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태수가 처음으로 본 천마신교의 공주는 굉장히 뇌쇄적이었다.
등까지 기른 긴 흑발에 얼굴은 희고 고운데, 입술을 새빨갛다.
세계관 자체는 오래 전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게임 자체가 밤꽃무림인지라 화장 기술이 현대 문명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는 게 함정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입술을 저렇게 새빨갛게 분칠하는 여자는 밤꽃무림에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긴 생머리의 조준희 같은 느낌이었다.
태수에게는 사실 그닥 매력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기 존나 세보여-'
태수의 취향은 확고했다.
청순섹시큐티
딱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갖춰도 되겠으나, 논외로 가장 있어서는 안될 것이 기 세보이는 것이었다.
오히려 딱 봐도 공주의 부하처럼 보이는 저 여자가 청순한 느낌이 물씬 나는 게 괜찮아보였다. 딱히, 기 세보이지도 않고.
'아, 그런데 별로다'
밤꽃무림 제작진이 아주 다양한 히로인 캐릭터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알겠다.
무려, 레즈비언을 넣어버렸으니.
다른 남자한테는 레즈비언이 따먹고 싶을 정도로 성적 매력 포인트가 있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동성애를 좀 역겨워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심히 감점이었다.
물론, 자매덮밥과 모녀덮밥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주홍희의 모습은 애욕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뭔가 약에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주홍희의 시선과 태수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고, 주홍희는 태수가 앞에 서있음에도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보란 듯이, 더욱 더 정혜사태의 몸을 희롱하며 갖고 놀았다.
'뭐,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딱히 없어보이는군-'
누군가 7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당문의 사람들 몇몇과 청성파와 아미파 사람들이었다.
'딱 봐도 천마신교의 공주는 초절정고수 막바지단계-'
기척을 그녀도 느끼고 있을테니 알아서 적당히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막나가자는 것인지 공주는 멈추지 않고서, 계속 할 일을 했다.
'광녀狂女인가?'
실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쯤, 아미파의 멸절사태는 마침내 그 이상성욕으로 얼룩진 광경을 직접 보게 되었다.
멸절사태는 아미파에서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무림맹 대표로 자신이 나가지 않고 무림을 배우라며 일부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제자인 정혜사태를 무림맹 대표로 보냈었다.
덕분에, 비교적 나이가 어리고 소심했던 정혜사태는 무림맹 회의 안에서 말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혜아야!"
태수와 비류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 당천휘와 당가려가 있는 곳으로 간 이후였다.
선한 인상의 멸절사태의 얼굴이 마치 악귀가 씌인 듯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공주,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오-"
자연스레 기운을 끌어올리는 멸절사태의 앞에서 천마신교의 공주는 오히려 도발적으로 혀놀림으로 입가 주위를 닦는 시늉을 보였다.
"그, 그야말로 소문대로 미친 년이구나"
뇌쇄적이고 요염한 태도로 화답하는 천마신교의 공주에 멸절사태마저 이성을 잠시 내려놓을 정도였다.
멸절사태의 단전 속에서 내공이 맹렬한 기세로 주천하기 시작했다.
"멸절사태, 화가 나고 분한 건 알겠지만 여기서는 참으셔야 하오. 그래도 천마신교의 공주이니, 무림맹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오"
청성파의 운임이 나서서 멸절사태를 말렸다.
"본 문파의 문원이 저렇게 되었고 현장에서 내 눈으로 이렇게 직접 똑똑히 보고 있는데-! 그럼에도 무림맹 차원에서 일을 진행해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러라고 있는 게 무림맹 아니겠소?"
운임의 말을 차갑게 해석하면 무림맹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행동해라, 나 다름없었다.
그제서야 멸절사태는 운임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노려보고는 신음을 내며 몸을 떨고 있는 정혜사태를 품에 안았다.
"우리 혜아, 도대체 무슨 일을-"
멸절사태가 정혜사태의 맥을 짚으니, 내공의 운행이 방금 막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필시 산공독의 영향일 게 분명했다.
'산공독까지 이용해서, 우리 혜아를-!'
