 말이야. 벌써 열흘째 대련 도중에 돌아갔다고."
목욕 시중을 도와주던 샬럿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이 저택에서 그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달리 그녀를 제외하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달 가까이 붙어 있었더니 익숙해진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글쎄요… 만약 다치셨다면 곧바로 부관님께 가셨을 테니깐 말이죠."
"그렇지?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녀석이 그러고 있으니까…"
"흐응…"
"뭐야, 그 눈빛은?"
"아뇨. 뭐라고할까, 비올렛이 주인님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고 할까요…"
"걱정하기는 누가!"
욕조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는 비올렛 때문에 메이드복이 살짝 젖어 들었으나 샬럿은 빙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야, 그렇잖아요? 평소 같았으면 ‘그 녀석이 어떻건내가 무슨 상관이야?’ 하고 지나가셨을 테니까요.”
“...그걸 내 모사라고 한 거냐?”
“어라? 똑같지 않았나요?”
“똑같겠냐.”
“아앗! 안경에 물이-!”
손으로 물을 뿌리니 안경을 붙잡으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정작 안경 표면은 물방울이라고는 하나 묻어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비올렛 역시도 그것을 알았기에 연거푸 물을 끼얹었다.
"애초에 내가 그녀석을 걱정할이유가 없잖아. 언젠가는 반드시 쓰러뜨려야할 녀석이라고."
"그걸 지금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녀석에게 말해봐야 '기대하지' 같은 말 밖에 더 나오겠어?"
"앗, 방금 그거 주인님을 모사하신 건가요? 되게 안똑같네요."
"아니거든."
"끼약! 눈에 물이-!"
찌익. 손으로 물총을 쏘며 맞추니 욕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댔다. 그 과장스러운 몸짓에 제아무리 비올렛이라고 하더라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살 피우긴."
"엄살이 아니라 정말 따갑거든요?! 봐요! 눈이 빨게졌잖아요!"
"원래 붉어서 모르겠거든. 에잇."
"끼야앗!"
-
비올렛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실크 드레스. 몸에 닿는 느낌이 꽤 부드럽기도 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꽤 애용하는 옷이었다.
다만 몸의 라인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뭐 어때요? 비올렛 정도면 어디가서 흉을 보일 몸은 아닌걸요?"
"그래서 싫은 거야.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앗, 설마 오직 주인님께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꺅!"
"진짜 죽는다."
손가락으로 쿡 찔러주니 좋아 자지러진다. 옆구리를 부여집고 바들거리는 샬럿을 두고 비올렛은 이리저리 거울을 둘러봤다. 몸이 전체적으로 얇은데 반해 가슴이고 엉덩이고 확연히 눈에 띄니 선정적이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에휴, 이제와서 생각해봐야 뭘 하겠냐만.’
“샬럿.”
“네, 비올렛.”
언제 그랬냐는듯 멀쩡한 얼굴로 대답하는 샬럿을 보며 비올렛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어느 것이 진심이고 연기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펜이랑 종이, 부탁할 수 있을까?”
“요즘 자주 그런 부탁을 하시네요.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보내실 건가요?”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거냐?”
“당연히 안되죠.”
잘도 그런 말을 상큼한 얼굴로 내뱉는다.
“됐어. 나도 보내려고 쓰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되는 거야 안되는 거야?”
“안될 거는 없지만… 맨 입으로 하기에는 조금 아쉬운데요?”
이럴 줄 알았다. 비올렛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뭔데?”
“음~ 제 볼에 키스를 해주시면…”
쪽. 볼에 가볍게 닿고 떨어지는 느낌에 샬럿이 몸을 굳혔다. 끼긱 소리가 날 정도로 뻣뻣한 목을 돌리니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비올렛이 한심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 바바방금 뭘 하신…”
“뭘 했긴. 볼에 키스 해달라며? 했으니까 이제 내놔.”
“당신, 비올렛이 아니죠? 저의 비올렛을 돌려주세요! 켁!”
“누가 네 꺼래.”
