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화입니다.
리베치오의 본대가 낙원을 떠났다고 하나 노예경매소에 상주하는 인원이 적은 건 아니었다.
호위 병력만 하더라도 숙련된 병사로만 열 명 남짓 했고 운영을 위해 이곳에서 거주하는 인원은 그 2배였다. 이들 또한 미숙하게나마 병장기를 다룰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중의 삼분지 일이 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대부분 싸움에 익숙한 이들이 아니었으나 분명 숙련된 이들 역시도 포함된 숫자였다.
트레오는 포위 한 가운데에 서있는 우노를 바라봤다.
더 이상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몰꼴이었다. 피부는 새까맣게 죽어가고 있었고 눈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새빨갛다. 짐승처럼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나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트레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근처에 있던 동료하나가 그렇게 물었다.
트레오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제대로 된 상황파악을 하지도 못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우노와 싸우는 트레오의 모습을 본 단원 하나가 다급하게 울린 신호에 싸울 수 있는 가용 병력들이 모두 나와 이유도 모른 체로 싸웠다.
“몰라, 씨발.”
하지만 그 물음에 트레오가 대답해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도 우노가 어째서 저런 꼴이 됐는 지도 모르거니와 상황 설명을 하려면 노예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 까지도 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초를 서는 인원들이 노예에 손을 대는 건 공연한 비밀이었고 병사를 통솔하는 부장들 역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연한비밀이라도 비밀이다.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들킨다면 말이 달라진다. 운이 좋다면 반병신이 되서 짐꾼으로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노예로 팔리거나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기에는 시선이 너무 많아.’
트레오는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우노를 포위하는 진형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이 죽는 소동에 도망가야하는 것이 정상이건만 귀족이란 이들은 이조차도 유희거리로 삼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트레오에게는 다행이게도 아직 단원을 제외한 사상자는 없었다.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그들을 상대로 내기를 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리베치오 상단을 알아보는 자들도 있었다.
“노예가 탈출한 건가?”
묵직한 음성이 어깨를 짓눌렀다. 칠흑의 나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트레오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귀족의 물음에 침묵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
“침입자 입니다.”
“단순한 침입자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그런 것 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좋게 표현해도 우노의 몰꼴은 사람이 아닌 괴물의 것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트레오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금방 진압하겠습니다.”
“가능한가? 꽤 많이 죽은 걸로 보이는데.”
“미숙한 단원들이 죽어나간 것 뿐입니다.”
그 말에 남자는 코웃음쳤다.
“미숙한 이들이라? 그렇다면 미숙하지 않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얼마나 강한가?”
“둘이 모여 하급 마물 하나를 포획할 수 있습니다.”
포획이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원이 이곳에 일곱이나 있었다. 적으나 약하지 않은 전력이라는 뜻이다.
“부족하군.”
그럼에도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인원이 모여 있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우노를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명백히 하급 마물보다는 강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런 의미가 내포된 말에 트레오가 무어라 항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우노가 움직였다.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트레오의 방향이었다.
힘겨루기에는 답이 없었으나 물러날 수 없었다.
“도망치십시오!”
트레오는 이를 물며 앞으로 나아가려했다.
어깨에 묵직한 손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그를 뒤로 당겼다.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의 자리를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귀족이 자리했다.
트레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와서 달려든다고 한들 우노와 귀족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저 이름 모를 귀족이 한 행동은 자살에 가까운기행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내가 목숨을 살려줬다고 생각하게.”
남자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잘 벼려진 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을 말일세.”
한 번의 휘두름. 눈으로도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스르륵 떨어지는 우노의 목을 트레오가 멍하니 바라봤다. 이 정도의 실력자가 제국 내에 몇 명이나 있을까. 동공지진하던 눈이 빠르게 남자를 훑었다.
검집에 새겨진 창과 칼, 그리고 방패가교차한 문양을 보았을 때 트레오는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말을 입에 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제국근위대, 제국에서 가장 강하고 충성심이 높은 이들이 모여있는 집단을 말이다.
“섭섭하지 않게 사례해줄 거라 믿네.”
그는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트레오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저편에서 소동이 일단락 되었을 때 영진과 이릴은 여전히 갑자기 나타난 남자와 대치 중이었다.
남자는 코앞에 드리워진 창날을 보며 버벅거렸다.
“저, 저는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온 겁니다!”
“우린 그딴 거 필요 없어.”
영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보자마자 단숨에 쳐 죽이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일말의 도덕심이나 그런 것이 아닌, 맞잡은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부터 자신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했다. 남자들은 제 몸에 욕정을 품는다는 사실은 끔찍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완벽히 여성의 몸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으니까.