마음의 평정을 찾는 수련을 끝없이 하는 비구니라 할 지라도, 멸절사태는 차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천마신교의 공주, 이 일은 반드시 무림맹에 회부해서 천벌을 받게 해줄테니 그리 아세요!"
청성파와 아미파 일행은 이번에 사천에 예고된 괴물 침공을 성공적으로 잘 막아내, 이렇게 사천명루에서 단체로 회식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름 중요 인사인 멸절사태가 그렇게 아득바득 화를 내고, 정혜사태를 품에 안은 채 나갔으니 회식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야말로, 미친년이었구나"
"방금, 뭐라고 했나?"
"아, 아닙니다"
남제운은 완전히 분탕질 쳐놓은 주홍희의 작태에 차갑게 조소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이후, 결국 천마신교 공주를 대표로 한 사신 일행은 무림맹의 회의 결과에 의해 강제로 무림맹 영역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에 멸절사태는 공주의 사지四肢 중, 왜 하나라도 자르지 않고, 그냥 내보냈냐며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무림맹은 대외적으로 천마신교를 건드리는 건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당천휘와 당가려가 있는 곳으로 다시 되돌아 온 태수는 '공주가 미쳤다'라는 의미로 머리 위에 손가락을 뱅뱅 돌리는 손짓을 했다.
"무림맹이 아주 우습게 보였나보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저런 짓을 벌여?"
당천휘는 그렇게 말하면서 '천마신교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라며 피식- 웃었다.
"공주는 제가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비류가 한마디 거들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친년이지.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긴 했는데-"
태수는 아까 보았던 주홍희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뭔가 뇌새적이면서 요염하긴 했는데, 눈시울이 붉은 듯한 느낌이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여기 있으셨군요. 어딜 가셨나 했는데-"
당우민이 당문의 사람을 이끌고 사천명루로 오는 길에, 당천휘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왔다.
당문 역시 거의 피해가 없는 채로 이번 침공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고, 딱히 재정비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아 바로 이렇게 식사를 하러 사천명루에 왔다.
'오늘 같은 날은 사천명루에 가서 실컷 맛있게 먹고 와야지-'
대충 이런 생각으로 왔다가, 아버지를 보고는 조금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당문에서는 그래도 자신이 가주로서 어른이었는데, 아버지가 있으면 전혀 어른인 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딱 보면 모르겠느냐? 아주 귀중한 손님이시다"
"아, 결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전 당문의 가주, 당우민이라고 합니다"
비록 40대 중후반의 나이였지만, 당우민은 어린 태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보내왔다.
"말 편하게 하시지요. 저보다 한참 선배이신데"
"아, 그래도 되겠나? 허허-"
부자 관계임에도 당우민과 당천휘는 확연히 달랐다.
당천휘는 호탕하고 쾌활한 부분이 있는 반면, 당우민은 침착하고 진중했다.
'그 아버지께서 저렇게 귀중한 손님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분명 이 사내에게 무언가 있다는 것인데-'
당우민은 태수와 그 옆에 있는 자신의 딸을 힐끗 번갈아보았다.
설마?
태수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않는다는 듯, 당천휘를 조금 노려보았다.
당천휘는 그런 태수의 시선에 모르는 척, 능청스레 먼산을 바라보았다.
"에휴-"
태수는 체념했는지 한숨을 쉬었고, 그런 태수에게 당천휘의 장남인 당우혁이 인사를 건네왔다.
"당문의 당우혁이라고 하네. 할아버지가 왜 자네를 귀중한 손님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태수라 하오"
"본가나 출신은 딱히 없나?"
"없소"
"흐음-"
당우혁은 결정적으로 뒷배경이 없다는 말에 태수를 아랫것으로 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계속해서 결례를 보이는 당우혁에 참다 못한 당천휘가 호통을 쳤다.
"예끼- 이 녀석아, 귀중한 손님이라고 했거늘 그게 무슨 못 배워먹은 예의버릇이냐!"
"할, 할아버지-"
그래도, 손자라고 지금껏 자신앞에서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던 할아버지였다.
당우혁은 당황한 나머지, 턱근육이 흔들려 다소 하관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하, 하지만 이 사내에게 전혀 내공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좁디좁은 네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무공의 전부인 줄 아느냐?"
