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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함락]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 땐 그냥 지나치듯이 서로를 소개했을 뿐인데요.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재차 부인을 다독여준 나는 연고를 조금 더 짜내어 부인의 손등에 발라주었다.
“아, 네……. 아무튼 세현 씨 덕분에 살았어요. 실수로 주전자를 엎어버리는 바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해지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세현 씨가 나타나서……. 정말로 뭐라 말해야 할지, 안도가 되더라고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절로 떨려왔다.
이런 청초한 미인을 매일 아침 울게 만들다니, 남편에 대한 분노가 조금씩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부인을 방치해 둔 남편에 대해 약간의 감사함이 느껴졌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부인과 대화하며 연고를 발라주고 있지 않는가?
“그나저나 커피를 타려 하셨던 겁니까?”
내가 슬쩍 인스턴트커피 봉지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지자,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잠시 나를 올려다보던 부인은 곧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세현 씨도 드실래요?”
그 물음에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이리 말한 직후, 나는 연고와 함께 가져온 붕대로 부인의 손등을 감싸주었다. 세심하게 꼼꼼히 붕대로 감싸준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어보이며 부인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가 너무 세게 묶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요. 딱 이 정도가 좋아요.”
배시시 웃음을 터트린 부인은 마치 나를 새삼 새 사람 보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세현 씨는.”
“어렸을 때에 보이 스카웃을 좀 했거든요.”
“보이 스카웃……. 굉장히 오랜만에 듣네요.”
“그러게요. 옛날엔 학교에서 이런저런 활동들을 많이 했었는데, 요즘에는 통 하지를 않죠.”
“맞아요. 그 땐 정말로 재밌었는데요.”
나 또한 부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기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잠시 추억을 회상했다. 그리고 이런 내 반응에 부인은 무언가 나에게서 동질감을 얻은 모양인지, 한결 편해진 말투로 나를 대하며 거실에 가있으라 해주었다.
그 후, 커피를 끓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인의 행동에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마치 내가 부인의 남편이 된 것만 같군.’
거실에 위치해 있는 소파에 앉아서 부인이 내올 커피를 기다리고 있으니, 마치 내가 이 집의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닌 부인의 남편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혹여나 착각을 현실로 오인해 부인을 덮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애써 현실을 일깨웠다.
“인스턴트 커피라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부인이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집이 참 아늑하군요. 같은 아파트인데도, 저희 집하고는 비교되네요.”
“그런가요? 후후.”
이런 내 칭찬에 그녀는 무척이나 기뻐해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꾸며놓은 집을 다른 누군가에게 칭찬받는다는 것만큼 기쁜 일도 또 없겠지. 게다가 그녀의 직업은 전업 주부였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범위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여성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시간이 남는 대로 집 안을 꾸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집을 누군가가 칭찬해준다면, 이유 불문하고 기뻐해야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전업 주부라는 건, 의외로 타인과의 대화에 굶주리고 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상대를 구하고 싶더라도, 대학 동창이나, 이웃집 사람으로 밖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같은 경우에는 맞벌이를 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부인과 같은 연령대의 여성은 모두 직장 일을 하느라 바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과의 대화에 점차 굶주리고 있었고, 그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나를 반긴 것일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나는 부인의 위기를 도와준 고마운 은인이기까지 않던가?
부인에게 있어서 나는 그야말로 최적의 대화 상대임이 분명했다.
“빈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렇게 부인의 집을 보고 나니까, 저도 어서 빨리 장가를 가야되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 정도인 걸요.”
이 말에 부인은 다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세현 씨는 아직 미혼이신가 봐요?”
“네, 아직 좋은 사람을 찾지 못 해서 혼자서 생활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내 말에 부인은 상당한 관심을 내비쳐 보였다.
물론 그래봤자 어디까지나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아니고, 자신이 아는 여성 중에 아직 미혼인 여성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그런 류의 관심이었다. 전형적인 아줌마들의 지나친 관심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인이 이렇게나 관심을 가져주니 귀엽게만 느껴진다.
“세현 씨가 올해로 몇 살이라 하셨죠?”
“올해로 스물여섯입니다.”
“어머, 저랑 동갑이셨네요.”
자신과 내가 동년배라는 사실에 부인은 한층 더 큰 자신감이라도 얻은 모양인지, 몸을 살짝 내 쪽으로 기울이며 방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제 손에 들려있는 커피 잔을 한 차례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여러 여성 취향을 묻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인의 질문에 나는 당황해 하는 기색 하나 없이, 이미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내 이상형의 모습을 부인에게 최대한 가깝게 해서 설명해주었다.
긴 생머리에 제법 풍만한 가슴, 그리고 이상적인 몸매. 거기다가 정숙함과 청초함이 느껴지는 미인이다.