감옥에서 겪었던 일을 또 겪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영진은 지금 최고로 경계심이 높아져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다가오는 남성에게 말이다.
“당장 꺼져. 죽기 싫으면.”
“잠깐, 잠깐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윽!”
볼이 화끈거리는 듯한느낌에 자코모가 비명을 지르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옅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내 말,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영진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코모는 경계하는그녀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분명 검문소에서 보았을 때는 몸이 묶여 있었으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날로 부터 고작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도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핼쑥해졌고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하얀 옷은 피로 얼룩이져 있었고 머리는산발이었다.
이렇게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나 간헐적으로 다리를 떠는 것이 보였다. 그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미미한 움직임이었으나 그것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던 자코모에게는 알 수 있었다.
겁에 질려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말이다.
자코모는 볼을 감싸던 손을 내렸다. 그에 영진이 작게 움찔 거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두 발자국 뒤로물러나며 후드를 벗었다.
“제가 성급했군요. 제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였을 텐데.”
짧게 자른 머리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이릴은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아는 사람이야?”
“여기 오기 전에 검문소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던 거 기억 나?”
“몰라, 그런 거.”
영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큰일을 겪은 이후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런 사소한 것은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때 마차를 붙잡았던 문지기인 것 같아.”
“그쪽 숙녀분 께서는 기억을 하고 계시는 군요.”
이릴의 말을 자코모가 받으며 말했다.
“예, 저는 알레스의 문지기 자코모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직무를 내려놓은 상태지만 말입니다.”
“저희를 도와주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입니다, 숙녀 분. 저는 두 분, 아니 두 분을 포함한 노예로 잡힌 사람들을 구해드리기 위해서 온 겁니다.”
자코모는 조심스레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리베치오는 명백히 제국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인신매매는 반역 다음으로 중한 범죄. 연관된 자들은 모두 재산을 몰수하고 최대 사형에 이를 수 있는 일이지요. 저는 여러분이 이곳을 빠져 나와 리베치오의 악행을 증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사회정의구현 같은 거에 관심 없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봐.”
“영진.”
매몰차게말하는 모습에 이릴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으나 영진은 단호했다.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야. 악행에 대한고발? 그래, 말은 번지르르하니 좋지. 하지만 그 다음은? 문지기라는 직함이 얼마나 높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릴, 네가 말했지. 리베치오 상단을 후원하는 귀족들이 있다고. 우리가 리베치오를 고발한다고 쳤을 때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제 목을 조이려는 괘씸한 놈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영진이 살았던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집단의 악행이나 치부를 고발하면 고발한 사람은 살기 위해 공권력의 보호를 요청한다. 하지만 그 마저도 완벽하지 않아서 왕왕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이곳은 귀족이니 왕이니 하는 것들이 판치는 곳이었다. 개개인이 공권력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영진의 말에 깨달았는지 이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귀족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이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족속들이다.
그런 명예에 오물을 던지려고 하는 이들을 당연히 살려둘리가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다른 사람이나 찾아봐. 혹시 아냐? 목숨이 아깝지 않은 녀석이 있을지도.”
영진은 비아냥거리며 이릴을 이끌었다.
그대로 자코모를 두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움직여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또 뭐야? 안 비켜?”
영진이 짜증을 내며 말했으나 자코모는 묵묵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릴 막겠다는 거야?”
“그게 아닙니다. 제가 출구까지 호위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 말에 눈을 굴려 위아래를 훑어본다. 그리고는 코웃음쳤다.
꽤 단련된 몸이기는 했으나 자신보다는 강하지 않았다. 만약 싸운다면 몇 분 걸리지 않고 기절시킬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나약한 주제에 누굴 지킨다고 말하는 건지.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필요 없…”
“좋아요. 출구까지만 동행하는 걸로 하죠.”
“이릴.”
영진이 그녀를 불렀으나 이릴은 단호하게 말했다.
“영진, 내가 기억하는 낙원의 모습은 몇 년 전의 것이야. 그마저도 한 번 밖에 온 적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아. 또 그 사이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고.”
“상관 없어. 우리끼리도 충분해.”
“아니, 충분하지 않아. 저 분과 동행하고 싶지 않은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영진, 우린 시간이 없어.”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으나 영진은 숨을 깊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 중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젠장, 좋아. 함께 움직이도록 하자고. 자코모라고 했던가?”
영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화살이 박혀 눈이 돌아간 자코모가 보였다.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을 굳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코모의 몸이 무너지며 땅으로 쓰러졌다.
“이릴.”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삐이익- 그녀들을 발견한 단원의 신호가 높게 울려퍼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두 사람은 출구를 찾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