“이, 이건 진짜로 아팠어요…”
맞은 명치를 부여잡으며 샬럿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올렛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한 손을 허리에 올리며 말했다.
“고작 볼에다 키스하는 정도로 내가 머뭇거릴 거 같아?”
겨우 그정도로 벌벌 떨기에는 이미 겪은 것이 많았다. 별로 자랑할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것보다 더 한걸 했었으면서 뭐 그런 거 가지고 호들갑이야?”
“그치만 비올렛이 먼저 해준건 처음인걸요…”
그랬던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알폰스와 몸을 섞다보면 어느 순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샬럿과 함께 했다는 것도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종이랑 펜 내놔.”
“이미 테이블 위에 올려뒀어요.”
고개를 돌려 발코니 근처에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도대체 언제 올려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비올렛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네에… 더 필요하신건 없으시죠?”
“딱히. 저녁 먹을 때즈음 불러줘. 그 전까지는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알았어요. 제가 필요할 때는 종을 두 번 울리면 되는 거 아시죠?”
그 종, 받은 뒤로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울릴 일 없으니까, 얼른 가.”
“아앙, 쫓아내지마요-.”
앙탈을 부리는 샬럿을 문 밖으로 밀어내고는 닫았다. 탁, 문이 닫히자 정적이 찾아왔다.
비올렛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는 잉크병에 들어 있는 깃펜을 들어 종이 위에 쓰기 시작했다.
그리운 이릴에게.
당연히 이세계 문자는 배운 적이 없었기에 한글로 썼다. 그렇기에 보낼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보냈더라도 이릴은 읽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첫 줄을 적은 비올렛은 잠시 하얀 털을 입에 물며 고민했다.
전생에서, 그러니까 지구에 있었을 때는 누군가에게 편지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보낼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런 감성적인 짓을 하기에는 삶의 여유라는 게 없었다. 유치원생 때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 정도 일까. 그때도 어떻게 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껏해봐야 엄마아빠 좋아해요 정도 겠지.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비올렛은 결정을 내린듯 편지를 적어나갔다.
안녕, 이릴. 사흘 만의 편지야. 잘 지내고 있어? 나는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고 있어. 알폰스 놈은 여전히 이상해. 샬럿에게도 물어봤지만 자기도 잘 모르겠다더라. 뭐 그 놈이 이상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그보다 오늘 날씨가 좋아. 너와 산책하던 날이 떠오를 정도로 무척이나 화창한 날이야. 이 편지를 쓰고 나면 정원을 한번 둘러볼 생각이야. 거기는 어때? 설마 흐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너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까지 쓰고 비올렛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두 달이 지났어. 네가 보고 싶어. 너의 품에 안기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 산책을 했던 나무 아래에서 무릎을 베고 쓰다듬어지던 나날이 그리워. 너와 함께 잠들던 시간이 그립고 함께하던 모든 순간이 그리워. 언제즈음이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 달? 두 달? 어쩌면 반 년이 넘게 걸릴지도 몰라. 알폰스는 여전히 강하고 나는 약해. 그 녀석을 이겨야 네게로 갈 수 있는데 나는 너무 약해. 그와 몸을 섞을 때마다 마음이 마모되가는 기분이야. 더 이상 그에게 거부감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 내가 이상해져가고 있는 것 같아.
네가 필요해.
이릴.
“보고싶어…”
테이블 위로 엎드린 비올렛이 작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차오르는 감정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비올렛, 저녁 시간이예요.”
“...먼저 가 있어. 갈 테니까.”
“네에.”
비올렛은 코를 킁하고 삼키고는 눈가를 훔쳤다. 종이 위로 얼룩이 져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것도, 보낼 것도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화장대 서랍을 여니 샬럿에게 받은 종과 종이 여러 장이 보였다.
여태까지 썼던 편지들이었다. 그 위로 한 장을 더하고는 서랍을 닫았다. 적당히 거울을 보며 얼굴을 정리한 뒤 문을 닫고 나섰다.
그 뒷모습은 평소에 보여주던 당당함이라고는 하나 없이 가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