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
졸지에 태수에게 껴안긴 선하는 자신이 지금껏 생각해왔던 게 어긋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그러면 내공이 없던 게 아니었던 거야?'
그렇다면 전이나 지금이나 왜 내공이 없는 걸로 느껴졌을까?
'폭포에서는 내공이 느껴지지 않았고, 움직임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설마, 그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무공의 경지를 읽어낼 수조차 없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을리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말도 안되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꼬옥-
조금 정신을 차린 선하는, 고꾸라지듯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태수의 품 안에 깊숙히 안겼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단단한 수컷의 몸을 옷 사이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선하는 심히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절 속, 속이신 건가요?"
"뭘 속여, 네가 알아서 속은 거잖아"
"그, 그렇긴 해도. 너, 너무해요오-"
태수는 품 속에 안긴 선하를 놔주었고, 주변 시선을 느낀 선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이렇게 끝이야?"
"무림인들의 비무라고 해서, 와봤더니 뭐 별 것도 없구만 그래!"
"괜히 보러왔어"
"둘이 어울려요!"
마을사람들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의 남녀를 보며, 둘을 부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
"가가는 여자에게 작업을 치는 게 아예 몸에 배어있군요-"
그런 태수의 여성편력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한 소혜는 한숨을 쉬었다.
저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가 태수의 주변에 늘어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안돼, 이런 못된 생각. 가가哥哥가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족해"
소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선하는 사뭇 진지한 자세로 태수에게 물었다.
"실,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볼 게 있어요"
"말해봐"
"당신의 무공은 어느 위치에 있나요? 물, 물론 이렇게 물어보는 게 엄청난 실례인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무림을 위한 일이니깐요"
"푸훗- 선하야"
"네.. 넷?"
자신의 이름이 원래 이렇게 달콤했었나?
선하는 태수가 자신의 이름을 적당한 울림을 가진 저음으로 불러주자 귀가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미래시로 본 네가 걱정하는 일.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그런 일은 내가 반드시 막을테니까"
"아-"
확신에 찬 태수의 모습에 선하는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게 바로 한 눈에 반했다는 감정일까?
간질거리고 아릿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선하가 태수에게 뭐라 말할려던 찰나-
태수는 등 돌려 모여있는 마을사람들에게 외쳤다.
"오늘은 마을 축제입니다. 지금껏 먹지 못했던 고기, 오늘 실컷 먹읍시다!"
태수의 말에 하운 마을에 일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때 했던 말, 진심이었어!?'
마을사람들은 태수가 앞만 보고 달리는 말에게 먹을 수 없는 당근을 미끼로 쓰듯, 실제로는 고기를 자신들에게 나눠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태수의 인성을 너무 저평가했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와아아아-! 새로 오신 관 대리인님 만세!"
마을사람들 중 한 명이 그렇게 크게 외치자 나머지들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관 대리인님 만세!"
"달의 여신님 만세!"
"고기 좀 배터지게 먹어보자!"
태수는 오코의 육류가 쌓여져 있는 곳으로 갔다.
'보관도 힘든데, 크게 베풀자'
겨울이면 몰라도 봄이 오고 있는 판국에, 살아있는 가축도 아니고 오코의 시체가 부패하는 걸 막을 방도가 없었다.
아예 못 먹게 될 바에, 마을사람들이 고기를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했다.
태수의 몸 속에서 거미실이 출수되어, 산처럼 쌓인 오코의 육류를 운반하듯 들어올렸다.
현경의 고수에게 불을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으로 내공이 가진 순수한 힘으로 불을 만들어냈다.
고기 파티의 제일 중요한 점은 회전력이었다.
끊임없이 입으로 고기가 들어가야, 흥겨운 법이었다.
태수는 여러 곳에 고기를 익힐 수 있는 화덕을 배치해놓았다.
그 이후, 대형 꼬치를 꽂아 화덕 위에 올려두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기이한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와-"
태수의 몸 속에서 수백개의 거미실 가닥이 나와, 꼬치와 화덕을 옮겼다.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화덕과 오코의 육류가 날라다니고 있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덕분에 마을사람들은 그대로 각자 화덕 앞에 앉아, 구워지고 있는 오코의 바베큐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너, 너무 맛있어"
"여보, 한 입-"
"엄마만 먹지 말고 나도 줘!"