그야말로 부인의 모습이다.
“저기 그럼 세현 씨의 이상형은…….”
내 노골적인 설명에 부인은 양 볼을 살짝 붉히며 기뻐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묘한 기대감이 솟구친다. 여기서 말만 좀 더 유창해서 부인을 잘만 구슬려낸다면, 당장에 이 자리에서 부인과 뜨거운 잠자리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 여동생인 것 같네요.”
“네?”
전혀 예상지도 못 한 부인의 답변에 내가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그녀는 여전히 맑게 웃어 보이며 내 손을 꽉 하고 잡았다.
“한번 만나보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언제 자리를 만들어드릴게요.”
확실히 부인의 여동생이라 한다면 안 봐도 꽤나 준수한 미인일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여동생이 부인보다 더 미인일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섣불리 여기서 그러겠노라고 했다간 부인이 더 이상 나를 이성으로 봐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러니 대답은 잠시 보류해두는 편이 좋았다.
“아, 그런가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혼자서 들떴죠.”
라며 미안해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부인의 태도에 나는 짐짓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다 저를 위해서 부인께서 이리 해주신 걸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세현 씨는 참 마음이 넓으시네요.”
그렇게 말한 부인은 약간 묘한 여운을 남기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무언가 좋은 이야깃거리를 얻었다는 생각에 재빨리 입을 열어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부인의 남편 분은 그렇지 않다는 걸로 들리는군요.”
“네? 아, 그럴 리가요! 그런 일은…….”
내 말에 당황해하는 부인의 태도에 나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부인. 다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니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부인과 남편 분이 서로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거든요. 솔직히 이 아파트,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방음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조금만 시끄럽게 떠들어도 옆집에서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댁에서 다투는 소리를 조금 듣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내 설명에 부인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죄송해요, 세현 씨. 아침마다 소란스러웠지요?”
“아닙니다. 아침마다 소란스러울 수도 있지요. 그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에게 남편 분과 다투는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다투는 이유를요?”
“네, 어디 한 번 속 시원하게 저에게 털어놓아 보세요. 그럼 한결 마음이 풀리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세현 씨에게……. 엄연히 남인데.”
그러면서 주저하는 부인의 태도에 나는 짐짓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서로가 힘들 때, 돕는 게 바로 이웃의 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편히 마음을 가지시고 저에게 이야기해보세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혼자 끙끙 앓고 계시면 언젠가 속병이 나게 될 겁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부인은 남편과 가정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경청하며 맞장구치는 일에 전념했다.
“그 이와는…….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이도 언제나 제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저도 그것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색에 신혼부부인데……. 너무 일에만 열중하니까, 제가 마치 가정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조금만 시간을 내달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자꾸만 화를 내서……. 저도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상냥하다고? 매일 아침마다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주말엔 잠만 퍼질러 자는 게 남편이 상냥하다니! 남편을 두둔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내가 부인의 입장이었다면 벌써부터 남편에 대한 악담을 한 사발 쏟아내었을 것이다.
나는 부인의 고운 마음씨에 감탄하면서도 쓰게 혀를 찼다.
‘내가 부인의 남편이었다면 회사를 쉬면서까지 오붓한 시간을 보낼텐데.’
물론 어디까지나 침대 위에서 말이다.
범하고, 범해서, 더 이상 시간을 내달라는 이야기를 못 할 때까지 말이다.
문득 침대 위에서 앙앙 울음을 터트리며 절정에 달하는 부인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확실히 남편의 태도가 심하긴 심하군요.”
“그렇지요?”
내 동조에 부인은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무리 회사 일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아내를 방치하는 건 역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해선 안 될 행동인 것 같습니다. 이건 분명하게 따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방치해 두면, 분명 나중에 부인께서 크게 후회할 날이 오게 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확실히 그 점이 문제가 되긴 하지요.”
솔직히 말해서 부인이 할 수 있는 대책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유일한 방법은 역시 대화인데, 그것마저도 남편이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부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고작 해봐야 오늘 아침서처럼 말다툼을 하는 정도……. 하지만 보다시피 그 방법은 이미 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불화를 더 심화시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방법이 없는 건 또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굳이 문제점을 남편 쪽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말은 지금 제게 문제가 있다는 뜻인가요?”
라고 말한 부인은 제 무릎 위로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세현 씨가 생각하기에 제 문제점이 뭔가요?”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제가 부족하다면 고쳐야지요.”
그야말로 헌신적인 아내의 자세를 보이며 절하는 부인의 태도에 나는 그대로 감동을 먹고 말았다. 이런 여자가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니……. 재차 부인의 남편에 대한 질투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과 동시에 내가 부인 쪽으로 몸을 돌리자, 꽤나 마음을 굳힌 모양인지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수긍하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인께선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다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