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32화 (53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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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서로

본선 2차전.

상대와의 악연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쉬어가는 경기다. 이미 전력 분석은 마쳤고, 방심을 하더라도 이긴다.

상대의 무공 수위는 몹시 낮다. 기껏해야 절정 수준으로 보이는 단계.

"......."

심지어 비무장에 올라오기 전부터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보준.

전생에 나를 십수년 넘게 구타하고 괴롭혔던 존재.

현천백가의 가주 백수광이 나를 방관하여 체벌했다면, 사실상 내 근골을 망가뜨리고 병신으로 만든건 백보준이 다했다.

현천백가는 돈이 많다.

무공 연습용 허수아비를 하루에 하나씩 망가뜨려도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보준은 부서지지 않는 허수아비를 사용했다.

사람이라는, 나라는 허수아비를. 가문 내에서 누구도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야했다.

'이제는 다르지.'

지금은 완전히 입장이 뒤바뀌었다. 나를 망가뜨린 것에 대해 얼마든지 복수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놈을 용서할 수도 있다.

천무명이라면 용서할 것이다.

'근데 나는 따지고보면 천무명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복수한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때리고 부술 것이다.

"...흐."

백보준은 허탈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와 마주선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흐흐...정말 거지같군."

"?"

백보준은 실성한 사람마냥 검을 들어올렸다.

아직 심판이 비무를 준비하라고 말조차 하지 않았건만, 그는 귀기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야. 너 이 새끼...전부 다 가지니까 좋더냐…?"

"......."

"그렇게 다 가지면서 더 가지고 싶더냐? 응? 씨발, 한 명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잖아."

"미친 소리."

나는 심판을 향해 무언의 압박을 날렸다.

"비, 비무 시작!"

준비하라는 말도 없었고, 곧장 시작을 알렸다. 바라던 바다.

"내가 다 가졌다고?"

저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매로 다스려야 하는 법.

현천백가의 현실이고 나발이고, 나는 감히 나를 상대로 저런 소리를 한 자를 용서할 수 없다.

"도대체 뭘 가졌다는 거지?"

"말해 뭐하겠느냐!"

백보준은 관중석 한 켠에 놓인 귀빈석을 가리켰다. 지난 번 이봉결정전 이후 각 세가, 각 문파 별로 따로 마련된 귀빈석에는 한 곳 한 곳 미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육봉이 항상 일제히 나와서 객석을 차지하는 때가 있지. 그래, 바로 지금."

"......."

"씨발, 좋겠다? 너는 그렇게 여자 다 가져서."

"......."

추악한 질투였다. 그리고 동시에 안쓰러웠다. 전생의 추마귀로서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씨발…. 왜 너만, 왜 너만 다 가지는 건데?"

이복형제도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촌에 가깝지만, 망가진 백보준의 눈에서 추마귀가 보였다.

"왜 가는 곳 마다 다 챙겨가는 거냐고…. 한 번 정도는 눈감고 쓱 못 본 척 할 수 있잖아…!"

이토록 사람이 추할 수 있을까 싶은 모습인 동시에, 더이상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추했다.

"아니."

나는 남들이 다 들을 수 있게 담담히 말했다.

"내가 다 가졌다라…. 흐, 만약 내가 전부다 다 가졌더라면...차라리 좋았겠군."

"뭐…?"

"나는 너를 알고 있다. 현천백가의 소가주, 백보준. 그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지. 다 가졌다고? 너는 내게 없는 걸 가지고 있더구나."

씁쓸한 목소리로,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팽유월이 가르쳐준대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읊었다.

"네게는 집이 있지 않느냐. 쥐가 갉아먹은 쌀을 눈물로 불려서 씹어먹어 본 적이 있느냐? 한 겨울에 덮을 짚단조차 없이 땅의 온기에 의지하며 밤을 지새운 적이 있더냐? 밥 한 번 빌어먹으려고 무릎을 꿇고 며칠을 대문 앞에서 기다려본 적이 있더냐? 품에 소면 한 그릇 사먹을 동전이 없어서 잡초를 죽쒀서 먹어본 적이 있더냐?"

왠지.

팽유월이 가르쳐준 '대사'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당장 백보준을 눈앞에 보고 있어서 그런 걸까.

