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179화 - 이길 수 없는 싸움
카이산은 검끝이 흔들리는 것을 태연하게 바라보다 툭 내던지듯 말했다.
"흔들리는군."
난 이를 악물고 그 말을무시했다.
그리고 더욱 손에 힘을 주고쏜살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카이산은 이곳저곳 엉망인 몸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나의 모습을 마음에 든다는 듯 바라보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다리다."
그리고 나의 찌르기를 부드럽게 피한 카이산이 내 다리를 향해 강맹하기 그지없는 발차기가 날라온다.
으직!!
"끄아아악!!!"
난 다리가 부서지는 감각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발악을 하듯 검을 휘둘렀지만 당연하게도 카이산은 몇발자국 뒤로 걸어가 그 검을 피했다.
그의 몸에 1cm도 되지 않을 정도로 스쳐지나가는 검끝, 그는 검의 길이와 내 팔의 길이 그리고 내 검끝이 어디까지 닿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소름끼치는 거리감각과 동체시력 난 그의 눈앞에서 벌거벗은 듯한 감각을 느낀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음은... 땅을 기게 해주지"
카이산의 눈에 음험한 기운이 감돌았고 칼이 지나가자 마자 곧바로 남은 내 다리마저 부러트렸다.
뿌득..!
"끄으읍!!!"
다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아찔할 정도의 고통, 두 다리가 부러진 난 그대로 벌레 마냥 땅바닥을 굴렀다.
"끄으윽!! 흐으!! 윽!!"
이를 악물고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견디려 노력했지만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아아!!!!'
그 동안 상처를 입으면 아내의 회복능력 덕분에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까 난 오른팔과 양 다리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것만 같았다.
'크으윽!! 흐으으윽!! 으윽! 젠장! 젠장!!! 팔... 다리... 전부.. 뼈가 완전히 아작난 느낌이야... 흐으으...어떻게해야... 이길 수 있는거지...?'
기동까지 봉쇄당한 나는 머리속에 패배라는 글자가 세겨지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순간이지만 질 수 있다 생각한 나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안돼! 약해지지마! 아직... 아직 기회는 남아있어!!!'
그래... 아직 왼팔이 움직인다.
기회는 분명히 있다.
카이산은 양 다리가 부서져 벌래처럼 기는 나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욕... 스럽게도 그는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기다려주고 있었다.
치욕... 아니 치욕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특히 나처럼 약한 놈이라면.
아내를 빼앗길 정도로 나약한 놈이라면 겨우 이 정도에 치욕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
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연기를 하며, 실제로도 정신이 뚜렷하지 않지만... 그래도 꾹 참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그는 강하기에 자신감이 넘친다.
분명 내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맞받아치겠지.
그래도... 난 발악을 해야한다.
벌래같이 꿈틀거리는 것 밖에 못한다 하더라도 내 입에서 패배라는 단어는 나와서는 안된다.
다시 한번 더 격통 속에 몸부림치며 의지를 다진 나는 그가 마무리를 위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남모르게 눈을 빛냈다.
저벅... 저벅... 저벅...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다가온다. 그리고...
저벅...
바로 눈앞에 그의 커다란 발이 보인다.
지금이 마지막 시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나는 곧바로 그 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는 나의 마지막 발악을 비웃듯 내 검을 발로 밟아 깨트렸고, 그대로 쏜살같이 들어올렸다가 내 왼팔을 향해 발을 내렸다.
으직!!!
"끄으으윽!!!!"
왼손에서 느껴지는 뼈가 으스러지고살이 터지는 것만 같은 아니... 말그대로 터져나가는 감각에 뇌가 미쳐날뛴다.
딱딱딱딱
격통 속에서 나는 반사적으로 이빨을 맞부딪히며 기절할 뻔했다가 턱에 온 힘을 줘 벌린 다음 혓바닥을 깨물었다.
입안에 샘솟는 핏물과 혓바닥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잠시 감각이 쏠려 정신이 돌아온 순간! 나는 눈 앞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검의 파편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잘그락!!
입가가 찢어지고 혓바닥이 칼날에 난도질 당한다.
그럼에도 난 이게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두 눈을 불태우며 턱에 힘을 잔뜩 줬다.
카이산은 승리를 확신한 듯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가장 큰 검조각을 무는 모습을 보고 정색을 했다.
"힉! 힉! 힉!"
난 그의 표정이 꽤나 우스워 온몸을 불태우는 것만 같은 격통속에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내 입에 물린 검조각은... 그대로 그의 다리를 향해 찔러넣어졌다.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카이산, 난 마지막일격을 찔러넣은 다음 턱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툭!
입안에서 빠져나온 검조각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내가 입으로 문 부분이 붉은색의 살점과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검조각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은 땅바닥을 적셨고 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검조각 위에 머리를 떨어트렸다.
검은... 생각이상으로 따뜻했고... 생각 이상으로... 끈적거렸다.
입안에서 혓바닥 살점과 핏물이 스며나오고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시야를 흉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는 카이산에게 들어올렸다.
