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화입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옷을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방을 안내한 사용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문을 닫았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손을 잡아 오는 온기를 마주 잡았다.
“이제는 비올렛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릴이 조심스레 물었다. 비올렛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아니, 너만은 원래대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이역만리의 세계에서, 제 처지를 알고 있는 건 이릴이 유일했다. 그런 그녀에게까지 비올렛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싫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기분이라, 무척이나 끔찍했다. 그러니 이릴 만큼은 비올렛이 아니라 원래 이름인 영진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했다.
모두가 자신을 비올렛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응, 알았어. 영진.”
기대 온 머리에 맞대며 이릴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먼저 떨어진 것은 비올렛이었다. 그녀는 마른세수를 하며 이릴에게서 등을 돌렸다. 떨어지는 온기에 이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비올렛은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젠장, 내가 뭘 한 거야?’
조금 감정이 진정되고 나니 자신이 한 짓이 부끄러워진 것이었다. 안겨서 울었던 거나 방금처럼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들이 말이다.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식히며 애써 진정하려고 했다.
물론 그 모습이 이릴에게 전부 보이고 있었다는 건 몰랐지만 말이다. 그녀는 어째서 비올렛이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곧 깨달았다는 듯 옅게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아.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건 당연한 반응…”
“부끄러워하긴 누가 부끄러워했다고!”
빽 소리를 내질렀으나 얼굴이 붉어진 건 사라지지 않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 화내지 마, 응?”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음이 가시지않은 얼굴이었다.
“화난 거 아니야. 네게 화를 낼리 없잖아.”
비올렛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릴을 바라봤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보지 못했는데 새하얀 드레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든 옷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릴에게서 기품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귀족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이릴이 원래는 귀족이었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옷, 너랑 잘 어울리네.”
“고마워. 너도… 잘 어울려.”
이릴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내뱉었다. 비올렛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봐도 잘 어울리기는 해.”
원해서 입은 것도, 원해서 꾸민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샬럿이 정성을 다해 꾸민 제 모습은 꽃으로 비유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서로의 모습에 칭찬을 하고 있으니 문 바깥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방까지 안내해주었던 사용인이 손에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여성용 옷이 없어서 일단 남성용 옷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을 들고 와 봤습니다만,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흐음…”
비올렛은 사용인의 손에 있는 것들을 한가지씩 들어보며 제 몸에 가져다 댔다. 제일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기장이 죄다 한 뼘씩 길었다. 게다가 타고 난 골격 차이 때문에 어깨가 맞지 않는 것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이래서야 드레스를 입고 싸우는게 나을 것 같구만.’
활동성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거치적거리게 할 것들뿐이었다. 비올렛은 한참을 고심하다 겨우 어깨가 맞는 셔츠를 고를 수 있었다. 바지도 허리가 제일 작은 것을 골랐다. 제일작은 것도 비올렛의 다리가 하나 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지만 말이다.
사용인을 보내고 나서 비올렛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릴을 돌아보며 말했다.
“옷 벗는 것 좀 도와줘.”
샬럿이 입힌 이 드레스는 뒤에서 끈으로 허리를 조이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묶어둔 끈을 풀어야 옷을 벗을 수 있어서 혼자서는 벗기 어려웠다.
거울 앞에서 이릴에게등을 돌리고 있으니 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묘하게 간지러운 느낌을 참으며 얼마나 있었을까, 몸을 조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지더니 상반신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읏…”
거울에 자신의 가슴이 비치자 비올렛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올려 그것을 가렸다. 이릴은 그 모습에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몸을 감싸던 드레스가 완전히 벗겨지고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척이나 예쁜 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말을 수치스러워할 것이었다. 남자였다던비올렛이라면 말이다.
이릴은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가져다주었다. 비올렛은 옷을 건네받고는 황급히 갈아입었다.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네.”
완전히 옷을 갈아입은 비올렛을 보며 이릴이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기장은하나도 맞지 않고 어깨도 좌우를맞추지 않으면 금세한쪽으로 흘러내렸다. 허리 역시도 최대한 끈을 졸라 보았으나 그럼에도 헐렁했다.
“소매나 바지 밑단은 자르면 되는 거지만 문제는 허리랑 어깨인가…”
이대로 나가서 대련을 했다가는 한쪽 젖가슴을 까고 싸우거나 하반신이 훤해진 상태에서 싸울 수도 있었다. 아니면 둘 다 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으니 벌컥 문이 열렸다.
어떤 무례한 놈이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들어왔나 싶었다.
“아, 안에 사람이 있었네요.”
부관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으며 들어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나가려고 했다.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부관은 고개를 돌려 어깨를 잡은 이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너 잠깐 서 봐.”
비올렛의 말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이곧대로 따랐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부관은 가만히 서서 이리저리 탐색하는 시선을 받았다. 비올렛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어깨를 쓸어내리기도 하고 허리 근처를 서성이기도 했다.