"무공을 가르쳐준 스승이 있었겠지. 네가 아무리 실수하고 괴로워도 너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가문이 있었겠지. 한여름에는 서늘한 곳에서 더위를 피하고...한겨울에는 따스한 솜이불 아래에서 추위를 피하고. 그래. 너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전부 다 가지고 있었구나."

"네, 네놈…."

사람들은 알아서 오해할 것이다.

천무명이라는 청년이 아주 어린 시절에는 개고생을 했다는 것을.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왜 나오는 걸까? 사람들은 그걸 부러워하며, 동시에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그 업을 달성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기도 한다.

"나는 네가 가지고 있던 걸 가지고 싶어, 악착같이 살았을 뿐이다."

자수성가.

가진게 없던 자였기에 더 악착같이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네 알량한 경험으로 나를 판단하지 마라. 나는 네 생각보다 더 거친 삶을 살아왔으니."

"닥쳐라…! 입 발린 소리 하지마라!"

"입발린 소리라. 그렇다면 직접 보여주지. 와라. 검으로 덤벼라."

나는 한 손을 등허리 뒤로 넘긴 채, 한 손만 앞으로 검을 뻗었다.

"...말이 쓸데없이 길었군. 보러 온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말이야."

물론 전혀 미안하지 않다. 순수하게 대결하는 것도 관중들은 원하지만, 이런 '서사'가 있는 경기도 나름 즐기는 자들이 있다.

"내가 손수 쌓은 인연의 힘을, 네가 감히 이길 수 있겠느냐?"

자수성가의 강조. 더이상은 객석의 사람들에게 말해줄 필요가 없다.

"...킥."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하지만 백보준에게만큼은 보이게.

왜.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백보준에게 소리없이 입만 움직였다.

내가 미인들 다 아내로 들이니까 꼽냐?

까닥까닥.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허리 뒤로 넘긴 손으로 가볍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너, 너 이 새끼!!"

남들이 보기에는 손짓 도발에 넘어간 것처럼 보일 터.

근데 어쩌냐. 아직 부족한 걸. 아직 나는 다 가지지 못했다.

실상은 입으로 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그러니 팔대세가, 구파일방. 세력마다 한 명씩 미인을 가져볼까한다.

"이 개자식이!!"

"개자식이라…."

맞는 말이다.

카-앙.

나는 초격을 가볍게 막는 것으로, 백보준의 분노를 전부 받아냈다.

* * *

"저 새끼, 인성질하네."

"금 형, 그게 무슨 말이오?"

"별 거 아니오. 천무명이라는 자가 백보준을 상대로 자기자랑을 한다는 말이지."

"허…. 금 형! 저 불쌍한 청년을 상대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소! 천무명이 안타깝지도 않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최미봉과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군. 이미 아이까지 가졌다던데?"

"개씨발놈인데?"

* * *

아주 쉽다.

전생에 나는 그에게 무공받이였다.

이런 식으로 검을 휘두르겠다고하면, 거기에 몸을 직접 던져 내가 맞아야했다.

근골이 망가진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강하다. 아무리 뼈가 부러진다고 해도 오랫동안 요양을 하면 뼈가 다시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뼈가 붙을 틈을 주지 않고 계속 같은 곳을 타격한다면?

망가지는게 아니라 박살나는 셈이다. 때린 곳을 또 때려 악화시키니, 상처가 회복될 틈이 있나.

카앙.

방금의 공격으로 딱 백 합.

나는 백보준이 백 번의 검을 휘두를 동안 단 한 번도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고, 발조차 바닥에서 떼지 않았다.

뒤로 돌아오는 공격? 보지도 않고 검을 다른 손으로 움켜쥔 뒤 휘둘러 대처했다.

"네, 네놈…! 현천백가의 검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는 모든 초식을 파훼했 다. 내가 현천백가의 검을 배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경험으로. 눈으로.

허수아비 시절부터 나는 백보준의 공격을 받아내며 본능으로 초식의 약점을 찾으려했다.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맞을 수 있을까.

사내답지 못하다고, 비굴하다고 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하."

그 시절, 고통스러운 순간이 오직 이 때를 위한 것이라니.

"...흐흐."

