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4화입니다.
이릴이 말하길, 눈은 보석을 연상캐 하는 자주빛을 띄고 있다.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는 설원을 보는 듯한 순백이라하였고 외모는 예술가가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음유시인이 그것으로 노래를지을 것 같다고 말했다.
눈매가 조금 올라가 있어서 드세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가녀린 여자애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거기에 머리 위로 길게 솟아난 큼지막한 토끼귀는 머리색과 닮아 새하얗고 무척이나 푹신하다고 말하며 그것을 조물딱 거렸다.
영진은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 길고 장황하며 쓸데 없이 주관적으로 꾸며진 말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머리는 새하얗지도 않았고 또 눈동자는 자주빛이 아니었다. 둘 다 평범한 검은색이었고 머리 위에 큼지막한 토끼귀 역시도 달리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도 아니었다.
자신은 평범한 남자였다. 덩치가 커서 가녀리지도 않았다. 눈매가 올라간 건… 잘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다들 제 눈을 보고 피하기도 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명백하게 남자였다. 이릴의 말처럼 여자가 아니라.
그러나 아무리 그리 생각을 한들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생히 떠올랐다.
전투 중 기묘하게 낮아져 있던 시야. 짧아진 팔다리. 미약하게 무게감이 느껴졌던 가슴과 어쩐지 허전하던 하복부.
영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로 여자가 되었다고.
“말도 안 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어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정말로 여자가 됐다고?”
‘여자가 됐다, 라니?’
마치 원래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이릴은 속으로 의문을 내비췄다. 그녀가 보기에 영진은 영락없는 여인였다.
“이건, 이건 이상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영진? 괜찮아?”
“괜찮냐고? 지금 내가 괜찮은 걸로 보여?”
영진은 격정적으로 외쳤다. 제 몸을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런 꼴이 되니 체감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 것을 느끼는 건 아주 좆같은 일이었다.
분노와 불안, 짜증이 뒤섞여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때려 패고 싶은 심정이야. 아니, 그렇게 해도 이 기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죄다 부수고 내 머리를 벽에 박아서 기절한 다음에야 겨우 가라앉을 것 같다고!”
만약 밧줄로 몸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자력으로 풀 수 있었더라면 실제로 행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영진은 밧줄을 풀지 못했다.
그것이 더욱 화를 돋구었다.
“영진, 조금 진정해야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
“진정? 지금 진정이라고 했어?”
“내가 말 실수를 한 거라면 사과할게. 하지만 지금은 진정해야해. 조교사가 올 지도 몰라…”
조교사라는 말에 근처에 있던 노예들이 몸을 떨었다. 이지를 상실하였으나 몸에 세겨진 공포에 반응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나를 이 따위로 만들어놨는데 진정하라고? 너 같으면 진정할 수 있겠어?!”
“영진.”
“닥쳐! 내게 명령하려 하지마!”
쿵쿵! 벽면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마차 안에서 옅게 들려오던 숨소리마저자취를 감췄다.
이릴은 그것이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그들은 두 번 경고를 하지 않았다.
영진이 몸을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성이 풀릴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조교사가 영진을 데려갈 것이었다. 그것만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조교사라고 하였으나 그는 조교사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고문기술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노예를 순종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목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반항적인 노예가 있다 싶으면 자신의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끊임없는 고통을 주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종의 본보기처럼 말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마음이 꺾인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대상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릴은 영진이 마차 안에 있는 이들처럼 되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움직였다.
“미안. 조금 답답해도 참아.”
“닥, 카학!”
무릎베개를 풀며 빠르게 영진의 위로 올라탄 이릴은 손을 뻗어 목을 졸랐다.
단순히 목을 조르는 것은 괴롭기만 했기에 빠르게 기절시킬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 압박했다.
영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몸을 들썩이며 올라탄 이릴을 떨어뜨리려 했으나 그녀는 마치 로데오를 하는 사람처럼 버텼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영진은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빠르게 어두워지는 것 역시도. 발버둥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이릴의 몸을 튀어오르게 할 것 같았던 힘도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행동을 멈췄다.
“...미안해.”
흐릿한 의식 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악!”
영진은 발작하듯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보이고 가습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끝에서 맡아지는 미약한 약품냄새에 병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영진은 황급히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제대로 달려 있을 게 있었고 없어야할 건 없었다. 완전한 남자의 몸이자 자신의 몸.
‘젠장, 뭐 그딴 꿈을 꿔서는.’
여자가 되는 꿈이라니.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꿈이었다.
영진은 몸을 일으키려다 복부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병원 복을 걷어 올리니 붕대로 감긴 몸이 보였다. 망할 꿈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칼에 찔리는 큰 부상을 입었다는 걸 떠올렸다.
병원에 있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은 듯 했지만. 누군가 구급차를 불러준 덕분일지도 몰랐다.
영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너스콜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늙은 간호사가 들어왔다.
‘저 사람…’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전에 크게 다쳤을 적 병원에 실려갔을 때도 저 사람이 있었다.
그제야 영진은 자신이 있는 곳이 그때의 병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도 지금 있는 병실에서 누워 있었다.
간호사는 영진에게 몇 가지를 묻고는 차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다시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병실은 금방 조용해졌다. 6인실이었으나 침상을 쓰고 있는 환자는 영진 혼자 뿐이었다.
간호사가 나간 뒤 영진은 하릴 없이 멍하니 있다 눈에 띈 리모콘에 손을 뻗었다.
예전부터 티비를 잘 보지 않았다. 보육원에 있었을 때는 원장이 틀어주는 어린이 프로그램 정도는 봤었지만 자립하고 나서는 거의 보지 않았다.