-오라버니, 이 분 엄청 강해요
당가려가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는 오라버니를 위해 전음을 보냈지만(차마, 할아버지를 이겼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태수의 초감각으로 그 전음마저 생생히 들리고 있었다.
히죽-
상황이 나름 재미있게 되어 태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태수는 당문의 위에 설 수 있는 관계로 연이 쌓아지면 사실, 이런 관계는 딱히 상관없었다.
곧, 당가려는 전음으로 오라버니에게 할아버지까지 이겼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되었다.
'기껏 해봐야 저 나이에 얼마나 강하다고'
당우혁은 할아버지가 인정한 듯한 사내를 비무로 이겨서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생각이었다.
늘 당문의 영웅인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큰 마음의 짐이었다.
이 기회에 할아버지의 인식을 바꾸리라.
그런 호기豪氣가 당우혁에게 드러나자, 당가려는 재차 말리려 했지만 이미 오라버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이후였다.
"그렇다면 저는 이 자와 비무를 해서 과연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견식을 넓혀보이겠습니다"
당천휘는 손자의 말에 깊은 탄식음을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능은 나의 반의 반도 안되면서, 성격은 완전 나를 닮았구나'
당문에는 당천휘의 영웅담이 당문 아이들의 동요처럼 들려오곤 했다.
그 어떠한 일에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맞붙는 모습.
딱히, 정의로워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끓어오르는 혈기만으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런 아이들 중에는 당우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회에 혁이에게 무공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려줄 기회는 되겠으나-'
당천휘의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과연, 이 비무 신청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을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새파랗게 어린 고수는 당문과 연이 가까워지는 걸 굉장히 꺼려했다.
뭐-
저 혈기 왕성한 시기에 어딘가에 속박되지 않으려고 하는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그런데-
'어? 녀석, 표정이 뭔가 이상한데-'
태수는 이 상황 자체에 웃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차오르는 웃음을 억지로 막느라, 목선에 핏발이 설 정도였다.
결국, 태수는 참지 못하고 다소 억눌린 웃음소리를 내버렸다.
"푸후훗-"
"무, 무슨!"
당우혁은 그 웃음소리를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생각하여,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하면 웃음을 잘 참지 못해서-"
태수는 아무렇게나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둘러댄 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비무합시다. 좋네요. 피차 혈기가 끓어오르는 젊은 나이에, 먼지바닥에 몸도 한번 같이 뒹굴고 예? 좋지 않습니까. 으하하하-"
예상치 못한 태수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당천휘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당우혁은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자신의 비무를 그저 철없는 사내의 혈기로 둔갑시켜버리자, 미간이 깊어질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다.
가문의 어른들 앞이라 가까스로 참고 있기는 했어도, 자연스레 그의 단전 속의 내공이 운행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 일단 밥은 먹고 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하-"
태수는 자연스레 기세를 끌어올린 당우혁이 아무렇지 않은 듯, 사천명루의 진미를 여유롭게 즐겼다.
"앉고 식사나 하거라"
"할아버지-"
"말을 하면 좀 들어라, 이 녀석아!"
"알, 알겠습니다"
아무리 흥분했다고 한들-
당우혁은 할아버지 앞에서 객기를 부릴 순 없었다.
그렇게 사천명루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태수는 당천휘의 소개를 받으며 당문 본원으로 들어왔다.
'엄청 크네-'
정천맹에서는 남궁세가 다음으로 가장 세력가이니, 확실히 클 수밖에.
무가가 관리하는 구역이 커질수록, 그에 따른 수입이 막대하게 들어온다.
그래서, 무가는 늘 인재관리에 민감했다.
인재는 곧 세력가의 영역으로 표현되었으니까.
"어떻게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부탁하겠네"
"뭐, 잘해봅시다"
곧 당문의 비무장에 태수와 당우혁이 올라왔고, 비무 감독은 당우민이 맡기로 했다.
당우민의 손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비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걸 약속으로 했고 마침 그 손날이 아래로 내려왔다.
비무가 시작되었고, 당우혁은 긴장이 여력한 낯빛으로 태수의 움직임을 경계했고, 태수는 여유롭게 두 손으로 뒷짐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