절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백보준의 검을 검으로 요격할 때마다, 나는 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행복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추마귀 시절보다도, 곤륜의 삼류제자 시절보다도 더 이전에 응어리진 앙금은 아무래도 내 몸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모양이다.

'이제는 안녕이다.'

허름한 창고 방, 씻지도 못하고 매일같이 피떡이 되어 살던 소년은 이제 없다.

"이제 끝이다."

백수광. 백보준. …그리고 백성기.

서걱.

나는 백보준의 검을 검으로 베어버렸다.

현천백가와의 인연을.

약했던 과거를.

"...하."

백보준은 허탈한 얼굴로 부러진 검을 떨어뜨렸다. 무사가 검을 놓았다는 것 만으로도 이미 승패는 갈렸다.

그래도.

'한 방 정도는 괜찮잖아?'

"...닿을 수 없었나. 크흐흐...그래, 다 가져라! 네놈은-"

퍼-억.

나는 놈의 명치를 발로 걷어찼다. 놈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커, 헉…?"

그냥 걷어찬게 아니다. 나는 찰나의 순간, 놈을 향해 담담히 이죽거렸다.

"어딜 항복하려고."

파----앙!!

놈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공중에 붕 뜬 채로 비무장 끝으로 날아간 그는 관중석 벽 아래에 부딪혔다.

"......."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기분좋은 적막 속에서 심판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 그만!! 백보준, 장외!!"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

이제, 현천백가는 더이상 무대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 * *

"월아야, 아빠 이겼다!"

나는 하북팽가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월아를 안고 승리를 자축했다.

"또 이겼어?"

"당연하지. 아빠는 패배를 모르는 남자거든."

"그래서 엄마들이 맨날 아빠한테 졌다고 하는 거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니?"

월아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 저 아니에요."

사공희가 태희를 안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누가 그런 말을 했어?"

팽유월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변을 훑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월아가 이상한 소리를 듣도록 주의하지 않은 건 용서할 수 없다.

"엄마가!"

월아는 팽유월을 가리켰다. 순식간에 팽유월은 사색이 되었다.

"워, 월아야?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응!"

"어, 언제?"

"음…몰라! 기억안나!"

"......."

나와 팽유월은 동시에 시선이 맞았다. 당분간, 아니 앞으로도 평생 서로 조심하자는 뜻을 눈으로 교환했다.

"흠. 상공.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어요?"

"백보준? 장외로 벽에 처박혀서 의료원 신세를 지게 되었지."

"...더 패도 될 것 같은데."

혈소예는 나를 향해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나와 백보준의 악연을 알고 있는 여자다.

다른 이들은 내가 그저 어린 시절 출생의 비밀을 알고 현천백가를 가출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혈소예는 가출하지 않았으면 일어났을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있다.

나를 추마귀로 만든 건 나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추마귀가 된 배경에는 분명 백보준이 큰 역할을 했다.

아니, 만악의 근원이다.

그런 존재를 고작 명치 한 번 걷어찬 거로 끝냈으니, 혈소예 입장에서는 답답할 터.

"때로는 그런 자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색다른 모습이 될 것 같은데."

"됐다. 어차피 복수야 뭐…."

전생의 혈강시가 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미래, 혈교주는 내게 백보준의 사지를 찢어버릴 기회를 줬다.

비록 이미 죽은 자였지만, 혈교주는 나에게 능지처참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줬다.

폭력을 통한 복수는 그거로 충분하다. 이번의 일격은 응어리를 덜어낸 거로 충분했고, 앞으로 백보준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리라.

무림에서.

"소예. 하오문주에게 소문은 잘 전해졌지?"

"응. 아마 지금쯤 안휘의 식솔들을 상대로 증거를 찾고 있을 거야."

"무슨 증거요?"

"아, 별 건 아니고."

진짜 별 건 아니다.

"백보준의 명예를 위해, 백수광을 죽인다."

사회적으로.

"싸우면서 본 건데, 백보준의 몸에 멍이 살짝 보이더라고."

개버릇 남 못준다.

백보준이 누구를 보고 자랐겠는가?

나는 이미 무림의 일을 통해 상대를 진정으로 죽이는 길을 터득했다.

명예사.

"아버지의 마음으로, 백수광을 용서할 수 없어."

자식을 때리는 부모라니.

"밀고해야지."

관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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