부관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성욕이 없어서요. 급하시다면 주군을… 아얏.”
“뭔 헛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이건 뭘 하는 건가요?”
부관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맞은 곳을 문지르며 말했다. 몸을 이곳저곳 더듬던 비올렛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누르더니 그대로 부관의 머리까지 쭉 나아갔다. 정수리에서시작한 뻗어진 손은 이마에 닿았다.
“키가 좀 크긴 하지만 어깨는 적당히 비슷하고 허리도 마찬가지라…”
나쁘지 않군. 적어도 지금 입고 있는 옷보다는 훨씬 나았다. 계산이 끝난 비올렛이 활짝 웃으며 부관에게 말했다.
“벗어.”
“네?”
“벗으라고.”
-
“괜찮아요?”
멍하니 있는 부관을 쿡쿡 찌르며 이릴이 말했다.
흡사 범해지듯 난폭하게 옷을 갈아 입혀졌다. 입고있던 속옷까지 벗겨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을 잊은 주군과 샬럿을 찾으러 나왔을 뿐인데 비올렛에게 이런 수치를 당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부관의 옆에서 비올렛이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가슴이 좀 답답하기는 했으나 아까와는 달리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 격하게 움직여도 바지가 흘러내리거나 어깨가 흘러내려 오지 않았다.
“좋아. 이정도면 되겠어.”
적어도 대련 중에 옷이 내려가서 낭패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비올렛은 제 모습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부관을 쿡쿡 찌르고 있는 이릴에게 말했다.
“이제 가볼까?”
“아, 응. 근데 이분은누구셔?”
“알폰스의 부관. 이름은 몰라. 그냥 부관이라고 부르라던데.”
부관이라니, 그럼 최측근이라는 소리지 않나. 이릴은 이래도 되는 건지 걱정됐다.
“남작님이 이걸로 네게 꼬투리를 잡으면 어떻게 해?”
“괜찮아. 그 정도로 좀생이인 녀석은 아니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런 꼬투리를 잡지 않아도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나 괜한 걱정을 할 것 같아서 말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이릴이 쉽게 납득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비올렛은 덧붙여 말했다.
“전에 내 머리통 깨버린 거, 이걸로 퉁치자고.”
“퉁친다는 게 무슨 소리야?”
“없던 일로 하자는 뜻이야. 그러니까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다는 셈 치자는 거지.”
어때? 라고 되묻는 모습에 부관은 멍하니 비올렛을 바라봤다. 주고받았다는 셈을 치자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의 머릿속에서 비올렛의 뒤통수를 쳤던 일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괜히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비올렛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불안 요소는 없는 거지?”
“아니, 아직이야.”
이릴의 말에 비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머리, 그렇게 하고 갈 건 아니지?”
“머리?”
그 말에 손으로 뒷머리를 쓸어넘겼다. 허리까지내려오는 백발에 윤기가 가득했다. 확실히 움직일 때 거치적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싸우면서도 단 한 번도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없어서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었다.
‘아.’
한번, 있기는 있었다. 싸웠다기보다는 도망치다가 잡혀버린 것이었지만. 비올렛의 얼굴에 미약하게 분노가 어렸다가 사라졌으나 이릴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앉아 있던 침대 옆을 툭툭 건드렸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작은 빗이 들려 있었다. 딱히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할 생각 만반이어서 내빼기도 그랬다. 비올렛은 이릴이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뱉고는 발을 옮겨 그녀의 앞에 앉았다.
털썩 앉는 움직임에 침대가 살짝 출렁였다. 이릴은 앞에서 아른거리는 하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빗어 내렸다.
스윽스윽 하고 빗이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왔다. 그 감각이 묘하게 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비올렛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나.”
“옛날 생각…?”
“동생에게 자주 해줬었거든.”
감기던 눈이 뜨였다. 이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머리를 손질해주는 메이드가 있었지만, 그 아이는 항상 내 방으로 와서 머리를 묶어 달라고 했었지. 언니가 해주는 것이 좋다면서…”
그립다는 듯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비올렛은 어쩐지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동생이라,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서는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릴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 된 것도 동생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닌가.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보고 동생을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비올렛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으나 등을 돌리고 있기에 이릴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자, 됐다.”
이릴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비올렛이 고개를 들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잘 모여 목덜미 아래에 공처럼 뭉쳐 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된다면 싸울 때 거슬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때, 예쁘지?”
“...응, 예쁘네.”
비올렛은 어색하게 웃었다. 떠오른 상념이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설사 이릴이 자신을 보며 동생을 투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마주한 사람이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놨으며,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릴이 비올렛을 내치는 것이라면 몰라도, 비올렛이 이릴을 내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그녀의 안에서 이릴이라는 사람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진득한 생각의 늪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준비가 끝나셨습니까?”
사용인의 말에 비올렛이 이릴을 바라봤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선 닥친 상황부터 해결하자. 비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