애초에 티비도 없었거니와 그에게 집은 잠을 자는 곳이나 다름 없었다.
버튼을 딸깍이며 채널을 돌린다. 신호가 영 좋지 않은지 나오는 채널이 없었다. 그나마 어린이 프로그램 정도.
가끔 뉴스 같은 것이 틀어졌으나 영진은 소리도 듣지 않고 넘겨버렸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결국 영진은 티비를 껐다.
리모콘을 아무렇게나 던져 둔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움직일 때마다 복부가 아려왔으나 가만히 있다가는 지루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환자용 슬리퍼를 신고 곧바로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그처럼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환자들 투성이었다.
한량처럼 어슬렁거리며 복도를 거닐던 영진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리고는 복부를 부여잡고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야이 씨발놈아!”
영진이 고함을 질렀다.
저 멀리 자신의 복부를 칼로 쑤셨던 양아치가 보였다. 인상이 흐릿했지만, 모든 감각이 저 놈이 그 녀석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영진이 소리를 지르자 양아치는 화들짝 놀라며 도망쳤다.
복부가 쿡쿡 쑤셔왔으나 이를 악물고 도망가는 놈을 쫓았다.
‘반드시 잡는다!’
비겁하게 칼을 써서 사람을 죽이려고 해? 영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따지고 보면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영진이었으나 적어도죽일 생각은 없었으니 잘못한 건 저쪽이라는 생각이었다.
양아치는 비상계단을통해 도망쳤다. 영진은 곧바로 따라갔으나 반층 정도 차이로 자꾸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조바심에 난간을 뛰어 넘어 떨어질까 생각했으나 정말로 그랬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영진은 어쩔 수 없이 배를 부여잡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1층으로 향하는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1층 로비 쪽으로 도망친 것 같았다.
영진 역시도 닫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씨발.”
로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픈 사람이 뭐 이리 많은지 시선이 닿는 곳 마다 북적거렸다.
영진은 된소리를 연신 내뱉으며 주변을 훑었다. 인파 사이로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양아치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에 불을 키며 달렸다. 길을 가로 막는 사람을 밀치며 인파를 헤쳐 나갔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꼬마애 하나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
“영진아! 괜찮아?”
본래라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목소리에 영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엉덩방아를 찍고 눈물을 글썽이는 남자아이와 그것을 달래는 부모가 보였다.
그들은 아이를 영진이라 부르며 달랬다. 영진이라 불린 아이는 훌쩍거리다가도 금새 부모의 말에 눈물을 그쳤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영진은 어릴적 예방접종을 맞기 위해 병원으로 왔었다.그 날 따라 유독 사람들이 많았고 어렸던 그는 인파에 밀려 넘어졌었다.
‘하지만, 어떻게?’
영진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다 홀린 듯 그들에게 걸어갔다.
부모님은 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사고를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모습이 영진이 기억하는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영진이 다가가자 그들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니?”
“어…”
그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은 영진을 완전히 타인처럼 대했다. 그는 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 영진이에요. 엄마랑 아빠 아들이요.”
“영진이라고? 우리 아들은 여기 있는데…”
“게다가 아들이라니, 넌 여자애잖니.”
“여자애라뇨. 저는 남자… 어?”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영진은 목을 더듬었다.
볼록 튀어 나와있어야 할 목젖이 만져지지 않았다. 고개를 내리니 부풀어오른 가슴과 가느다란 팔다리가 보였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 어? 이럴리가 없는데…”
영진은 마구 몸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자였던 몸이 한순간에 줄어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그러고 있으니 눈앞에 있던 가족이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기다려요!”
영진은 그들을 따라 뛰었으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팔이 몸 쪽으로 달라붙으며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언가 자신을 구속하는 듯한 감각이 몸을 죄여왔다. 그럼에도 영진은 계속해서 달렸다.
“가지 말아요!”
그렇게 외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일순간 영진의 몸이 하늘을 부유했다. 찰나의 부유 끝에 추락한 몸이 땅 위를 뒹굴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킬 수 없었다. 돌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영진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울부짖었다.
“나도 같이 가게 해줘요!”
나를 두고 가지마.
-
“가지마…”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 이릴은 잠꼬대를 하는 영진을 바라봤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고운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입술을 오물거리며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나를 두고 떠나지 마, 같은 말을. 아마도 납치 당하기 전의 일을 꾸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릴은 영진을 가엾게 바라보다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디에도 가지 않을게.”
너를 혼자 두지 않을게, 절대로.
그런 말을 속삭이니 영진의 고개가 손에 가깝게 다가왔다. 온기를 탐하는 듯한 모습에 이릴은 슬프게 웃었다.
그녀의 성격이 드센 건 사실이지만, 이처럼 사나운 것은 역시 갑작스레 닥친 상황 때문일 것이었다.
남자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지만.이릴이 알기로는 성별을 바꾸는 방법은 세상에 없었다.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사악한 마물의 술법이라며 신전에 의해 정화라는 이름으로 산 체로 불태워져 버릴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사실 남자였던 간에 눈앞에 슬픈 목소리로 괴로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릴은 그녀의 머리맡에서 조용히 허밍을 흥얼거렸다.
일찍이 이복동생에게도 해주었고 엘프인 어머니에게 들었던 옛 자장가를.
마차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로 낮은 멜로디가 마차 안을 채웠다.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마법 같은 흥얼거림에 마차 곳곳에서 숨죽여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진의 표정도 한결 나아지는 것이 보였다. 이릴은 그녀의 볼 위로 흐른 눈물을 닦아주며 자장가를 이어나갔다.
부디 좋은 꿈을 꾸길. 이릴은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