마을사람들은 처음 먹어보는 오코의 고기맛에 앞다투어 손이 고기를 향해 나갔다.
"고기는 많으니, 체하지 않게 다들 천천히 드세요"
소혜가 그 광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혜야, 너도 먹어"
"앗, 네-"
소혜도 자리에 앉아 노릇노릇 구워진 오코의 꼬치를 들었다.
입 안에 가득 넣자, 고기의 달콤한 육즙이 배어 나왔다.
우물우물-
"너, 너무 맛있어요!"
소혜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런 소혜를 보며, 혜수도 자리에 앉아 꼬치를 먹기 시작했다.
평소에 고급 음식만 먹던 그녀도 입맛이 맞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맛있네"
"장모님도 드세요"
마을사람들이 이 외진 곳에 가득 모여 옹기종기 고기를 뜯는 걸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달자 옆으로 태수가 다가왔다.
태수는 달자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꼬치를 달자의 입에 물려주었다.
"하으읏- 고, 고맙네"
우물우물-
오코의 고기 맛에 달자는 자연스레 동공이 커질 정도로 감탄했다.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었다.
"더 드실래요?"
"부탁하겠네, 하으읏-"
태수는 달자의 엉덩이를 손으로 음미하며, 거미실로 꼬치를 집어 달자의 입에 물려주었다.
마을 분위기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오코의 바베큐 고기에 술까지 곁들여지니, 마을사람들은 흥겨워 자연스레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나도 먹어볼까"
커뮤니티 상에서는 반드시 먹어보라며, 추천을 권할 정도로 맛있는게 이계 몬스터의 육류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수분을 갈취하는 청마지주의 독성을 제어해, 없앤 후 육즙 가득한 오코의 고기를 즐길 수 있게끔 했다.
태수는 한 입 가득 배어 물었고, 입 안 가득히 퍼지는 육즙향에 깊은 감탄을 표했다.
"역시, 커뮤니티에 올린 글들은 대부분 거를 게 없어"
"저어-"
선하가 머뭇머뭇 고기를 즐기고 있는 태수에게 다가왔다.
"선하야, 고기는 왜 안 먹고?"
"아. 그, 그게"
선하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태수의 남자다운 저음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선하는 원래 말하려던 것도 잊은 채, 몽롱한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보았다.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다, 태수의 말에 선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쭈뼛쭈뼛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도 고기 먹여주세요"
"뭐, 그거야 쉽지. 너만 안 물어봐줘서, 질투했었구나?"
"아, 아니거든요?
"푸흡- 먹여줄게"
태수는 거미실로 오코의 꼬치를 집어, 선하의 입에 먹여주었다.
우물우물-
선하는 고기의 맛을 음미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은은히 고기의 육즙이 입 안에 퍼지는 게 일품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하의 눈에 아주 가느다란 실이 보였다.
실은 매우 얇았지만, 그 강도는 강철보다도 더 단단했다.
'거미의 실?'
"익히고 계신 무공이 굉장히 특이하시네요?"
선하는 묘한 눈빛으로 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사연이 깊지. 혹시 이 무공에 관한 미래시를 본 적이 있어?"
사뭇 진지한 태수의 표정에 선하도 절로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제가 본 미래는 아니지만, 사부님이 오래 전에 하늘에 왜 괴물들이 무림으로 침공을 오기 시작했는지 미래를 본 적이 있으세요-"
"자세히 말해봐"
"그, 그게-"
태수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선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가까스로 가라앉힌 후 오래 전 그녀의 사부가 말해주었던 걸 천천히 읊었다.
"청마산의 청마지주, 억겁의 화마대신, 북해의 빙정공, 지옥야차의 현무. 이 네 요괴가 요란하게 울부짖기 시작한 이후로, 이계의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흐음-"
선하의 말을 들으니, 얼추 퍼즐이 맞춰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보는 많이 부족했다.
"그 현상과 관련된 사람은 미래시에 나오지 않았고?"
"그것까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어요"
"그래? 아쉽네"
태수는 고기를 신나게 먹고 있는 마을사람들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자리에 일어났다.
"가, 가시게요?"
"왜, 내 부탁 들을 준비되어있어?"
"부, 부탁이요?"