그의 종아리에는...
"큭...! 큭...! 큭...!"
옅지만... 확실하게 가느다란 핏물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진 나는 눈썹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눈썹을 들어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한 탓일까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카이산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었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썹은 야속하게도 서서히 감겨왔다.
난 마지막으로 나에게 달려드려는 카이산과 그를 막아서는 그레이스... 내 아내를 바라보며 달콤하디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움찔...
난 정신이 드는 것을 느끼며 무겁기 그지없는 두 눈을 떴다.
나의 눈에는 산들바람이 들어오며 하얀 커튼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들어왔다.
창문, 머리에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 등에 맞닿은 푹신한 침대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그레이스가 나의 아내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황금빛햇살을 받으며 앉아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햇볕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났다.
그리고... 나에게 만큼은 부드럽고 포근하기 그지없는 푸른빛 눈동자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비춰지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지만... 난....
이겼다.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것이 당장이라도 터져나올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나는 참지않았다.
"이긴... 거야?"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는 나의 말에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당신이 이겼어. 후후후... 역시 내 남편이네"
포근해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들어있다는것을 알아차린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에 걸린 초커에 시선을 보냈다.
그런 나의 시선을 느낀 아내는 내 손을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연기 같아보여?"
".... 아니. 연기 같아 보이지 않아서... 그래."
".... 후후후 아무래도 당신한테 다시 반해버렸나봐. 자 한번 느껴볼래?"
부드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은그레이스가 내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두눈을 감은 나는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가슴의 감촉과 함께 두근! 두근! 두근! 힘차게 뛰고있는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를 느꼈다.
그리고 두눈을 떠 수줍게 미소를지으면서 뽀얀 얼굴을 상기시킨 아내의모습을 눈동자에 담으며 난 기습적으로 훅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쏟아냈다.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난 당황하며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 가, 갑자기 왜..."
그레이스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움찔 몸을 떨더니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죄책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미, 미안, 갑자기, 난 괜찮..."
그리고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난 머리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의 감촉과 코속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체취를 느끼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윽... 그, 난, 흐윽...!"
"쉬이잇... 쉬잇... 많이 노력했으니깐... 조금은... 응석을 부려도 괜찮아."
".... 크윽... 흑...! 그레이스... 여보... 나... 불안했어... 당신을 당장이라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어... 흐윽..."
"... 괜찮아... 이제 어디도 떠나지 않을게... 함부로... 몸을 허락하지도 않을테니깐... 오늘은 마음껏 울어도 괜찮아..."
"그레이스...! 흐으윽...!! 그레이스... 사랑해... 정말로..."
".... 응 나도 사랑해..."
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길게 길게 눈물을 흘렸다.
속에 담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모두 씻겨내듯 길게...
"큼 크흠! 흠! 저.. 여보 다른 사람한테는...."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온 나는 부푼 눈에 묻은 눈물을 닦아내며 어색하게 말했다.
아내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아아 걱정마세요. 이안 어린이. 후후후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그녀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에 얼굴을 빨갛게 붉힌 난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 그만...."
"킥킥킥킥 아냐 아냐 진짜 말 안할게 우리 이안 어린이가 무서웠다고 엉엉 울었단 사실은 절대 말안할게."
"윽... 그러니깐그레이스.. 넌... 에휴... 말을 말자..."
"큭큭큭 아 머리 쓰담쓰담도 그만할까?"
난 그녀의 말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
"... 흐흥~"
나의 말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낀 모양인지 살짝 얼굴을 붉힌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머리카락을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고 곧 방안은 조용해졌다.
잠시 어색하면서도... 따뜻한 가슴이 간질거리는 공기를 즐기던 순간...
쾅!!!
"왕자니이임!!!"
아주 요란하게 세실이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나와 그레이스는 황급히 서로에게서 떨어지며아무것도 모른척 고개를 돌렸고 세실은 날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지 곧장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휙!
번지점프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며 몸을 받아낸 후 주위를 줄려는 찰나 세실이 눈물을 글성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왕자님... 왜 그런 짓을 하신건가요... 으우우우우 정말...!!! 바보! 바보! 바보오!!"
투닥투닥 나의 가슴을 두들기는 세실, 난 난처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설득할려는 찰나 그녀가 내 가슴에 눈물을 닦아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알고있어요. 왕자님이 모두를 위해 그랬다는 것 쯤은... 하지만... 저도 좀 생각해주세요.."
"..... 미안..."
잠시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던 세실은 고개를들어올려 보라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은 색채에 잠시 나도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생긋 귀엽게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드럽게 내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기습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쪽... 안그러면... 질투나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구요..."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녀가 수줍게 홍조를 띄우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그레이스에게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아름다웠다.
잠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은 더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고 결국 내 시선을 버티지 못해 그녀를 뒤따라 들어온 클로디아의뒤로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숨었다.
피식...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그레이스가 웃었고 나 또한 같은 마음이었기에 미소를 지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눈 후 나는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야만인들은?"
나의 물음에 그레이스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