"까먹었어? 내기에 진 자는 이긴 자의 어떤 부탁이든 들어줘야 된다는 것. 설마, 약속을 어기진 않겠지?"
"제가 왜 약, 약속을 어겨요-!"
선하가 발작적으로 그렇게 대답하자, 태수가 선하의 입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우으-"
그러자, 선하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자연스레 감았다.
"눈은 왜 감아?"
"그, 그게-"
"푸흡-"
"놀, 놀리지 마세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난 이만-"
'할 말이 있었는데-'
선하는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겼다는 듯, 저 멀리 멀어지는 태수의 등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우연이라고요? 이게 한두번입니까? 당신들이 지금껏 몇 번이나 사전정보를 잘못 줘서 우리들이 피해를 입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이 말입니까?"
비류는 최소, 화경의 고수, 최대 현경의 고수일지도 모르는 상대를 절정고수 밑으로 깎아 의뢰비를 낮추는 그들의 못된 심보가 그저 역겹기만 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우연으로 포장하는 이들이 쓰레기로만 보였다.
무백산은 화가 잔뜩 나있는 비류를 보며 정색했다.
"자네는 지금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온 것부터가 문제라 생각하지 않나? 나는 누가 나한테 청부라도 건 줄 알았네. 의뢰건을 따지기 이전에, 예의부터 지키시게!"
"예의? 지금 예의라 하셨습니까?"
"뭐, 이제 부하들도 없으니 청부업을 하기에는 글러먹었군-"
"하-"
비류의 입에 깊은 탄식음이 터져나왔다.
원래 이런 바닥인 건 알고 있었다.
살수 단체는 철저히 을이었고, 관은 철저히 갑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은 이들의 동료가 아닌, 잠시 쓰이다 버려질 도구나 다름없었다.
시작이 그러했고, 그 끝도 그러했다.
운명이 그럴 진대, 뭐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비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쓸데없는 놈-"
무백산은 시야에 멀어지는 비류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마시고 있는 차와 다과에 다시 집중했다.
"하아-"
비류의 입에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정말, 이 길밖에 없는 것인가?
부하들을 전부 죽인 사람 밑에 의탁해야 하는가?
"아니- 부하들을 근본적으로 죽인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이다"
비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악랄한 악마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악마가 대신 되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손을 잡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의 밑으로 들어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여기가 하운 마을인가?"
광서에서도 굉장히 외진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 내부에는 아주 달콤한 고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경공을 펼쳐 달려오느라 배고팠던 비류는 마을사람들 무리에 껴서 오코의 고기를 먹었다.
"맛, 맛있다"
고기는 워낙 많았으니, 마을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비류가 먹던, 말던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비류는 정신없이 오코의 고기를 뜯었고, 어느덧 배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뭘, 그리 정신없이 드시나? 자 맥주도 먹게"
옆에 있던 마을사람은 비류가 허겁지겁 고기를 먹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비류에게 맥주를 권했다.
"아, 감사합니다-"
살수로서 익숙치 않은 인정에 당황한 비류는 어설프게 맥주를 받아들고는 고개까지 뒤로 크게 젖히며 맥주를 들이켰다.
"키야"
자연스레, 비류의 입에 감탄사가 나왔고 맥주를 권한 사람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스윽-
"바로 나를 찾을 줄 알았더니, 여기서 고기를 먹고 있었군. 배가 고팠나?"
"당, 당신은. 크흐읍-"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태수 덕분에 비류는 사래가 들렸다.
컥컥-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내가 호흡을 기억한다고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 말의 뜻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평생, 나한테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
"..."
그 말을 들은 비류는 맛있게 먹었던 오코의 고기가 위에서 소화가 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공주님. 주무실 시간입니다-"
"린, 무림맹은 우리를 그닥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아"
"예상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해도, 뭔가 씁쓸해"
공주님이라 불린 여인, 천마신교의 공주 주홍희는 천마신교를 대표해 사신으로 무림맹에 왔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기에, 정식으로 사신을 맞이하는 일정은 내일로 미뤄졌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사신 일행은 천마신교를 향한 무림맹의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마, 내일도 그닥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진 못했다.
"린, 위로해줘-"
"네, 공주님"
린이라 불린 여인은 익숙한 듯, 침대에 누워있는 홍희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